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 /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지음 / 송동민 옮김 / 128쪽 / 7,000원

욥기를 처음 통독했을 때가 기억난다. 초등학교 아니면 중학교 때였다. 세로쓰기가 된 성경이기도 했지만 죽 읽어 나가면서 욥이 한 이야기인지, 욥의 세 친구가 한 이야기인지, 엘리후가 한 이야기인지 헷갈렸다. 당연히 욥기를 읽으면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학부 때 그 주의 <매일성경> 본문으로 전도사님과 조장들을 가르치는 엘더들이 협력해서 몇 개의 문제를 만들어 전체 흐름과 주제를 알 수 있도록 조별 성경 공부를 이끌어 간 기간이 있었다. 그중 욥기가 본문인 시기가 있었다. 문제를 만들 때 전도사님과 엘더들 사이에 격론이 오갔다.

욥기 큐티가 한두 주에 끝이 나는 것도 아니었고, 전체 주제와 구조를 어떻게 잡으며 나누어진 본문에서 어떻게 문제를 뽑을지 쉽지 않았다. 그저 그 주 본문을 느낀 대로 주관적으로 문제를 만든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욥기 큐티가 끝난 후에 욥기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했다. 문제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때의 수고와 공부는 청년 시절 욥기를 나름 깊게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통독을 하면서 욥기를 다시 만나거나 큐티 본문으로 만날 때마다 깊은 은혜와 감동을 느끼고는 한다.

특히 세월의 흐름 가운데 삶 속에서 내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욥 정도는 아니지만 뜻하지 않게 고난을 만나고 친구들에 의해 비방을 받으면서, 욥기를 머리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육화를 통해 체험하고 재해석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욥기를 다룬 책들을 만나면 반갑다. 하지만 가끔 욥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책도 섞여 있어 깊은 실망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욥기를 그저 인과응보식으로 접근하거나 고난을 너무 피상적으로 접근한 책도 자주 보았다.

이번에 접한 이레서원에서 나온 욥기 관련 서적도  반가우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기대감이 있었던 것은 제목 때문이었다. 물론 제목이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 욥기>인 탓에 고난에 지나치게 교과서적 접근을 하지는 않았나 하는 느낌도 들었다(고난을 믿음으로 이겨 낼 수 있다는 단순한 답변은 쉽다. 그러나 이 답변은 고난당한 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책을 만나기 전 SNS에서 처음 책에 관련 정보를 접했을 때 이 책이 130쪽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서 '욥기를 제대로 다룬 것일까'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욥기 강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욥기의 주제와 성격들을 보여 주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세세한 해석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욥기는 강해에만 집중할 경우 욥기의 전체 그림을 놓치기 쉽고 비슷해 보이는 인물들의 격론에 어느 것이 누구의 주장인지 헷갈리기 쉽다. 한마디로 이 책은 욥기의 42장에 걸친 각 논쟁에서 독자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위험성을 감수하기보다 그 미로의 구조와 설계, 성격을 미리 친절하게 보여 줌으로써 욥기를 읽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욥기에 대해 갖기 쉬운 편견과 오해를 하나하나씩 풀어 준다. 특히 욥을 그저 성경 속 인물로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욥의 삶을 통해 얻은 통찰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풀어 갈지를 보여 준다. 욥기를 읽으며 글로 느껴지는 고난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 고난의 문제를 욥과 연계해서 보기도 한다. 세 친구의 피상적인 위로를 지적하며 동시에 우리들의 위로 방식을 지적하기도 한다.

종종 우리들은 욥의 친구들마냥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우리의 죄로 인해 고난이 임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나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이들을 보고는 한다. 욥의 친구들처럼 일주일 정도는 같이 고난의 현장에 같이하며 위로하는 듯하지만, 곧 일어나 고난당하는 이의 한탄에 지겨워하고 믿음이 없다고 비난한다.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들에게 그것을 비난하며 쉽게 단정 짓는 이들도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저자는 고난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을 삼간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고통을 당하면 아프고 상처가 나면 쓰리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아플 때 아프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번뇌할 수 있고 울부짖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한탄하고 또 고통과 고난의 원인을 알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이 책은 이외에도 욥기가 얼마나 풍성한 책인지를 잘 보여 준다. 더 많은 것을 논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이 졸문이 너무 길어질 위험이 있다.

어찌 됐건 이 책은 욥기를 읽거나 알기 원하는 이들에게 필독서와 같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을 언급하자면 엘리후에 대한 문제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엘리후가 욥기에서 갖는 위치와 성격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저자는 엘리후도 욥의 세 친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간단하게 말하지만, 왜 그에게만 하나님이 책임을 묻지 않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 굳이 엘리후의 긴 언급이 등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직접 이야기하지 않지만 저자는 일부 신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엘리후의 이야기는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는 것일까. 이 엘리후를 묵상해 보면 세 친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나타난다. 그것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 관계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두 가지 첨언하면, 무엇보다 이 책은 욥기 강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강해서가 아니기에 욥기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와 지침은 주지만 욥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이해하고 느껴야 할 책임은 결국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책은 욥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전반적인 주제들과 관점들을 보여 주지만 각 구절들과 등장인물들이 이야기하는 논점을 세세히 보여 주지 않기에 욥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그 맛을 느끼기 위한 노력은 우리가 행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예고편만 보거나 평론가의 평론을 읽고 난 뒤 영화를 다 이해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문양호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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