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길교회 신학위원인 한완상 박사가 1월 4일 신년 주일 예배에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 2015년, 우리의 선제적 원수 사랑 실천'이란 주제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허락을 받아 설교 전문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 누가복음 10:28-29 -

지난해 갑오년은 유난히 '갑'들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국가, 시장 그리고 사회 각 분야에서 갑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 강화하기 위해 '을'들의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올해 을미(乙未)년에는 '을'들의 소망이 구조적으로 실현되고, 미생(未生)들의 기쁨이 또한 제도적으로 확대, 심화되기를 갈망하며 기도합니다.

▲ 한완상 박사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현재 한국 사회를 돌아보며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예수 당시에도 갑들의 독선과 탐욕은 극성을 떨었지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도 따지고 보면, 당시 을들과 미생들에게 참 평화와 공의를 함께 누리게 하려는 운동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어느 율법교사가 찾아와 음흉하고 사특한 동기를 숨기고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도전적으로 질문했습니다. 이 도전에 예수님은 정중하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대응했습니다.

도전자는 예수의 평소 행적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 운동이 당시 신성시된 율법과 규범을 위험스럽게 훼손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듣고 보자니, 예수는 안식일에도 중병환자를 고쳤는데, 이와 같은 율법 파괴 행동을 서슴지 않으면서 기가 막히게도 병자에게 죄사함 선포까지 서슴없이 했다는 소식을 듣고 속으로 분노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신학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는 예수의 불온하고 불경하며, 신성모독적인 행태를 만인 앞에 은근히 드러내 보이고자 했습니다. 특히, 밥상 공동체 운동에서는 온갖 불경스럽고 불결한 인간들을 초청하여 포도주를 폭음하고 음식도 게걸스럽게 폭식한다는 소문을 듣고 경멸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예수의 상것다움의 실상을 폭로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의 저의를 훤히 꿰뚫어 보면서도, 그 율법교사의 전문 지식과 해석 능력을 존중해 주었지요. 그리고 그가 정답에 이르도록 인도했습니다. 그의 대답을 칭찬까지 해 주셨습니다. 나아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실천'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신학과 철학이 지금까지는 세상 규범과 현상을 해석하는 일을 중요 임무로 여겼으나, 이제부터는 그런 해석보다 규범과 진리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깨우쳐 주셨지요. 그런데 자존심이 상한 율법교사는 다시 예수에게 도전했습니다. 그 도전이 바로 오늘 말씀 증거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실천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면, 도대체 유대인인 내가 사랑할 이웃은 누구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 그는 다시 한 번,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어떻게 이 질문으로 그는 예수를 덫에 걸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런데 신학적 질문으로는 예수를 시험에 빠뜨리지 못하게 된 이 율법교사는, 이제는 사회학적 질문, 보다 세속적 질문으로 예수를 함정으로 유인하려 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도전에 예수가 어떻게 대응하셨는지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응답과 대응이 오늘 2015년 우리의 역사 현실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고 싶습니다. 특히, 분단 70년을 맞고 있는 우리의 슬픈 민족의 현실에 던져 주는 복음적 의미가 무엇인지 뜨겁게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내 이웃이 누구냐라는 질문 뒤에 숨어 있는 음흉하고 사특한 동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질문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웃의 경계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게 심각했음을 간파한다면, 이 질문이 결코 그저 그러한 질문이 아님을 곧 알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외부 불순세력의 위협이 심각하다고 여기게 되면, 지배세력은 내부 단합을 배타적으로 강화하려 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고향에 돌아왔으나, 독립국가 민족으로 살아갈 수 없었지요.

강대국들에게 시달렸는데, 특히 희랍제국의 억압은 극심했습니다. 이에 대한 마카비 형제의 저항 또한 아주 치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토라를 더욱 소중히 여기면서, 그것을 준수함에서 선민의식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통해 유대민족의 정체성과 선민적인 자긍심을 키워 갔습니다. 율법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이기에, 그것은 거룩하고 순수한 절대 규범이었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이 규범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해석했지요. 이 사랑 실천에서 영생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지요. 그렇다면, 그 이웃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그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그 경계를 어떻게 그을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외세의 강점과 강압 속에서 유대인의 이웃 범위를 느슨하게 잡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자들을 유대인의 이웃으로 존중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 중 토라를 존중하고 지키려는 사람들을 과연 유대인의 이웃으로 대접해야 하느냐라는 문제가 심각한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도대체 이방인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문제가 올바른 것인지를 두고도 논의가 분분했습니다. 개종한 이방인이 진정 유대인의 이웃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럴 수 없다는 의견이 거칠게 충돌했습니다.

예수 당시에도, 이 문제를 놓고 힐렐(Hillel)파와 샴마이(Schammai)파 간에는 다툼이 있었습니다. 힐렐파는 자유로운 율법 해석을 존중했습니다. 평화와 공의를 소중히 여기고, 인간(인류)을 사랑하는 이방인들을 토라로 끌어와야 한다고 힐렐파는 주장했습니다. 다른 한편, 보수적인 샴마이파는 이방인들은 유대 선민들의 이웃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들은 배타적 선민의식에 불탔기에,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결코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와 그 무리를 '포도주를 탐하고', '게걸스럽게 폭식하는' 불순하고 잡스러운 것들, 천한 것들로 경멸했습니다.

예수를 시험하려 했던 이 율법교사도 샴마이파 사람 같습니다. 다시 말해, 근본주의적 바리새인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예수께서 그의 질문을 받고 힐렐파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급진적인 처방을 거칠게 내놓았다면, 도전자가 쳐 놓은 그물에 쉽게 예수가 걸려들었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이 교묘하고도 사특한 도전에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응답에서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인 통찰력과 상상력, 말하자면 그의 인문학적 창발력을 만나게 됩니다.

자, 이제 예수님의 인문학적 통찰력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주목해 봅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도전적 질문을 받으시고, 짐작컨대 5-6초의 그 짧은 순간에 예수님은 놀라운 극작가적 상상력으로 3막의 드라마를 엮어 내셨습니다. 다 아시는 대로, 1막에서는 강도떼들의 눈독에 걸려들어 죽도록 얻어맞고 옷을 빼앗긴 한 부유한(혹은 옷을 잘 차려입은) 유대인이 등장합니다. 당시 불안했던 사회상을 드러냅니다. 강도와 절도라는 범죄행위가 만연한 사회상을 반영합니다. 곧 이어 2막에서는 경건하게 행세하는 종교지도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들의 삶과는 정반대임을 폭로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은 3막에서 등장합니다. 정말 율법교사와 그 주변의 청중들에게는 깜짝 놀랄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킵니다. 그들이 평소 혐오해 왔던 이방인 중에서도 가장 저열한 잡종 불순분자인 사마리아 상인을 주인공으로 당당히 등장시킵니다. 그는 마땅히 악역으로 등장해야 할 인물인데, 극작가 예수는 그를 선한 주역으로, 영웅으로 등장시킵니다. 요즘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종교적으로는 '이단'이요, 사회정치적으로는 '종북 좌파'로 낙인 찍힐 불온분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조역들의 행동과 주인공 사마리아인의 행동 간의 '다름'입니다. 한마디로, 사마리아인의 행동 실천을 극작가 예수는 매우 자상하게 묘사하고, 그의 동고(同苦)적 실천을 자세히 부각시킵니다. 사마리아인은 피해자를 보고 그 아픔에 동고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그에게 접근했습니다. 상처에 올리브와 포도주를 부었지요. 상처를 싸맸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웠지요. 그리고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를 온종일 돌보았습니다. 다음 날, 두 데나리온을 주인에게 치료비내놓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약속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온 후 다 갚겠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이 같은 철저한 돌봄과 총체적 치유가 바로 구원이요, 이것이 바로 샬롬이며, 이것이 바로 사랑의 효험이라고 극작가는 외친 것이지요. 그의 주인공 묘사에는 '동사'들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결코 명사가 아닙니다. 사랑은 레토릭이 아닙니다. 그것은 뜨거운 결단이요, 신실한 실천입니다. 사랑은 결코 명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비움의 몸부림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착한 이유는 이와 같은 자기 비움 실천 때문이지요. 사실 그는 원래 일정을 모두 비웠습니다. 그는 그가 가진 것을 총체적 돌봄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사랑은 그러한 나눔과 비움의 실천 때문에 감동의 파장을 불러일으키지요. 바로 그 파장으로 사람과 구조를 아름답게 '변화'시킵니다.

이제, 이 드라마의 감동을 소리 없는 피해자의 독백을 상상해 봄으로써 함께 느껴 봅시다.
이것은 청중이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이 준 충격을 상상해 보며 느끼게 되는 감동이기도 합니다. 청중인 우리가 피해자와 역지감지(易地感知)해 보는 일입니다. 이것은 극작가의 의도를 보다 뚜렷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피해자의 소리 없는 독백의 소리에 귀 기울여 봅시다.

"저는 오늘 이렇게 무참하게 '여리고 언덕에서 죽는구나' 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저기 사람 하나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지요. 희망으로 제 가슴은 뛰기 시작했지요. 이분이 바로 제가 존경하는 우리 교단 지도자 목사님이어서 너무 기뻤지요. 그런데 그 목사님은 다 죽어 가는 저를 멀찍하게 훔쳐보시다가 놀라면서 재빨리 도망가듯 스쳐 지나가셨지요. 저를 죽은 시체 보듯 했습니다. 저는 너무 서러웠지요. 평소 이웃 사랑을 그토록 역설하셨던 분이시기에 더욱 서러웠지요. 다시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나를 살려 주시겠지' 하며 기대했어요. 마침 그분은 우리 교단의 부목사님이었습니다. 그분도, 저를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시더니, 재빨리 피해 달아났습니다. 이때, 저는 유대교인임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위선에 치를 떨게 되었습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탄식하고 있는데, 나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쌍놈이요 잡놈인 사마리아 장사꾼이 나타났습니다. 내 가슴은 공포로 쿵쾅 뛰기 시작했지요. 틀림없이 저를 확인사살할 놈으로 여겼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 놈은 성직자들과 달리 제 곁으로 바짝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다 죽어 가는 내 목을 조르겠구나'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의 표정을 보니, 놀랍게도 따뜻했고, 특히 그의 눈빛은 선했습니다.

그는 그의 짐에서 몽둥이나 칼이 아니라, 포도주와 올리브를 꺼냈습니다. 그것을 내 상처에 조용히 발라 주었습니다. 또한 붕대도 감아 주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그에 대한 나의 편견은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저를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하루종일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는 내 친구도, 내 친척도 아닙니다. 오히려 원수 같은 존재였지요. 그런데 다음 날, 그가 주인에게 모든 비용을 지불하면서 저를 돌보아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꼭 갚겠다고 했지요. 그 때, 저는 그 사람이 잡놈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라고 생각했지요. 아니, 그가 진정한 성직자로 여겨졌습니다. 아니, 그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 제가 놀랍게 깨달았던 것은, 우리 유대인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우리보다 먼저 그의 원수를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회당과 성전에서 그간 배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거꾸로 뒤집어지는 듯했습니다. 아, 이럴 수가…"

여러분, 피해자의 이 같은 독백에서 그의 놀라운 메타노이아(metanoia)의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피해자가 원수의 선제적 원수 사랑으로 감동받아 새로운 존재로 일어서게 되었음을 이 드라마를 보고 깨달았습니까? 이 같은 전복적 가르침이 바로 예수의 인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이 드라마를 들려주신 후, 율법교사에게 던진 예수의 질문과 권면에서 그의 독특한 교육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질문은 질문자의 질문과 사뭇 달랐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은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되물으셨지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율법교사의 질문의 중심에는 사사로운 자기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를 도와줄 나의 이웃이 누구냐를 물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억울한 고통을 겪는 이에게 동고(同苦)자가 되어 그를 돌보아 주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공공적, 이타적 실천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복음의 공공성과 감동성, 그리고 변혁성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 복음은 악이 극성부리는 상황에서 내 이웃을 찾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제적 원수 사랑을 통해 악을 근원적으로 극복해 내는 데서 나온다는 진리를 우리는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원수 사랑으로 평화를 만들어 내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딸과 아들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소식이 바로 진정한 '복음' 아니겠습니까!

예수로부터 이 같은 질문을 받은 율법교사는 꼼짝없이 정답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의 드라마 메시지에 화가 나서 짐짓 제사장이라고 대답했다면, 그 많은 주위 청중들은 비웃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그는 정답을 스스로 자기 입으로 토해 낼 수밖에 없었지요. 여기에 위대한 스승의 탁월한 페다고지(pedagogy)가 빛이 납니다. 이렇게 깨닫게 하신 뒤, 극작가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가서 그렇게 실천하시오"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진리는 추상적 명상에서 나오지 않고, 실천에서 육화된다는 것을 다시 깨우쳐 주셨습니다. 신학과 철학은 지금까지는 세계를 해석하는 일에 정신을 쏟았으나, 이제부터는 사랑 실천으로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페다고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비유가 2015년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 세계 도처에서 못된 갑질로 인해 세계 평화는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 중동 지역과 한반도 지역이 더욱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먼저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의 갑들이 최근 배타적 갑질에 더욱 볼썽사납게 나서고 있습니다. 불과 두 달 전에는 강경 보수자인 네탄야후 총리가 말썽 많은 국민 법안을 각의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유대 인종만이 이스라엘 국가의 국민의 자격을 인정하는 배타적 비민주적 법안입니다. 샴마이(Schammai) 근본주의 세력의 부활을 보는 듯합니다. 예수님에게 내 이웃이 누구냐고 도전적으로 물었던 자들, 곧 비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국민이 될 수 없고, 이스라엘의 이웃이 될 수 없음을 제도적으로 못 박고 싶은 율법교사들이 지금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이것은 분명 이스라엘 민주화의 후퇴이며, 그 지역 평화를 위태롭게 합니다. 1948년 유엔(UN)의 축복하에 이스라엘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그 독립선언에서 신생국 이스라엘은 인종과 계급과 성의 차별이 없는 다원적 민주국가임을 세계 만방에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네오콘 갑들의 지원을 받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평화를 훼손하는 못된 갑질을 내지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곳의 사마리아인들, 곧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2007년 5월 23일, 그 청명했던 아침을 잊을 수 없습니다. 대한적십자 대표로 팔레스타인 제2도시인 나블루스(옛날 세켐) 적십자사를 방문했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인도주의 협정이 2005년 서울 총회에서 체결되었는데, 과연 그 협정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를 팔레스타인 적십자 총재와 함께 모니터하러 그 곳에 갔습니다. 바로 그날, 새벽에 팔레스타인 교육부 장관과 나블루스 시장이 이스라엘 군에 의해 강제 체포 연행되었습니다. 저희들을 맞는 그곳 적십자가 간부들은 침통해 하면서도, 저희들을 따뜻하게 영접해 주었습니다. 오전 회의를 마치자, 저는 바로 수가성 우물가로 달려갔습니다.

이천 년 전, 금기의 땅에 과감하게 들어오셔서 바로 이 우물가에서 사회적으로 온갖 낙인이 찍혀 시달렸던 사마리아 여인과 깊은 소통의 대화를 파격적으로 나누었던 예수님의 흔적과 그의 영적 현존을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아주 깊은 우물에서 찬물을 직접 퍼 마시면서, 저는 온 몸으로 전율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곳, 팔레스타인에 오신다면, 유대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체포 구금될 것이며, 또 다시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상념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율했습니다. 지금 2015년은 8년 전보다 더 후퇴하고 있기에, 평화는 더욱 멀어지고 있어 억울한 고통과 눈물은 더욱 아프고 슬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한반도 상황에서 예수의 이 비유가 던져 주는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70년 전, 우리가 어둡고 괴로웠던 36년의 일제 지배에서 벗어난 그 순간, 그것은 우리에게 민족 해방과 광복의 순간이 결단코 아니었습니다. 식민지 시대보다 더 괴로운 분단시대로 빠져 들어간 비극과 고통의 순간이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70년 전, 제국주의 강대국의 갑질로 너무나 억울하고 허무하게 두 동강 난 뒤, 70년간 열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부당하게 겪었습니다. 가슴 치며 안타까워해야 할 비극의 분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가 막히게도 우리들은 이 분단 현실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이것을 정상적인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특히, 분단이 고착되고, 남북 관계가 악화될수록 온갖 이득을 누리는 세력이 우리 사회와 국가와 시장에서 갑질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분노케 합니다. 이것이 가장 가슴 아픈 '비정상의 정상'이라는 오늘 우리의 현 주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냉전 근본주의 세력은 한국교회 안과 밖에서 더욱 그들의 갑질을 난폭하게 행사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19일 헌법재판소 판결로 고무된 이들은 기고만장해져서 매카시 광풍을 휘몰아칠 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해방 직후의 백색 테러세력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광풍 속에서 스스로 '대한민국 애국세력'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천 년 전 율법교사의 그 음흉하고 사특한 질문을 거칠게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그들의 대한민국'의 이웃인가? 누가 이웃이 될 수 없는 불온한 국외자인가를 끈질기게 묻고 있습니다. 그들의 배타적 냉전 근본주의에 맞지 않는 시민들을 '종북 좌파'로 낙인찍으며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가장 슬픈 것은, 이런 공세가 기독교 복음의 이름 아래, 버젓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따르미들은 예수의 극작가적 통찰력에서 복음의 공공성과 감동성, 그리고 변혁성을 새롭게 확인해야 합니다.

원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나눠 주는 복음 실천이 한국 기독교 안에서조차 '일탈'로 낙인찍히는 2015년 우리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하기야 이천 년 전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도 당시 실증법에 의해 범죄행위로 낙인 찍혔고,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 극형에 처형당했습니다. 바울도 복음 선포와 복음 실천으로 당시 실증법에 따라 참수형을 당했지요. 그러기에 우리 현실에서 복음 실천으로 부당한 처분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함께 겪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영광이 된다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의 우아한 패배, 바울의 여유 있는 죽음 맞이에 동참하는 기쁨과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선제적 원수 사랑 실천이 국가 폭력으로 희생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 고난에 참여하는 특권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빌립보서 1:29). 왜냐하면, 부활의 영광이 확실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선정(善丁), 곧 착한 꼴찌가 먼저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갑들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찍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가 아름답게 세워지는 날의 모습을 이렇게 시로 읊었습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이사야 65:25)

이사야의 시적 비전에서 우리가 오늘 뜨겁게, 그리고 확실하게 확인하는 진실은, 정글에서의 슈퍼 갑인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을 때, 그리고 두 번째 갑인 이리가 어린 양처럼 풀을 먹게 될 때, 바로 그때 참평화와 공의가 비로소 물이 바다를 채우듯, 우리 땅에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약한 동물을 물어뜯어 피 흘리며 잡아먹는 사자와 이리가 자기를 비워 내고, 지워서 을과 정(丁) 같은 동물의 풀을 먹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나라의 새 질서가 우람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갑이 못된 갑질을 그만둘 뿐만 아니라, 을과 정의 풀을 먹으면서 갑의 체질을 완전히 바꿀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대단히 좋다고 감탄하셨던 평화로운 창조의 원질서가 비로소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갑과 을, 그리고 정은 모두 부활의 영광과 새 창조 질서의 기쁨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분단 70년을 맞는 새해 첫 주일에 자매 형제 여러분과 이 꿈을 함께 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 비극의 땅, 한반도에서 살리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올해는 원수를 선제적으로 사랑하여 한국의 사마리아인이 되는 기쁨을 서로 나누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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