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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희년 그리고 새로운 사회
구조화한 착취, 약탈적 금융 질서 벗어나려면
  • 남기업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01.02 15:57

토지+자유연구소가 '희년과 특권, 그리고 대안 경제'라는 제목으로 격주 간격으로 5차례 칼럼을 연재합니다. 연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비난받는 표적"과 희년

예수의 탄생을 다루는 누가복음 2장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누가는 그를 의롭고 경건한 사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은 주의 구원을 보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예수에 관한 그의 예언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가 "비난받는 표적"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진술이다.

왜 예수를 가리켜 비난받는 표적이 된다고 한 것일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의 사명은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기록해 놓고 있다. 예수는 자신이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선포하러 왔다고 선언하고 있다. 가난한 자, 눌린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 예수의 사명이라고 누가복음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타인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람들, 타인을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억누르는 사람들, 타인의 눈을 멀게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예수는 비난받는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희년, 모든 피조물의 자유와 해방

그렇다면 희년이 대체 무엇이기에 예수는 희년 선포를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던 걸까. 예수의 사역을 '속죄'로 축소시키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희년은 해명해야 할 매우 중요한 주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희년을 사회경제적 관점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희년이 되면 자기 땅이 생기고 부채에서 자유로워지며 노예 상태에서 해방한다는 것에 초점을 둔다. 물론 이것은 희년의 중요한 내용이다. 자유는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어야 비로소 실현되는데, 소작농은 지주에게 경제적·정신적 예속 상태에 빠져있고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눌려 있으며 노예는 주인의 도구에 불과하므로 이들이 자유를 얻으려면 토지가 있어야 하고 부채가 없어야 하며 노예 상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이런 족쇄에서 놓임 받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희년은 이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희년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자유와 해방을 선포한다. 희년이 선포된 음력 7월 10일은 대속죄일이다. 희년의 중요한 측면 하나가 바로 죄에서의 자유와 해방이다. 그렇다. 희년에는 주류 교회가 강조하는 속죄가 포함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희년에는 경작을 쉬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인간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희년을 이해하고 묵상하게 되면 인간을 넘어 모든 피조물의 탄식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희년은 죄에서의 자유와 해방, 사회경제적 속박에서의 자유와 해방, 나아가서 자연환경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자유와 해방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진리와 희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진리란 무엇인가. 적어도 진리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불평등한 현실과 생태 환경적 재앙과 인간 내면의 슬픔과 고통 등을 빠짐없이, 그것도 하나의 문맥에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종합적·입체적 해법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의 핵심은 '총체성'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희년은 진리의 정수를 보여 준다. 희년을 깊이 묵상하면 오늘날의 경제적 불평등과 생태 환경의 위기와 인간 내면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저항'해야 할 이 세상의 질서가 무엇인지, 나아가서 우리가 이 땅에서 '형성'해야 할 새로운 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희년의 안경을 쓰고 인류 역사를 보면 인권 신장과 사회경제적 정의와 생태 환경 보존을 위한 피와 땀과 눈물과 한숨이 의미 있는 행동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들의 헌신과 노력에 감사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희년은 인간 개개인과 그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사회와 자연까지 포함된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근본 통찰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각 부문이 서로 어떻게 연락하고 상합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그렇다. 희년 안에서 '속죄'와 '사회경제적 해방'과 '생태적 전환'은 비로소 만나게 된다. 사회경제적 해방과 생태적 전환을 위한 노력이 희년의 질서를 이루려는 애씀이듯, 죄에서의 자유와 해방 선포도 희년의 나라를 이루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희년은 이 둘을 애써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다. 무엇이 먼저라고도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에 충만한 사람일수록 정신적·영적·사회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절규와 환경 파괴로 인한 피조물의 탄식 소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니 희년에 가까이 가는 사람은 예수처럼 "비난받는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사람을 임금노예로 전락시키고 궁핍의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자본주의 질서와 생태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에 저항하고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기독교인에겐 "비난받는 표적"의 삶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희년을 하나님나라의 모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음을 알게 된다. 정삼각형을 그리려면 정삼각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듯, 다시 말해서 정삼각형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나라를 구하려면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구하려는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런 까닭에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가 담임목사직을 아들에게 세습하고 교인들이 독재하는 목회자를 열렬히 칭송하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님나라를 입에 올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논리 비약일까.

희년을 하나님나라의 모형으로 상정하면 구체적인 회개가 가능해진다. 희년을 인식하면 제왕적 교회 구조와 독재가 하나님나라의 원리와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에 저항하게 된다. 희년을 깨닫게 되면 속죄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희년을 이해하게 되면 궁핍에 대한 두려움에 벌벌 떠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양산하는 불의한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희년을 깨닫게 되면 토지 투기로 돈 버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된다.

'새로운 사회'와 한국교회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사회의 이상, 하나님나라의 모형이 바로 희년이다. 새로운 사회는 모두에게 평등한 토지권이 보장되는 사회, 일반 용어로 말하면 토지 투기가 없는 사회다. 새로운 사회는 다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는 구조화한 착취가 근절된 사회다. 극도의 불평등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사회다. 새로운 사회는 부채에서 해방되는 사회다. 아니,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부채의 늪에 빠질 필요가 없는 사회다. 새로운 사회는 노예 노동에서 해방되는 사회다. 노동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사회다. 새로운 사회는 각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성을 유지·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이자, 타인과 참된 만남이 가능한 사회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의 이상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이라는 일반 학문의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사회과학은 희년의 질서가 오늘날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 줘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고 할 수 있다. 희년이 말하는 평등한 토지권 정신은 토지 불로소득을 완전히 환수해 사회 구성원 전체가 그 이익을 똑같이 공유하는 방식(토지 배당)으로 충분히 구현할 수 있음을 오늘날 사회과학 이론이 보여 준다. 이렇게 하면 주거 문제가 해결되고 토지 때문에 발생하는 불평등도 해소되며 토지 불로소득을 노리고 일어나는 난개발·막개발도 방지되고 토지 투기에 짓눌렸던 생산의 용수철이 튀어 올라 경제 효율도 증가한다는 것을 사회과학의 논리가 증언한다. 그뿐 아니라 희년은 중소기업에 대한 재벌 대기업의 착취를 바로잡으라고 명령한다. 이런 것의 결과로 경제적 불평등이 해소되면 생태 환경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높아지고, 결국 모든 피조물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이상에 점점 가까이 갈 수 있게 된다.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당장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도해야 한다.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로 이루어짐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겸손한 삶과 은총과 감사로 충만한 삶과 타인의 아픔에 깊게 공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저항하고 형성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공급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세 사람이 모여서 또 기도해야 한다.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희년에 의해 교회가 개혁되도록 눈물로 간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독교 단체인 '희년함께'는 그동안 예배 사역을 충성되게 감당해 왔던 '마커스커뮤니티'와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희년 예배'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예배와 찬양과 기도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교회는 반희년적 질서의 피해자들을 돌보는 활동을 적극 전개해야 한다. 오늘날 반희년적 질서의 최대 피해자는 청년이다. 구조화한 착취와 부동산 투기와 약탈적 금융 질서가 청년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태어난 걸 한탄하고 있는 그들은 현재 고립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부채의 늪에 빠져 있다. 손을 내밀어 이들이 부채와 고립감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교회가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희년 질서에 가까운 법과 제도를 만들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 때론 온라인에서, 때론 오프라인에서 건강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행동도 결국 희년이라는 '전체'를 이 땅에 이루려는 노력의 '부분'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야 기독인은 물론 비기독교인과의 협업과 분업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희년은 새로운 사회를 창출할 수 있는 상상력의 보고寶庫다. 희년은 우리가 이 땅에서 구하려고 하는 하나님나라의 모형이다. 우리는 희년에서 불평등 심화와 생태 환경 위기로 요약되는 자본주의 극복의 열쇠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희년을 사회경제적·생태적 측면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희년 선포의 대상과 범위는 인간과 사회와 자연, 즉 모든 피조물이다. 마지막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이런 궁극적 이상을 마음에 품어야 하며 교회는 이런 이상이 오늘날에도 가능한 '현실'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남기업 /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희년함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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