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 20:19-23)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먹여라."(요 21:17)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행 7:59-60)

고난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부활 신앙 없이 '예수 따르미'가 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진실을 저는 분단 70년을 맞는 올해 더욱 절박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며칠 전, 손양원 목사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의 삶 굽이굽이에서, 특히 그의 너무나 억울한 고난의 순간순간에 그는 놀라운 부활 신앙의 힘을 보여 주었으며, 그에 따른 평화의 힘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어려운 예수님의 가르침, 곧 원수 사랑을 통해 평화를 만들라는 그 힘든 당부를 솔선하여 실천하셨지요. 그는 그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 청년을 양자로 삼아 변화시키는 감동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양자의 자식이 목회자가 되어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풀어냈습니다.

이러한 원수 사랑 실천의 소식을 들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손양원 목사에게 서울에 있는 학교를 맡기고 싶어했는데,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그만둘 수 없어 백범의 요청을 감히 거절했습니다. 이때, 백범은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로 손양원 목사의 원수 사랑 실천으로 남북 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자고 호소하셨습니다. 이 호소는 오늘 2015년 더욱 더 절박하게 저의 가슴에 다가옵니다. 선제적 원수 사랑 실천으로 70년간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준 분단 체제를 극복해 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 선교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지 않는다면, 진정 우리들은 이 분단 상황에서 예수 따르미라고 자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부활절을 맞아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깊은 뜻을 새롭게 되새기면서, 그 고난 끝머리에서 활짝 핀 예수 부활 사건을 통해 놀라운 감동적 평화와 사랑의 동력을 저는 뜨겁게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분단 유지와 분단 강화에서 온갖 이득을 누리는 냉전 악의 세력을 복음의 선한 동력으로 이겨 내야 한다고 믿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고난, 그 처절한 십자가 아픔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감동적이며 공공적 변혁의 동력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래 인간에게 격심한 고통은 항상 현재의 아픔이요 바로 여기서의 아픔이기에, 그것은 너무 오래 지속되는 힘든 고통으로 체험됩니다. 오직 길고 긴 지금의 고통만 있지, 과거와 미래는 없습니다. 고통의 신음과 몸부림만이 지금 여기에 꽉 차 있을 뿐이며, 그 아픔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픔의 긴 순간순간에서 사랑, 평화, 감사와 같은 가치는 사치스럽게 여겨지지요. 이런 가치의 여유가 스며들 심리적 공간은 없습니다.

게다가 십자가 처형의 아픔은 인간이 고안해 낸 제도적 고통 중에 최악의 고통입니다. 인간 고통의 총체적 극대화가 이 처형 속에 녹아 있습니다. 깊고 긴 육체적 고통에 더하여 온갖 조롱과 비아냥거림이 주는 심리적 고통이 처형당하는 자를 괴롭힙니다. 게다가 인간 주검에 대한 존엄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받는 자는 장례라는 사회적 의식마저 누릴 수 없었습니다. 시체는 들개나 독수리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했지요. 십자가의 아픔은 인간 고통의 최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처형된 자의 가족과 친지, 동지들을 몸서리치게 만들고, 그 결과 로마(pax romana)의 권력에 감히 다시는 저항할 수 없도록 한 것이 바로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극악한 고통을 어떻게 맞았던가요? 저는 예수님의 그 비범한 고통 대응과 죽음 맞이에서 엄청난 감동의 충격을 받습니다. 몇 가지만을 지적하자면, 첫째로 그 쓰라린 고통의 한가운데서 예수님은 폭력적 가해자를 용서해 달라고 아바(abba)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사실에 저는 주목합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눅 23:34)

이런 절박한 순간에는 처형당하는 자의 입에서는 폭력적 저주가 저절로 터져 나오기 마련이지요.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져 저 폭력적 갑질하는 놈들을 몰살시켜 달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슴에서 터져 나온 기도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가해자들을 용서해 달라는 놀라운 간구였습니다. 주님은 칼 쓰는 자는 마침내 그 칼의 폭력으로 망한다는 진리를 너무나 잘 아셨기에 마르고의 귀를 칼로 잘랐던 베드로를 나무라셨지요. 폭력을 즐겨 행사하는 악을 이기는 힘은 절대로 가해자의 폭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폭력의 가해자는 당장은 승리하는 듯해도 마침내 그 폭력으로 자멸하게 된다는 진리를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지요. 그래서 그의 가르침을 그는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친히 실천하신 것입니다. 가해자들을 그들의 악행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는 일에 가장 먼저 나선 것이지요.

폭력과 악을 당장 정당화시켜 주는 용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악으로부터 가해자들을 해방시켜 주는 용서에 앞장서신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특히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며 곧 죽음을 맞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피해자가 그렇게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엄청난 고통을 겪는 그 시간에 용서 기도를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감동적인 스승인가를 새삼 깨우쳐 줍니다. 추상적 명상 기도를 통한 스승의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극심한 고통 한가운데서 그의 원수 사랑 가르침을 친히 실천해 보여 주셨습니다. 이 기도의 말씀을 그 후, 가장 절박하게 실천했던 제자는 바로 베드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 같습니다.

둘째로, 저는 예수님의 절규, 곧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원망의 절규에서 복음의 감동적 자원을 새삼 발견합니다. 원망처럼 들리는 이 절규에 몇 가지 깊은 뜻을 저는 찾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보복과 징벌에서 막강하다고 믿었던 전지전능한 심판의 신이 해체되는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아바 신의 무력함이 진솔하게 드러납니다. 아들의 그 억울한 고통 현장에서 계속 침묵하시는 아바 하나님의 무능과 무력을 저는 만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력한 아바 하나님의 모습에서 저는 스스로 비워 내시면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자들과 동고(同苦)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모습을 확인합니다. 바로 케노시스(kenosis)의 하나님 모습 말입니다. 자기 지움, 자기 비움, 자기 내려놓음을 아들의 억울한 고통 현장과 죽음의 순간에서 진솔하게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폭력적 보복 신의 자기 비움, 그것이 바로 사랑의 아바 신의 자기 세움으로 이어지는 감동이지요. 이와 같은 사랑 신의 실천적 감동은 결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진리(timeless truth)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이라는 악의 꽃이 만발하여 가해자들의 폭력적 갑질이 더욱 거칠게 터져 나오는 처절한 역사 현실 속에서 이러한 비움의 감동이 터져 나온다는 진실에 주목합니다.

예수의 '원망 절규'는 구체적인 역사 현실에서 폭력적 악으로 부당하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이른 바 '침묵하는 신'에 대해 일종의 배신감으로 원망하게 될 때 느끼는 그 아픔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이미, 그리고 항상 역지감지(易地感之)하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그 처절한 절규는 저 아우슈비츠 살육 현장에서나, 일제시대 일본 경찰에 의해 잔인한 고문을 당했던 취조실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이들의 외로운 괴로움에 십자가 예수는 이미 동참하시기에 이 같은 절규를 쏟아 낸 것이지요. 그러기에 저는 예수의 '원망 절규'에서 그의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의 따스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느끼게 되면서, 저는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영지주의(gnosticism)와 가현설(docetism)의 허상적 모습을 확인하는 듯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를 신으로만, 초월적 영으로만 보았던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가현설에 따르면, 겉으로는 예수께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는 신이기에 고통과 고난을 전혀 느끼지 않은 초월적 존재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신자들은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 관심을 보일 턱이 없지요. 오로지 차원 높은 지식적 깨달음만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도마복음에는 처절한 골고다의 고난, 십자가의 아픔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관심의 신이 아닙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초월적 이데아도 아닙니다. 우리 약한 인간들처럼, 아픔을 함께 느끼며, 더욱이 억울한 아픔에는 동고(同苦)하시는 따뜻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에서부터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예수의 인간적 모습을 뚜렷하게 보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부터 예수는 폭력(칼)을 철저하게 배제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복과 저주의 대응을 원천적으로 거부하셨습니다. 대신에, 철저한 원수 사랑의 동력, 너무 인간적이기에 너무나 자상한 자기 비움의 감동적 힘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서 놀라운 감동을 받는 장면은 막강한 로마군 장교의 고백적 선언입니다. 그는 예수의 고난 과정을 집적 목도했지요. 그것도 사형 집행관으로서 남다른 관심을 갖고 예수님의 괴로움 하나하나를 예의 주시했던 전도유망한 로마 중대장이었습니다. 그의 뜻밖의 폭탄 같은 고백을 역사신학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보고 싶습니다. 그 날, 그가 받았던 충격을 이렇게 자기 일기에 적었다고 상상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저는 오늘 오후 어릴 때부터 이 시간까지 철석같이 지켜왔던 저의 확신이 와르르 무너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 처형의 전 과정을 면밀하게 지켜보다가 그의 고통 대응의 모습을 보면서 일찍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자란 후에 군대에서 배우고 다져왔던 로마 황제의 신적 절대 권위에 대한 신념이 심각하게 흔들렸습니다. 처음 그의 사형집행관으로 임명되었을 때는 영광스러운 황제의 권위를 보위한다는 보람으로 가슴 뿌듯했습니다. 특히 로마 식민지 중에서 가장 끈질긴 종교적 열정으로 로마 체제에 저항해 온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반(反)로마 체제 인물의 사형집행관 역을 맡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저의 앞날도 훤히 더 밝아질 것으로 여겼지요.

그런데 현장에 와서 빌라도 총독 법정에서 피고인 갈릴리 청년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기이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절대 권력에 감히 무모한 도전을 할 인물 같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이 선고되었을 때, 그의 표정은 참으로 큰 바위의 침착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내 군인 부하들이 상부 명령에 따라 온갖 폭력과 조롱으로 짐짓 그를 괴롭혔으나, 그의 눈빛은 증오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연민의 눈빛이었습니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조차 갖은 험악한 조롱으로 그를 괴롭혔으나, 그는 여전히 침착했고, 놀라운 인내심을 보여 주었지요.

그런데 정말 저를 깜짝 놀라게 하는 소리가 십자가 위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절정에서는 흔히 저주와 악담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기 마련인데, 예수는 그토록 그를 괴롭히는 가해자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그의 신에게 간절히 외쳤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가해자들의 폭력적 행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저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정말 혼란스러웠지요. 저의 뼛속 깊이까지 스며 있는 로마인의 자존심, 로마 군대에 대한 자긍심, 황제의 신적 권위에 대한 충성심이 모두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괴롭힘을 견뎌 내면서 갈릴리 청년은 '다 이루었다'고 조용히 말한 뒤, 마침내 운명했습니다. 바로 이때, 땅이 잠시 흔들리는 듯했고,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엎으면서 햇빛이 잠시 사라진 듯했습니다. 그런데 땅이 흔들렸다기보다는 제 속에 깊숙하게 내면화되어 있던 승리주의 가치관과 황제의 절대 권위에 대한 충성심이 지진보다 더 격심하게 흔들리면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가치관이나 확신은, 피 튀기는 전쟁터에서 굳게 다져진 승리주의 확신이었는데, 그것이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청년의 고통 대응의 모습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저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고 말았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진정 신의 아들이다. 그리고 의로운 분이기에 무죄다!'

저는 저의 이와 같은 소리를 듣고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그 순간,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을 직감했습니다. 혹시 주변의 내 부하가 이 소리를 듣고, 상부에 보고라도 한다면, 내 앞날은 오늘로 끝장날 뿐 아니라, 로마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중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순간, 참으로 희한하게도 저는 그 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평온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격전지에서 수많은 적군을 살육한 후, 그 시체 무덤 위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평화의 마음을 느꼈지요. 전투장에서 자랑스럽게 느꼈던 승리감, 우월감에서 피어오르는 오만한 승리의 미소가 아니라, 예수의 우아한 패배의 모습, 그 여유 있는 사랑의 모습에서 흘러나온 조용한 평화의 미소가 제 얼굴에 꽃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이 평온과 평안은 결코 로마 권력이 준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로마 권력에 의해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처형되면서 갈릴리 청년 예수가 보여 준 참평화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두려워지지 않았습니다. 정녕 내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결국 로마 장교는 갈릴리 예수의 우아한 패배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지요. 그 막강한 로마 권력이 진정한 사랑 신의 아들 앞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후일 사도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사형이 집행될 날을 기다리면서 예수의 이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이것은 바로 케노시스 하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5-11)

바로 예수의 사랑 비움의 그 감동적 모습을 사도바울보다 훨씬 전에 이방인 로마 장교가 웅변적으로 증언한 셈이지요. 십자가 처형이라는 수치스러운 낮고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은 부활로 높이 올림을 받게 되었고, 마치 로마 중대장이 로마 권력을 대신하여 갈릴리 예수 앞에 무릎 꿇었듯이, 모든 이들이 부활의 그리스도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의 낮음과 부활의 높음이 하나님의 자기 비움 사랑에서 뚜렷하게 함께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동적이고 변혁적인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것이 또한, 공공적 복음의 본질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이 던져 주는 감동적 효력에 주목해 봅시다. 그 효력은, 바로 사랑과 평화의 동력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주는 감동은 결코 추상적, 초월적, 관념적, 명상적 개인의 평화나, 사사로운 평화가 아닙니다. 또, 그런 사랑도 아닙니다. 그 효험은, 예수 처형 후, 당국에 의해 체포될까 두려움에 떨며 은밀한 곳에 함께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예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주신 실체적 동력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공포와 절망 가운데서 떨고 있을 때, 죽었다고 생각한 예수께서 부활의 몸(physicality)으로 그들 앞에 찾아오셨지요. 이 부활의 몸은 갈릴리 예수의 육체의 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으스스한 공포의 유령도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의 새로운 몸, 곧 부활의 몸은 평화와 사랑의 효력으로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실체였습니다. 그 신비한 몸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 움직이되 그 시공의 장벽을 초월하는 자유로운 힘이었습니다.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의 부활의 새로운 몸이었습니다. 이 몸이 불안과 공포, 절망과 좌절에 떨며 밀실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 오셔서 이렇게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평화가 있기를."(요 20:19, 21, 26)

그리고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숨(氣)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마치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듯이 제자들에게도 새로운 성령의 활기를 불어넣어 주시면서 갈릴리에서 그랬듯, 용서와 사랑의 실천을 또 다시 당부하셨습니다(요 20:23). 특히, 부활의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세 번씩이나 뿌리 뽑힌 것 같은 외롭고 괴로운 양떼를 돌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세상 갑들의 못된 갑질로 고통당하는 을과 병, 정(丁)들을 사랑으로 돌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로마의 갑들, 예루살렘 성전의 갑들, 헤롯당의 갑들로부터 삼중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을과 병, 그리고 정들의 아픔에 동고(同苦)하면서 그들을 보살피고 보듬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갑들의 악은 사랑으로 사라지게 하고, 을과 병, 그리고 정들의 아픔도 그 사랑으로 사라지게 하라는 따뜻한 당부를 부활의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니,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의 사랑 지배 운동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더욱 뜨겁게 지속되고 강화되었던 것입니다. 성령 운동이 이러한 역사적 조건에서 뜨겁게 작동하게 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까!

이렇게 초대교회에서 사랑 운동, 평화 운동은 지속 강화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젊은 집사 스데반은 부활하신 예수의 명령에 따라, 산헤드린 세력의 회개를 날카롭게 촉구하다가 그들에 의해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돌로 맞아 죽으면서도, 벌떡 일어나 자기를 옹호해 주시는 부활의 예수를 보고 이렇게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이 외침은, 바로 십자가 위의 예수 자신께서 외쳤던 기도와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온갖 고통을 당하시면서 폭력적 가해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바 하나님께 간구했던 바로 그 기도의 외침 말입니다. 스데반 청년은 그러기에 철저한 예수 따르미였고, 그리스도 따르미였으며, 진정한 '평화 만드미'(peace maker)였습니다.

이제 올해로 우리 민족은 그 지긋지긋했던 일제 식민지 지배의 아픔에서 진정한 해방과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더 괴롭고 아픈 분단 70년을 맞고 있습니다. 이 참혹한 분단 고통의 땅에 하나님 평화를 우람하게 우뚝 세우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따르미들은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서 감동적으로 드러난 주님의 선제적 원수 사랑을 몸소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따르미는 이 분단과 전쟁의 땅에서 평화 만드미로 날로 힘차게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 부활의 능력으로 원수 사랑을 선제적으로 실천하여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하고, 또한 그 부활의 동력으로 이 땅(남북 모두)의 을들, 병들, 그리고 정들의 아픔을 뜨겁게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억울한 아픔이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해방 직후, 순천에서 손양원 목사의 원수 사랑 실천 이야기와 '천벌'받아 고통받고 있던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던 그의 돌봄 실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백범 김구 선생께서는 바로 그 선제적 원수 사랑 실천과 밑바닥 인생의 돌봄 실천으로 남북 간의 평화와 조국 통일을 이룩하자고 호소하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따르미로서, 또 민족의 지도자로서 백범은 그렇게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교회는 그의 호소를 절박한 민족적 소명과 선교적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분단이 70년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이제, 2015년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 따르미들은 이 호소를 바로 예수님의 호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한낱 사치한 선택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소명이기에, 결코 시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엄정한 필수적 '요청'입니다. 분단 민족 구성원으로서, 한국의 예수 그리스도 따르미들은 예수의 고난과 부활이 주는 사랑과 평화의 동력을 성령으로 받아, 분단되어 있는 한반도를 평화와 공의의 한반도로 변화시키는 일에 선제적으로 앞장서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 바로 이러한 실천에서 감동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비로소 세상을 밝히는 공공적 복음의 빛이 되고,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감동적이고 변혁적인 복음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 만드미가 되어 평화 통일을 마침내 우리 역사 속에서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때, 저희 평화 만드미에게 부활의 주님은 뜨거운 박수로 격려해 주실 것이요, 저희들을 친히 이끄시며, 만물을 평화와 공의로 새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한완상 / 새길교회 신학위원, 전 통일부총리·교육부총리

이 글은 2015년 4월 5일 새길교회의 부활주일 예배 설교문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또 '예수 따르미'와 '평화 만드미'는, 필자 한완상 박사가 문법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쉽게 부르고자 만든 용어입니다. - 편집자 주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