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새길교회 한완상 신학위원의 2017년 11월 5일 새길교회 주일예배 설교['신·인(神·人)장벽, 생·사(生·死) 장벽 허물기: 복음의 진수']입니다. - 편집자 주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8-39절)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립보서 3장 10-11절)

"그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1장 3-4절)

지난 1,700여 년간 기독교 역사는 역사의 예수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축출해 온 역사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그 축출의 흔적은 뚜렷합니다. 서구의 거대한 성당들의 그 으스스한 죽음의 찬 기운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한국에서 화려하나 천박하게 치장한 교회, 값싸게 부티 나는 메가 처치에서 예수와 그리스도의 실종을 가슴 아프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갈릴리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추방했을까요. 한마디로, 거대한 교회 권력이 그렇게 했지요. 막강한 세속 권력과 결탁하여 갈릴리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추방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비극적 권력 유착과 결탁은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기독교를 자신의 권력 확대의 수단으로 사용한 후부터 두드러졌습니다. 그의 세계 지배 탐욕은 그것을 합리화해 줄 종교적(또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의 전쟁 승리를 담보해 주는 종교적 담론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핍박받던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를 국가 종교로 승격시켰습니다.

그에게는 로마제국을 통합할 거대한 통합 종교 권력이 필요했기에 거대한 하나의 보편 교회인 가톨릭교회를 탄생시켰고 육성했습니다. 이 교회를 안으로 단단히 단합시키고, 밖으로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 강력한 그리스도교 교리가 필요했습니다. 거대한 하나의 제국과 거대한 하나의 교회를 위해 하나의 신적인 예수 그리스도 신조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교리가 단단하게 교조화되어 갔습니다. 일단 절대 교리로 확정되면서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은 역사의 예수와 부활의 예수를 추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과 부활한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심화 운동은 절대 권력을 근원적으로 용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절대 권력은 '위험한' 하나님나라 운동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나라 운동이 복음의 동력이라고 한다면, 지난 1,700여 년간의 기독교 역사는 복음을 훼손하여 천박한 권력 이데올로기로 타락시킨 역사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오늘 이 메시지를 저는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 500여 년 전의 종교개혁을 기리는 것도 깊이 따지고 보면 그 개혁이 하나님나라 운동을 꽃피우는 데 실패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성서만으로"라는 종교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개혁이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이 세상에, 우리의 현실에서 펼쳐 내지 못한 것임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권력의 반(反)복음적 신앙과 신학을 회개하는 가슴으로 복음의 진수를 다시 되찾아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한마디로, 부당한 장벽을 허무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권력은 인간에게 부당한 고통과 억울한 아픔을 안겨 준 온갖 장벽과 경계선을 종교의 이름으로 생산했습니다. 권력은 그 장벽 세움을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해 주었습니다.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 차별 등을 종교의 명분으로 정당화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의 장벽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장벽은 신앙과 신학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장벽입니다. 이 심각한 장벽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고 확대되며 재생산되어 왔기에, 그것을 심각한 장애로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두 가지 심각한 신앙적 장벽 또는 신학적 장벽을 거론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신과 인간 사이의 장벽이요, 다른 하나는 삶과 죽음 간의 장벽입니다. 이 두 장벽을 허물고자 했던 갈릴리 예수와 부활의 예수를 저는 오늘도 사모하면서, 그분의 현현의 은총을 이 시간에도 갈구하면서, 복음의 진수를 새삼 깨닫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오늘의 한반도 상황, 한국교회 처지에서 이 복음의 진수를 새롭게 깨달으면서 하나님나라를 이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서 세우는 일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지금 세계 질서를 뒤흔드는 극우 보수주의의 포퓰리즘이 전 지구적 위협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확신합니다.

다음 주일에 한국을 방문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장벽 세우기에 지금 열과 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는 국가·인종·계급·이념 간의 증오 장벽을 더 높이 세워 보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위험하고 반(反)평화적 노력에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가 적극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평화로운 시민 명예 혁명인 촛불 시민운동을 폄훼하고 있는 한국적 태극기 십자가 세력이 친(親)트럼프 세력이 되어 오늘도 부끄러움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분노하면서 안타까워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진실이 있습니다. 두 가지 장벽 제거와 하나님나라 세움과는 본질적으로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 장벽 허물기는 기독교의 중요한 담론들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조 담론, 성육신 담론, 비움 실천(Kenosis) 담론, 그리고 부활 담론이 모두 하나님나라 세우기와 뗄 수 없는 담론들입니다. 장벽 세우기가 소중한 이런 담론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서로 분리시키려는 권력과 결탁되어 있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권력은 바로 예수를 광야에서 시험했던 바로 그 세력임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신·인(神·人) 간의 장벽 허물기부터 성찰해 봅시다. 도대체 이 장벽을 누가 먼저 허물고자 했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스스로 이 장벽을 허물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모험이었습니다. 이 모험은 하나님의 애틋한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사건입니다. 성육신은 매우 감동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모험이며, 실천입니다. 이 모험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천지창조 후 하나님이 느끼셨던 안타까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여섯째 날에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보시고, 그 아름답고 선한 모습에 감탄하셨습니다. '참으로 좋구나' 하고 감탄하셨습니다.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먹거리로 푸른 풀을 주셨고, 그 풀을 만족스럽고 평화롭게 먹고 자라는 생명체들의 삶을 확인하셨기 때문입니다. 먹거리를 놓고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모든 생태계가 샬롬(Shalom)의 그 아름다움과 그 선함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먹거리 문제로 긴장하거나 다투거나 할 필요가 아예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평화와 공의가 단비처럼 대지를 적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애초의 평화롭고 정의로운 창조질서가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풀 대신 다른 생명체를 음식으로 먹기 시작한 갑질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살육 행위도 창조질서를 멍들게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안타까워하셨고 후회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자와 같은 무서운 갑질하는 세력이 다시 소의 여물을 먹게 하기 위한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역사적 현실에서 사자들의 갑질이 항상 전쟁으로 치닫게 되는 비극의 실상을 보시고, 성육신의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014년 봄, 세월호 참사가 터졌습니다. 이때, 저는 하나님이 억울하게 수장된 분들과 함께 동고사(同苦死)하셨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만행, 스탈린의 굴라크 참상, 일제의 군함도 비극과 난징 학살의 참상 모두를 저는 권력 악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공격한 비극적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악의 몸부림이 지금 한반도에서 반복될 수 있다는 조짐이 보이기에, 저는 더욱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더욱 절박하게 이해할 것 같습니다. 트럼프와 김정은 간의 선제적 핵 공격 말싸움을 지켜보면서 저는 하나님의 성육신 모험을 더욱 절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의 성육신 모험은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신적 절대 권력과 특권을 내려놓고 인간으로 오시되, 낮고 천한 종으로 오시어, 너무나 억울하게 악의 권력에 의해 죽으시기로 작정하신 모험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육신 모험은 철저한 자기 비움의 용단과 처절한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시겠다는 모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육신(Incarnation)이 바로 자기 비움(Kenosis)와 직결되고, 나아가 부활과 마침내 이어짐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는 대체로 성육신을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을 낡은 교리나 교조로 여깁니다. 마치 낡은 고택 방벽에 걸려 있는 고서 같은 것으로 보는 듯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성육신은 신비한 사건이면서도 엄청난 변혁을 동반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께서 당신의 그 막강한 힘,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그 엄청난 권력을 내려놓으시고 비워 내시어 세상에 오신, 그것도 가장 비참한 팔레스타인의 역사 현실에 오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누추한 말구유에 오신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왜 화려한 궁전의 왕자로 오시지 않고, 권력자의 장자로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역사의 현실에서 가장 억울하게 고통당할 수밖에 없는 을(乙)의 자녀로 오신 것은 그 고통에 참여하면서, 그 고통의 구조적 사슬을 을들의 손을 잡고 함께 극복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를 여기서 잠시 새롭게 조명해 봅시다. 신과 인간 간의 장벽 허물기는 전적으로 신의 주도적 모험과 결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신 주도의 신·인(神·人) 장벽 허물기가 신의 권위만 더 높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꼴찌와 지극히 작은 자들의 권위를 더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이 천내인(天乃人)이라면, 하나님의 그 모험은 인내천(人乃天)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겠습니다. 天乃人이 人乃天과 같은 것임을 우리는 두 가지 성서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고백입니다. 누가복음 1장 51-53절 본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그녀 개인의 사사로운 소망이 결코 아닙니다. 당시 권력 주체들에 의해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억압받으며 차별받았던 밑바닥 인생의 갈망이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장차 이와 같은 천지개벽을 일으킬 것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은 꼴찌들이 하나님처럼 존귀하게 여기게 될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곧 人乃天의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또 다른 성서 기록에 따르면, 예수께서 불결하고 지저분한 말구유에 태어났을 때, 갑자기 천군천사가 밤샘 노동할 수밖에 없었던 딱한 밑바닥 인생이었던 목동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소식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이루어질 것임을 알리는 소식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때가 어느 때였습니까. 하늘의 영광은 땅의 평화와는 아무런 연관도 안 된다고 절망했던 때가 아니었습니까.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삼중으로 억압과 수탈을 당하고 있던 처절한 때였습니다. 평화를 앞세운 팍스로마나의 권력과 그 권력에 기생하여 백성을 착취, 억압했던 헤롯 왕가와 교만했던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결탁하면서 땅의 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때가 아니었습니까! 평화도, 정의도, 모두 박살 난 처참한 팔레스타인의 현실에서 평화의 왕으로 아기 예수가 탄생했다는 선포는 천지개벽과 혁명적 변혁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한 것입니다. 예수 탄생은 밑바닥 인생이 존엄한 존재로 대접받게 될 새 질서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신·인(神·人) 장벽을 허물어 평화와 공의의 새 질서, 곧 하나님 지배의 도래를 알리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의 실현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결코 추상적 교리나 교조의 선포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성육신 사건이 신·인(神·人) 장벽 허물기의 사건이라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배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사건일 터인데, 과연 하나님나라 곧 천국(天國) 운동은 천당(天堂) 가기 열망과는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천당 신앙은 예수의 운동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당 신앙은 반천국 신앙(反天國信仰)입니다.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교회는 교인들에게 죽으면 영혼만 가는 곳이 천당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천당은 역사의 현실과 철저하게 단절된 영혼 집합소라고 가르칩니다. 그곳에서 영혼만 영생 복락을 누린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곳은 철저한 피안(彼岸)입니다.

그런데 그곳 피안에서는 영혼만이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게 되는 천당이 있다고 합니다. 당(堂)이라고 한 것은 권력의 자리가 있는 처소라는 뜻이 있지요. 천당에 가도 영혼은 당의 세력에 지배받게 된다는 뜻이지요. 육체 없는 혼들이 과연 일정 공간이 필요한지는 몰라도, 그곳에 가서도 당(堂)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천당 신앙이 갖는 더 심각하고 흥미로운 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신앙이 역사를 주관하시며 역사 속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을 피안의 영혼 세계에 감금하게 된다는 진실입니다. 스스로 역사 속에 인간으로 오셨고, 성령으로 지금도 인간들과 소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초월의 피안으로 다시 쫒아내 버린다는 진실입니다.

흔히들 죽으면 요단강을 건넌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단강은 무서운 경계선이요, 허물 수 없는 무서운 장벽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요단강은 공포의 강이기도 합니다. 인간 예수로 오신 하나님은 요단강을 경계선으로나 장벽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부활 신앙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만, 신·인(神·人) 장벽을 허문 사랑의 하나님은 생명과 죽음 간의 장벽도 허무셨기 때문에, 부활 예수를 믿는 예수 따르미들은 죽음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면서 매일을 더 가치 있게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빌립보서를 통해 부활 예수 안에서 날마다 죽는다(고전 15장 31절)고 고백했고, 삶과 죽음 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기쁨을 간증했습니다(빌립보서 1장 21-24절).

이렇게 본다면, 천당 신앙은 한편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신플라톤주의적 이원론(二元論) 신앙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 이 세상에서도 잘살다가 죽어 저 천당 가서도 지극한 행복, 곧 영락(榮樂)과 극락(極樂)을 누려 보겠다는 천박한 인간 탐욕의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의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천국 신앙은 역사 현실 속에서 이룩하려는 복음적 노력에 찬 물을 끼얹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인(神·人) 간의 장벽 허물기는 갈릴리 예수의 운동에서 지속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예수는 두 가지 구체적 프로그램을 통해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맛보게 해 주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당시에는 제대로 맛보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첫째는 무상 치유 선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치유를 통해 인간들에게 부당한 고통을 부과했던 율법주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당시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지배 세력은 세뇌시켰습니다. 심각한 질병일수록 심각한 죄지음의 결과라고 가르쳤습니다. 질병은 깨끗함과 거룩함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믿었습니다. 율법은 이 거룩함과 깨끗함을 지켜 내기 위해 신이 내린 규범이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 여성, 이방인들이 질병에 걸리게 되면 권력자들은 그들이 불결하고 거룩하지 못한 짓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함과 속됨 간의 구별은 전적으로 율법주의 권력자들이 결정했습니다. 낙인 권력을 독점한 권력 주체들이 약한 자를 더욱 약하게 하여 그들의 지배를 강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엄격하게 청결 규칙을 강화하고 강요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런 상황에서 을들의 질병을 치유해 주실 때, 몸의 고통만은 제거해 주시지 않고 바로 이 억압적 질병을 규정하는 권력, 곧 낙인 권력을 해체하셨습니다. 억울한 질병(혈루병)을 열두 해 동안 앓으면서 경제적 고통까지 겪었던 딱한 여인에게,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그리고 자유롭게 새 삶을 살도록 희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예수의 치유 사건은 성(聖)과 속(俗) 간의 장벽을 허무는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청결과 불결 간의 사회 종교적 담벼락을 허물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조그마한 혁명이었지요.

또 다른 천국 실천 프로그램은 열린 밥상 운동이었습니다. 지금이나 당시나 식탁의 둘레는 완고한 계급과 신분의 경계선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식탁을 차렸을 때, 이 계급의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도무지 한 상에 둘러앉아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없는 불결하고 불순한, 잡스러운 인간들을 한 상에 둘러앉게 했습니다. 그의 밥상 운동은 계급 타파 운동이었습니다. 자유로운 소통의 평등 공동체 실천 운동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밥상에서 하나님나라의 맛과 멋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 열린 밥상 공동체의 감동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예수 따르미들은 예수의 최후 만찬의 의미도 새롭게 되새겨야 합니다. 최후 만찬에서 나누는 떡과 잔은 바로 신·인(神·人) 장애물을 헐어 버렸던 살신성인의 성육신 사건의 동력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떡 나누기, 잔 나누기에서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거룩한 뜻, 곧 사랑의 뜻을 우리는 늦게나마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대고, 동고, 속죄를 모두 포괄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깊게, 얼마나 넓게, 그리고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가를 확신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렇게 상호적 살신성인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만찬을 통해 개인의 실존뿐만 아니라 역사와 구조가 함께 새롭게 변혁된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나눔을 통해 우리는 상징적으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새 하늘, 새 땅을 추구하는 변혁자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후 만찬에 따른 우리의 성만찬 예식은 예식일 뿐만 아니라, 사랑 실천이라는 혁명적 결단식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두 번째 심각한 장벽인 삶과 죽음과의 장벽 허물기가 하나님나라 운동과 선교의 또 다른 핵심임을 성찰해 봅시다. 부활 사건이 바로 이 장벽을 허무는 사건입니다. 부활사건은 매우 신비한 종교적 체험 같지만, 그것은 또한 매우 강력한 역사 변혁의 사건입니다. 이 점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자기 비움(Kenosis)과 부활이 또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말해야 합니다. 십자가 고난은 예수에게는 고통스러운 자기 비움의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는 악의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고통당했으나, 그 악의 방식으로 죽음의 권세에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권력의 발악(發惡)에 선으로 차분하게 대응하셨습니다. 곧 발선(發善)으로 권력자의 악행에 순한 양처럼 대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원수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는 권력자들의 어리석은 악행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기를 예수는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악행인 줄 모르고 예수를 실정법에 따라 처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권력자들은 십자가 처형을 합법적 행위라고 여겼습니다. 권력은 법의 이름으로 예수를 처형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의 놀라운 발선 대응으로 로마의 사형집행관은 처형당한 갈릴리 청년 예수를 무죄일 뿐만 아니라, 신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로마 권력이 사형수 예수의 발선 행위 앞에서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비움(Kenosis)의 감동적 힘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육신(Incarnation)이 자기 비움(Kenosis)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부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어짐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나라가 역사의 현실에서 심어지고,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는 후일 갈릴리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면서 신과 인간 사이의 장벽을 지속적으로 허무셨습니다.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면서 환자들도 이 장벽 무너짐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바(abba)라고 부르면서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간이지만, 존엄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 밑바닥 인생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함께 치유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으며, 한 식탁에 둘러앉아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인의 기쁨, 평등한 인간으로 대접받는 보람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신·인(神·人) 간의 장벽이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신이 스스로 그 벽을 제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성육신 사건이 비움 실천을 통해 마침내 부활 사건으로 이어지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 사건이 주는 가장 큰 기쁜 소식, 곧 복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생·사(生·死)의 장벽이 무너진다는 진실입니다. 사망의 쏘는 독침의 효력이 완전히 제거된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에서 오히려 부활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삶과 죽음은 새로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생사 불이(生死不二)를 경험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난과 역경의 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사는 것도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증언했습니다. 여기 유익하다는 말은 장사꾼이 뜻밖의 큰 소득을 얻었을 때의 기쁨을 말합니다. 일종의 대박이지요. 그러니, 죽음도 대박이라고 믿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사는 것이 부활 예수, 곧 그리스도의 선물이고, 죽는 것도 정말 대박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감옥에 갇혀 처형될 날을 기다리고 있던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에서 그의 대박 희열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삶과 죽음 모두 보람된 일이기에,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삶과 죽음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모두 대번에 삶을 택할 것입니다. 생·사(生·死) 간의 선택에서 고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는 죽음도 보람된 일이기에,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삶 속에서는 이미 하나님나라가 활짝 꽃피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수감 생활을 하면서도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특권(빌립보서 1장 29절)이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처형 직후, 절망해서 도망갔던 제자들이 밀폐된 비밀 장소에 함께 모여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부활 예수가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때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부활 예수가 공간적 장애물을 뛰어넘어 '유령'처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매우 다정다감한 스승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셨다고 증언합니다. 갈릴리 당시의 예수보다 더 따뜻한 사랑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용기와 소망의 메시지를 던져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들에게 부활 예수는 평화와 평안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창조질서의 샬롬이 제자들에게 임하기를 축원하셨지요. 유령은 공포에서 근원적으로 해방시키는 샬롬을 결코 선포하지 않습니다. 부활 예수는 샬롬 없이 공포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친히 십자가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상처는 세상 권력의 악행을 너무나 뚜렷하게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악한 권력에 의한 살해라면, 예수의 부활은 그와 같은 역사적 악행을 멋지고 우아하게 극복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악의 방법으로 극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 사랑을 넘어 원수 사랑 실천의 감동으로 극복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복음주의 복음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복음, 죽음의 장벽을 허무는 감동적인 복음이라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부활 예수의 첫 번째 현현(나타나심) 시간에는 없었던 제자 도마가 늦게 그들과 합류하여 현현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자기 손으로 예수의 상처를 직접 만져 보지 않았기에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고대인이 아니었나 봅니다. 몸은 고대에 살았으나, 정신은 현대의 계몽주의자나 실증주의자로 산 것 같습니다. 그는 모더니스트였지요.

엿새 후, 그리스도가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부활 예수는 유독 도마에게만 가까이 갔습니다. 그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기 위하여 그에게 다가갔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은 도마의 상상과 제자들의 예측과는 아주 달리, 도마에게 더 다정하게 다가오셔서 손목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친히 보여 주시고 도마에게만은 그 상처를 도마의 손으로 직접 만져보라고 청했습니다. 그가 실증주의자였으니, 실증을 자기 손으로 확인해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 도마가 그 상처와 상흔 속에 드러나는 로마 권력과 성전 권력의 악을 몸으로 느껴 보라고 한 것이지요.

도마는 부활의 주님의 따뜻한 요청 앞에서 마치 로마 백부장이 십자가 앞에서 감동으로 무너졌듯이, 부활한 예수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아픔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 상처를 본 후, 도마는 이렇게 조용히 외쳤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때까지 예수의 제자 중에 어느 누구도 스승에게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제자는 없었습니다. 특히 그 호칭에 담긴 자기 변화의 기쁨을 담아 그렇게 고백한 제자는 없었습니다.

한때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베드로가 스승에게 메시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적은 있으나, 그때 베드로는 그 뜻도 모른 채 암기 실력으로 그렇게 고백한 듯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부활 예수의 역사적 상처를 보고서 부활 예수께서 권력 악을 마침내 사랑으로 극복해 냈음을 온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상처를 감히 만지지 않았으나, 보기만 해도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모더니스트의 고백이기에, 오늘 우리에게 도마의 고백은 더욱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놀랍게도 그 끝머리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 예수께서는 숨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선포한 것을 증언합니다. 여기에 엄청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의 진수가 있습니다. 이 숨은 창세기 2장 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입니다. 사람을 생명체로 만들었던 창조주 하나님의 숨이고, 하나님의 기운입니다. 부활의 예수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숨결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용서의 선교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부활이 재창조와 연관된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데, 저자는 무엇이 아쉬웠던지 에필로그로 21장을 추가했습니다. 이 후기의 메시지가 또한 엄청나게 감동적입니다. 예수 처형 후, 절망했던 제자들은 옛 생업을 찾아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익숙했던 고기잡이가 도무지 신통하지 않았습니다. 밤새 노동했으나 맹탕이었습니다. 이때, 호숫가에서 그들을 기다렸던 부활 예수께서는 피로와 실망으로 쓰러질 것 같은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이때, 요한은 그가 스승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물에는 큼직한 물고기가 153마리나 잡혔습니다.

기진맥진했던 제자들을 부활 예수는 미리 갈릴리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저 기다린 것이 아니라, 허기지고 지친 그들에게 대접할 떡과 생선을 구워 놓고 기다렸습니다. 거기에 새로 잡은 생선도 구웠습니다. 그리고 친히 요리사가 되어 숯불을 피워 구운 떡과 생선을 들고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전의 갈릴리 예수는 식사 대접을 받았지만, 부활의 그리스도는 자기가 친히 식사 음식을 요리하여 제자들에게 직접 대접했습니다.

부활 예수는 유령이나 귀신일 수가 없습니다. 갈릴리 예수, 곧 역사의 예수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아빠 같은 엄마요, 엄마 같은 아빠였습니다. 그는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또한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아니,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지배, 사랑의 지배, 샬롬의 지배, 공의의 지배의 새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활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 세우기에 본격적으로 발동을 걸었습니다. 이제 역사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 간의 장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극적인 우리의 현실 속에서 예수 따르미들은 그리스도 따르미로서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해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00여 년 전, 강대국의 탐욕과 무력으로 식민지로 떨어졌다가 전범국 일본의 패망으로 72년 전 해방과 광복을 마땅히 누렸어야 할 우리 민족에게 강대국은 다시 분단의 족쇄를 채웠습니다. 그 결과, 지난 70여 년간 열전 냉전으로 너무나 억울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분단 체제를 심어 놓은 강대국들은 오늘도 한반도의 평화를 세울 뜻이 없습니다. 자기들의 패권주의 지배를 위해 이 분단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의 상황에서 예수 따르미들은 분단의 장벽을 허물어, 조국 평화의 새 질서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 장벽 허물기가 하나님나라의 긴급 아젠다(Agenda)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신·인(神·人)의 장벽을 허무셨고, 생·사(生·死)의 장벽을 제거해 주시면서 온갖 다른 장벽들도 복음의 아젠다로 제거하시길 원하시기에, 오늘 한국의 예수 따르미는 마땅히 분단의 장벽 허물기에 복음의 일꾼으로 앞장서야 합니다.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한반도 분단의 현실에서도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천당 신앙에 안주하는 교회를 흔들어 깨우는 일에도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는 이들은 앞서 나가야 합니다.

새길공동체가 존재하고 활동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선교 방향이 바로 하나님의 장벽 허물기 운동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한반도에도 비록 완벽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부활의 주님께서 당신의 숨을 저희들에게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한반도에서 갑질하는 사자들이 소의 여물을 먹으며, 새 존재로 거듭나서 만물이 새롭게 되는 하나님의 천지개벽의 한 단면이라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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