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평신도 교회인 새길교회에서 신학위원으로 있는 한완상 박사가 2016년 3월 6일 '새길교회 창립 29주년 기념 주일예배' 때 나눈 설교문(설교 제목: '해방자 예수, 바보 그리스도', 설교 본문: 마태복음 6장 9-13절, 요한복음 21장 15-18절)입니다. 새길교회의 허락을 받아 <뉴스앤조이>에 싣습니다. 설교자 메시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문단을 나누거나, 띄어쓰기와 오자를 바로잡는 것 외에 수정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 편집자 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 6장 9-13절)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예수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쳐라.'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먹여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요한복음 21장 15-18절)

1.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저는 그것이 바로 <예수 없는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기에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크리스천들이 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안 계신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이런 슬픈 현실은 한국 기독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최고의 성서신학자 톰 라이트(N.T. Wright)는 복음서에서 잊혀진 얘기라는 부제를 달고 매우 날카로운 신학적 성찰을 해낸 문제작 <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2012)를 최근에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네 복음서 모두가 감동적으로 증언한 갈릴리 예수가 실종되어 버린 사도신경의 문제를 새삼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로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지도자들이나 신학자들 중에 이 같은 예수 실종을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거의 없는 듯하여 저는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2008년 <예수 없는 예수 교회>라는 책을 부끄럽고 답답한 심경으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오늘 저는 한국교회에서 역사적 예수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예수, 곧 그리스도도 안 계신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세상으로부터 온갖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를 흔들어 깨우고 싶습니다. 역사의 예수도, 부활의 그리스도도 부재(不在)하신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운동, 하나님나라 선교, 그리고 하나님나라 복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 한완상 박사. ⓒ목회멘토링사역원 엄태현

기독교가 이른바 개독교로 변질된 것도 참으로 걱정스럽지만, 보다 저를 슬프게 하는 것은 예수도, 그리스도도 교회 안에 계시지 않고 하나님나라 복음도 한국 기독교와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운동 실천에서 새길 신앙고백이 나왔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새 사람으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질서, 새 구조를 만들어 가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새길 신학의 핵심인데, 이 복음의 핵심과 본질을 다시 새롭게 깨닫기 위해 먼저 우리들은 한국교회에서 왜 예수와 그리스도가 안 계신지, 그리고 왜 하나님나라 운동이 실종되어 버렸는지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2.

먼저 예수와 그리스도 간의 단절이 가져온 신학적, 신앙적 문제점부터 간단히 살펴봐야 합니다. 하기야 이 단절은 예수와 바울 간의 단절과도 연관되고, 하늘과 땅 간의 분리와도 연관되며, 하나님나라와 죽어서야 간다고 믿는 천당 간의 괴리와도 연관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수가 그리스도에서 분리되고, 그리스도가 예수로부터 단절된 것이 오늘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먼저 한국교회의 역사와 현실에서 이 단절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세기 말 주로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전승된 기독교 복음에는 예수와 그리스도 간의 단절이라는 문제보다는 일종의 '몽매한 일치'가 두드러졌습니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성으로 인식한 듯합니다. 이런 소박하고 몽매한 동일성은 초기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신학과 신앙에서 비롯된 듯합니다.

그들은 대체로 19세기에 풍미했던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했습니다. 하기야 19세기 서구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과 반발에는 근본주의 신학 이외에도 성서비평(고등비평)에 의한 고차원의 진보적 비판도 있었습니다. 특히 20세기 초 실존주의적 성서 해석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역사 탐구를 단절시켰습니다. 진보적인 성서비평도 희한하게 근본주의 신학과 함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게 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불트만(Bultmann)은 실물 예수의 말씀과 삶, 그의 성품과 의식 등을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재구성해 낼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네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위기에 봉착했던 초대교회가 삶의 자리에서 조명해 본 부활 예수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체험했던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복음서를 해석한 것이지요.

이런 신앙고백(케리그마)을 객관적 역사 사실로 환치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 결과 반세기 동안 서구 성서신학의 역사적 예수 탐구는 중단된 셈입니다. 이런 역사 예수 탐구의 중단이 가져온 심각한 역사적 후유증으로 우리는 히틀러와 같은 구조적 악 앞에서 교회가 무력했다는 사실에 새삼 주목해야 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초대 한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성서비평은 위험한 반신앙적 접근으로 보아 배격했습니다.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의 관점에서 복음서는 일점일획도 틀릴 수 없는 객관적 역사적 진실로 확신했습니다. 곧 예수와 그리스도가 동일하다고 문자주의 신앙으로 수용했지요. 역사와 신앙고백을 몽매하게 혼돈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이해는 하나님나라 운동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역사적 변혁성을 부적절한 것으로 무시했습니다. 예수와 그리스도 모두가 탈역사화되고, 사사화(私事化)되고 말았습니다. 이 같은 몽매한 미분화 인식에서는 감동적인 역사 변혁 실천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몽매함과 연관해서 우리는 한국교회 분열사(分裂史)에서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음을 눈여겨보고 반성해야 합니다.

갈릴리 예수의 역사 실천 동력과 그리스도의 차원 높은 실천적 역동성을 모른 채, 교단 분열과정에서 예수와 그리스도는 분열되고, 가슴 아프게도 예수와 그리스도 간에 반(反)복음적 증오와 투쟁이 펼쳐졌지요. 분열 과정에서 예수 이름을 먼저 차지한 교단에 대항하여 분열된 다른 반쪽은 그리스도 이름을 독점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지요.

1953년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 가슴 아프게도 예수교 장로교와 기독교 장로교는 분열될 수 없고 되어서는 안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반씩 잘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성결교단도 장로교 분열의 그 위선적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더 보수적 장로교단이 역사적 예수를 가져가고, 상대적으로 더욱 진보적인 교단이 부활의 그리스도를 가져갔습니다.

하기야 저는 예수와 그리스도 간에는 그 역사적 진보성과 실천적 변혁성에 있어 본질적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많은 분들이 갈릴리 예수는 진보적 실천에 앞섰다고 보고, 부활의 그리스도는 보다 신비하고 영적인 존재로 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총체적으로 하나님나라 운동의 실천적 관점에서 보면 부활의 그리스도가 갈릴리 예수 못지않게, 아니 더욱 더 감동적 실천의 동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보다 더 따뜻하고, 보다 더 품어 인도해 주시고, 보다 더 인간적인 점이 넘치는 사랑의 메시아이심을 복음서는 증언해 줍니다. 부활 예수의 영성이 얼마나 더 공공적이고, 더 감동적이고, 더 변혁적인가를 증언하고 싶습니다. 오늘 저는 이 점을 좀 더 부각시켜 보고 싶습니다.

▲ 노엘 쿠아펠(Noël Coypel)의 '예수의 부활'(La Résurrection, 1700년 作.)

3.

예수 복음이 본질적으로 갖는 공공성과 감동성 그리고 변혁성에 주목하면서 복음서를 읽어 보면, 갈릴리 예수의 메시지와 그의 실천이 십자가 고난과 처형을 거치면서 더 강열하게 그 공공성과 변혁성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처형 후 사흘 만에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현에서는 놀랍게도 이 같은 공공적 변혁의 동력이 더욱 감동적으로 나타남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감동적 동력이 실체로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를 예수에서 추상적으로, 신학적으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을 확인해 보기 위해 갈릴리 예수의 대표적인 하나님나라 비전(또는 메시지) 하나와 부활의 그리스도 메시지를 하나를 특별히 부각시켜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의 기도, 즉 주기도문은 그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핵심을 짧게 그러나 강열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예수 메시지가 갖는 전복적인 진보성(또는 급진성)이 이 기도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예수의 이 전복적 비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나님과 인간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먼저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하나님 인식과 그 오용을 지적합니다. 여기도 크게 두 가지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요.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예수의 미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바(Abba)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에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정치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버린 당시 종교 상황을 예수는 개탄하셨습니다. 신의 이름이 이데올로기로 변질되면, 한마디로 오웰(Orwell)의 소설 <1984>에 나타나는 극심한 언어의 도착이 일상화됩니다.

끔찍한 구조 악의 위선적 자기 치장의 추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해 주는 이성적 능력이 구조적으로, 문화적으로 마비되어 버립니다. 이를테면 사랑성(省)이라는 국가기구가 고문이라는 폭력을 제도적으로 전담하게 되지요. 진리성(省)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 기구가 뻔뻔스럽게 거짓을 날로 유포하게 됩니다. 풍요성(省)이라는 국가 경제기구가 노동 착취를 합리화하게 되지요.

이 같은 위선적 전체주의적 억압과 착취 구조 아래에서 밑바닥 인생은 빅브라더가 지시하는 대로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듯 열망하게 되고 마침내 그들은 가축화되고 말지요. 바로 이 같은 비극이 하나님 이름이 불경스럽게 오용되는 현실이기에 갈릴리 예수님은 그의 기도문에서 하나님 이름의 이데올로기적 변질을 극복하라고 당부하셨지요.

하나님 이름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결단코 이데올로기적 왜곡되어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의 이름은 실천의 본질입니다. 허위의식의 겉치레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시편(23편)에서에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의(義)의 길로 인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했지요. 하나님은 이름이면서도 바로 공의와 샬롬의 변혁으로 이끄는 실천적 동력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 이름이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전반부 주기도문에서 또 다른 소중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이름이 바로 변혁의 동력이 된다는 위의 메시지와 긴밀히 연결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 반드시 우리의 땅, 우리의 역사 현실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지배(Love-dom)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역사 현실 속에서 이뤄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힘써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이름의 실천적 동력은 언어 도착이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제도화되어 있는 우리 현실에서는 이 도착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선교로 이어져야 합니다.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죽어 가고,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가 짓밟히고, 평화의 이름으로 잔인한 전쟁을 부추기는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같은 구조 악의 지배를 극복해 내야 합니다.

예수 이름과 부활의 그리스도 이름이 함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될 때, 그 이름이 뿜어내는 변혁 에너지는 엄청납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가 회당 입구에서 구걸하고 있던 지체장애자 걸인에게 준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들에게 알량한 돈 몇 푼 받고 싶어 했던 그 장애자 걸인에게 베드로는 사랑의 눈빛으로 그를 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던가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사도행전 3장 6절)

자본주의 체제에 깊이 동화되어 있는 저희들로서는 베드로의 이 같은 변혁의 감동적 명령을 이해하기 참으로 힘들 것입니다. 금과 은의 힘으로 태연하게 자본주의적 갑질에 익숙하게 살아온 크리스천들은 이 이름, 곧 역사적 예수인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힘으로 이 장애자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킨 사실의 참뜻을 우리 상황에서 항상 곱씹어 봐야 할 것입니다.

금과 은 부스러기를 받고 평생 장애인으로 구걸하는 처지를 근본적으로, 급진적으로 바꿔 버린 이 총체적 변혁의 감동이 바로 주기도문의 핵심적 메시지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미 부활의 그리스도를 체험했기에, 나사렛 예수가 곧 부활의 그리스도임을 온몸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주는 역사 변혁의 힘을 그는 기쁘게 복음 사역으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후반부는 인간과 인간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중심으로 아바(Abba)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구체적 실천 프로그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는 프로그램이지요. 이 권고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광야 40년의 고난 순례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만나를 얻어먹었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루 이상 쌓아둘 수 없었습니다. 축척하는 순간 그것은 썩게 되어 있었습니다. 축척을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본질의 빛 아래서 보면 이 권면은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축척 탐욕이 인간을 근원적으로 비인간화시킨다는 진실에 우리는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다음 메시지는 또한 엄청난 메타노이아를 우리들에게 촉구하는 예수의 메시지입니다. 채권자가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주듯이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죄와 빚을 용서해 주시고 탕감해 달라는 청원 메시지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채권자인 갑으로 채무자인 을들에게 갑질하는 한 주기도문을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제적 갑질을 뉘우치고 버리지 않는 한 우리의 기도는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우리는 우리의 을들에게 하고 있는 온갖 갑질을 그만두는 결단부터 내리고 당장 실천해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끼리의 공의와 평화를 소중히 여기시지요. 그래야 하나님나라가 우리 안에서 비로소 펼쳐지게 됩니다.

주기도문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또한 유혹의 극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을 광야에서 유혹했던 사탄의 유혹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세상에서 지도자가 되려는 크리스천들에게 이 유혹 극복은 참으로 적절하고 절박한 메시지입니다. 교만과 독선과 힘에 의한 제압으로 세상을 이끌려는 지도자는 결코 하나님나라를 세울 수 없음을 주기도문은 명확하게 강조합니다.

그 흔한 돌로 값진 빵(재화)을 만들고 싶은 물량제일주의나, 세상을 높은 곳에서 호령하여 천하를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싶은 지배제일주의나, 하나님의 카리스마를 빙자한 종교 주술적 지배욕에 함몰하게 되면, 마침내 사탄 지배 질서에 항복하게 되고 맙니다. 이 진리를 장엄하게 주기도문은 깨우쳐 줍니다. 

그런데 이 사탄의 유혹은 바로 구조 악의 유혹이기도 하지요. 악의 구조적 민낯을 예수 따르미들은 항상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8장 26절에서 39절),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 무덤가에서 참으로 비참했던 정신 질환자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왜 물으셨을까요? 그저 그를 고쳐 주면 되지, 왜 이름을 물으셨을까요?

역사의 예수는 인간을 괴롭히는 사탄의 구조적 본질임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 짐짓 물으셨습니다. 그 정신 질환자는 자기 이름이 바로 로마 군단이라고 대답합니다. 당시 천하를 폭력적 승리주의로 지배했던 팍스로마나의 민낯, 그것도 그 제도화된 구조적 폭력 지배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지배, 공의 지배, 그리고 평화 지배와 선명하게 대조되는 사탄의 군사적 폭력 지배임을 폭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구조적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선교는 결단코 관념적, 명상적, 신학적 탐구활동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축사치유행위는 개인적 정신 질환의 치유만이 아닙니다. 그 질환의 뿌리에 스며 있는 사탄의 구조 악을 제거하는 총체적 치유였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예수가 추진했던 하나님나라 운동은 구조적 악에서 개인만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의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놀라운 힘을 드러내는 공공적, 감동적, 변혁적 운동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는데, 부활의 예수, 곧 그리스도로 격상된 부활 예수도 이 하나님나라 운동을 계승하고 지속하셨던가요? 부활의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이신데, 구태여 세상의 구조 악을 축출하는 이른바 하나님나라 운동에 얽매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4.

이제 오늘의 말씀 증거의 핵심으로 들어가 봅시다. 우선 부활 예수의 존재는 과연 몸의 실체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라는 문제부터 잠시 살펴봅시다. 과연 예수 제자들과 초대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지난 2천 년 가까이 제도 교회는 예수 부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면이 있다고 지적하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톰 라이트(N.T. Wright)가 이 점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표적 성서신학자입니다. (2008년 그가 출간한 <Surprised by Hope: Rethinking Heaven, the Resurrection, and the Mission of the Church>는 좋은 길잡이가 됩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부활 예수를 실체에서 분리된(disembodied) 영의 존재로 잘못 보았던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처음부터 영적 존재로 보았던 분들이 있었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수는 신적인 영성의 존재이기에 육체의 아픔에서 완전 자유롭다고 믿었지요. 이것이 가현설(Docetism)의 예수입니다. 이런 예수는 이미 탈역사화되고, 탈실체화된 예수 인식이지요. 이들에게는 십자가 고난은 아무 의미 없는 사건이지요. 일종의 쇼(Show)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고난의 의미가 우리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변혁의 감동적 동력이 될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예수의 탈실체화 움직임은 역사 속에서 악을 변혁시키는 일을 과소평가하거나 아예 기피하는 움직임으로 쉽게 연결됩니다. 여기에 영지주의 영향이 작동하게 됩니다. 세상은 악하기에 이 세상을 떠나 천당에 가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구원의 종착이라고 믿게 됩니다.

구원은 여기 역사 속에서 만물을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일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피난하여 피안으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영혼불멸설을 강조했던 플라톤 사상과도 상통합니다. 그래서 신플라톤주의 사상과 영지주의 사상이 초대교회를 혼란시킨 것도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복음서가 증거하는 부활 예수 곧 그리스도는 과연 육체를 떠난 탈실체화된 영적 존재였을까요? 그리고 부활예수는 하나님나라 운동에 전혀 무관심했을까요? 

여기서 초대 예수 따르미들이 가졌던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적 판단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몸의 부활 또는 부활 예수의 몸은 어떤 것일까요? 무엇보다 먼저 부활 예수의 몸은 실체(physicality)입니다. 그렇다고 썩어 없어지는 우리 육체의 몸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러기에 부활인 resurrection은 몸의 재생을 뜻하는 resuscitation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썩어질 몸이 잠시 소생했으나 결국 또다시 죽어 썩어질 몸이었지요. 그런데 예수 부활은 몸의 부활이지만 이 몸은 썩지 않은 몸입니다. 썩지 않는다는 뜻으로 또는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영의 몸 또는 영의 실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플라톤적인 영혼불멸의 영과는 다릅니다. 가현설적인 영과도 전적으로 다르지요.

▲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의 '나사로의 부활'(The raising of Lazarus, 1630년 作)

부활의 몸은 썩지 않기에 썩을 우리의 육체의 몸보다 더 견실한 실체(physicality)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체성, 공간 점유성, 실천성, 감동성, 공공성, 그리고 변혁성을 모두 지니고 있지요. 그러니까 역사 변혁성은 부활 이전의 예수 삶에서 보다 더 강렬하게 작동합니다. 바로 이 점을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에서 29절을 보면 참으로 흥미로운 증언이 나옵니다. 부활 예수의 모습이 부활 이전 예수(역사 예수)의 모습보다 더 따뜻하고, 더 바로 보살피시고(바보스럽고) 더 품어 인도하시는 엄마와 아빠 같은 모습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제자들 중 도마는 어느 누구보다 계몽주의 이후 시대의 지식인다운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모더니스트(modernist) 제자였습니다. 합리적 비판의식을 지닌 제자였지요.

톰 라이트(N.T. Wright)는 그를 역사 탐구적 태도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25절에 그는 이렇게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내 손가락으로 그 못 자국과 옆구리를 만져 보지 않고는 부활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했지요. 이때 제자들은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죽인 공안 당국의 체포가 두려워 한곳에 모여 숨죽여 숨어있었습니다.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지요. 바로 이때 문이 꽉 닫쳐 있었는데,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유령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부활의 그리스도는 유령처럼 결코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매우 자상한 스승이나 엄마, 아빠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라고 하셨지요. 유령이 평화를 선포하고 엄마처럼 격려해 주나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도마에게 직접 다가오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믿지 않았던 그의 합리적 의심을 결코 나무라지 않으셨지요. 오히려 도마에게 예수의 손바닥 못 자국과 옆구리 상처를 손으로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때보다 더 인자하고, 더 부드럽고, 더 따듯하게 그의 부활의 몸을 만져보라고 했지요. 부활의 몸이 결코 유령의 영이나, 환상에 나오는 실체 없는 유령이 아님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하라고 말씀하셨지요. 도마는 썩지 않는 예수 부활의 몸이 썩을 수 있는 부활 이전의 몸과 겉으로는 다를 바 없음을 이 순간 만지지 않고도 알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몸이 육체의 몸 보다 더 실체적으로 따듯하고, 친절한 몸임을 깨달았지요.

그리고 도마는 참으로 놀라운 신앙적, 영적 탄성을 발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허무주의를 뛰어넘는 역동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지요. 일찍 베드로가 뜻도 모른 채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한 고백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두 고백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도마의 고백은 직접 자기 손으로 만질 필요 없이 부활 예수는 그리스도요, 메시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깨달았던 진정한 고백이며, 도마는 자기 고백의 의미를 스스로 감동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고백의 뜻을 깨닫지 못했기에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거짓말했습니다.

도마의 응답에 대해 부활의 몸이 되신 예수는 이렇게 그때나 오늘이나 저희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며 깨우쳐 주십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 이 말씀 듣고 보니까 역사의 예수 모습도, 부활의 예수 몸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우리들이 2천 년 전의 예수 제자들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저희들이 진정 도마보다 더 큰 축복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으려면 적어도 도마처럼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역사의 예수를 볼 수 있고, 또 역사의 예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럽고 더 품어 보살펴 주시는 사랑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공동체에서 혹시나 역사적 예수에게는 부활의 따듯한 영이 없고, 부활의 예수는 순전히 영적 존재이기에 역사 변혁에는 관심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매, 형제가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나님나라 펼침의 기쁨을 우리 현실 속에서 온 몸으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부활의 예수께서 이 하나님나라 펼침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이제 마지막 메시지로 여러분들께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예수가 승천하시기 전 수제자 베드로에게 당부한 지엄한 권면의 뜻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인 21장에 주목해 봅시다. 놀랍게도 부활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마치 지난날처럼 아침을 먹었습니다. 식사 후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참으로 진지하게 세 번씩이나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부활 예수가 실체가 없는 유령이 아님을 주님께서 친히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고 확인한 뒤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진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새삼 깨닫고 기뻐하고 있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수제자에게 세 번씩이나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예수를 세 번 모른다고 비겁하게 부인했던 터라 베드로는 매우 민망하고 송구스러웠겠지요. 세 번 모두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그 사실을 부활의 주님께서 친히 알고 계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대답할 때마다, 부활의 주님은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내 양 떼를 먹여라."

도대체 이 명령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 명령이 하나님나라 펼침과 세움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 권고가 2천년이 지난 오늘 기독교 공동체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명령이 오늘 분단된 조국 땅에서 한국교회에게 주는 선교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특히 30세 생일을 앞두고 있는 새길공동체에게 부활의 주님과 이 명령은 어떤 의미를 던져 줄까요?

5.

여기 "내 양 떼"는 무엇을 뜻할까를 예수 당시 상황과 오늘 우리 상황에서 심각하게 성찰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특히 부활의 몸이 되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래, 그래야지. 나를 정말 사랑해야지. 너는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으니, 이제부터는 정말 나를 사랑해야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세 번씩이나 내 양 떼를 정말 돌보고, 먹이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역사의 예수나, 부활의 예수는 자신을 항상 이 양 떼와 동일시하시고, 그들과 공감하셨고 동고하셨지요. 그들과 역지사지하셨고, 역지감지하셨고, 나아가 역지식지(易地食之)하셨지요. 이것이 바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에게 베푼 사랑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과 같은 뜻이지요. 꼴찌(the last)와 지극히 작은 자(the least)와 동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마태복음 25장 31-45절) 우리는 부활 이전이나 그 이후나 한결 같다는 진리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양 떼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예수 당시의 정치경제문화가 심각하게 양극화되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로마 권력, 헤롯 권력 그리고 성전 권력에 의해 삼중으로 착취당했던 당시 꼴찌들과 지극히 작은 자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벗이요, 양 떼였습니다. 아니, 그들이 바로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의 최후 심판 얘기에서 확인하듯, 심판주 자신이 주리셨고, 목마르셨고, 나그네 되시고, 헐벗게 되셨지요. 그리고 병들게 되시고 나아가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놀라운 메시지 속에서 이른바 '높은 기독론(High Christology)'은 '낮은 기독론(Low Christology)'과 다른 것이 아님을 확인해야 합니다. 부활의 그리스도가 갈릴리의 예수임을 다시 명심해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부활의 예수께서 수제자 베드로에게 꼴찌와 지극히 적은 자들을 돌보고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한 이른바 '높은 그리스도'께서, '낮고 천한 자, 그래서 힘 있는 자들에 의해 고통당하는 낮은 자들'을 먹이는 '낮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이 비유의 실체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게르치노(Le Guerchin)의 '성 베드로의 눈물'(Les Larmes de saint Pierre, 17세기 作.)

그리스도의 양 떼를 먹이는 일은 실체가 없는 영혼이 해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육체의 몸보다 더 실체적인 영의 몸으로 실천해 내는 일이지요. 곧 부활의 몸은 저 구름 위에서 실체 없는 영혼으로는 해낼 수 없습니다. 육체에서 분리된 불사의 영혼은 예수의 양 떼를 돌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구체적인 역사 현실 속에서 부활 그리스도의 명령을 우리는 따르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현실 속에는 악의 세력에 의해 고통당하는 양 떼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악의 세력을 예수의 십자가 사랑 곧 선재적 원수 사랑 실천으로 무력화 시켜야 합니다. 아니, 무력화보다 한 차원 높은 발선화(發善化)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의 악이 선으로 변합니다. 이 같은 변화는 악의 변화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악도 선으로 변화시킵니다. 여기에 발선은 당사자 개인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새 사람으로 일어서게 되는 변화), 구조적 변화, 곧 평화의 새 질서를 세우는 일로 이어집니다. 이때, 양 떼와 양 떼를 괴롭힌 악은 모두 변화되어 새로운 몸의 존재로 거듭나 비로소 새 질서에서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발선의 효험이 아니겠습니까(로마서 12장 20-21절)!

첨가하여 부활과 연관된 기독교 전통적인 심각한 오해 하나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대체로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부활로 죽어서 해체되는 영혼의 존재로 천당에 들어가 그곳에서 부활의 주님과 영원히 행복하게 지낸다고 믿습니다. 이 상태를 완벽한 구원 상태로 믿습니다. 이런 신앙은 성서적 신앙이 아니라고 톰 라이트(N.T. Wright)는 단언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위로하시며 하신 말씀에도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또,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비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한복음 14장 1-2절) 이 말씀을 전통적 교회는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강도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갈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또한 전통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천당에 가서 그곳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축복이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성서적 메시지가 아니라고 톰 라이트(N.T. Wright)는 역설합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신자들이 사후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영원히 사는 탈역사적 천당이 아닙니다. 파라다이스는 잠시 쉬는 곳일 뿐 영원히 사는 하나님 집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부활의 그리스도에게 땅과 하늘 모두를 다스리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당신의 백성과 손을 잡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십니다. 이때, 그리스도의 백성은 그리스도처럼, 썩지 않는 부활의 몸으로 땅으로, 역사 속으로 내려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동역자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마치 신랑과 아름다운 신부가 만나 하나가 되듯 말입니다.

이 하나 되는 일은 곧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서 완성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이것은 결단코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 곧 실체가 없는 존재의 향연일 수 없습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인격적이면서도 역사적 변혁의 기쁨이 확산되고 심화되는 하나님나라 잔치 기쁨입니다.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완성되는 그러한 총체적 잔치의 기쁨이지요. 이것이 종말론의 완성이 아니겠습니까?

역사 예수, 부활의 그리스도, 승천한 그리스도가 하나님 백성과 함께 모두 실체적 부활의 몸으로 종말적 희망을 역사 속에서 완성하는 일이 바로 오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주기도문의 비전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의가 큰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단비처럼 내리는 하나님 사랑 지배가 마침내 이 땅에서 이뤄져서 구원이 완성되고 창조가 원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창조와 구원이 아름답게 만나 완성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명 위해 부름 받은 공공적, 감동적, 그리고 변혁적 공동체가 바로 교회 아니겠습니까! 새길교회가 과연 그런 공동체입니까? 이것이 29세가 되는 새길공동체가 메타노이아를 위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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