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단상

올해도 여지없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해마다 가을은 질감이 확 다른 공기와 함께 창문을 넘어온다. 갑자기 높아진 하늘과 선명한 구름에 눈이 부시다. 어두운 터널을 막 빠져나온 망막처럼 달라진 풍경에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울 정도다. 낮 시간이 되면 다시 더워지지만, 이때쯤 우린 이미 가을이 계절의 경계를 넘어왔음을 안다. 시작부터 변죽을 울리고 있음에도 한마디 더 덧붙이면, 늦여름 혹은 초가을, 딴이름한소리인 이 잠깐의 시절은 '이미와 아직'의 변증법적 긴장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의 때가 아닐 수 없다.

'가을이구나' 하고 느낀 그때는 공교롭게도 <터닝포인트>(뉴스앤조이)에 대한 서평 의뢰를 받은 다음 날이었다. 서평을 써야 한다는 나름의 부담을 안고 눈을 뜬 아침, 먼저 도착한 것은 책이 아니라 가을바람이었다. 사실 나에게는 가을바람에 대한 오랜 인상이 있다. 가을바람을 생각하며 노래를 짓기도 했다. 그 강렬한 인상은 '그대 같은 노래'라는 제목으로 2012년 앨범에 실렸다. 노래는 "가을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책을 읽기 시작해"라고 시작한다.

<터닝포인트>가 담고 있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소재가 내게 새겨진 가을바람에 대한 인상과 절묘한 타이밍으로 서로 얽히면서 도입부를 수필처럼 쓸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에게 가을바람은 그야말로 "터닝포인트"였다. 그 바람처럼 노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덥고 습한 계절을 지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면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의 친절함 이면에는 겨울을 알리는 서늘함이 공존한다. 멋진 바람이다. 이틀 동안 책을 읽고 나서 먼저 든 생각은 <터닝포인트>에 등장하는 다섯 선생님 모두 가을바람의 특징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 친절하고 서늘했다.

이 책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뉴스앤조이>가 진행한 인터뷰를 담고 있다. 배덕만, 권연경, 김근주, 박득훈, 한완상 이렇게 다섯 분과의 인터뷰를 문답 형식이 아닌 하나의 글로 다듬어 냈다. 한국교회의 현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날카로운 전망을 담고 있지만 내용의 무게감에 비해 정말 잘 읽힌다. 원래의 대본이 대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는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과 달라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소통이라는 자기장 안에 붙들어 둔다. 책이 구성된 형식과 더불어 인터뷰어 강도현 대표의 친절한 정리가 한몫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야말로 가을바람 같은 책이다.

"터닝포인트"라는 제목이 보여 주듯 이 책은 하나의 표지다. 더 이상 이 길로 달려서는 안 된다는 짙은 형광색 경고판이다. 이 표지를 무시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이유들과 돌이켜 가야 할 새로운 방향이 다섯 장 안에 각각의 시선을 따라 제시된다.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교회가 돌아설 길을 묻다'라는 부제는 멈추고 돌아서는 일뿐 아니라 이후에 어떤 방향으로 다시 움직여야 하는지가 중요함을 부연한다. 우리는 어느 길로 돌아서야 하는 걸까.

순전함의 기술

'순전한가'와 '가능한가' 사이에서 우리는 늘 갈등한다. 500년 전의 종교개혁이 정치권력의 후원에 힘입어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개혁자들의 마음에 일었을 갈등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역사는 '가능함'을 먼저 선택한 결과의 아픔을 보여 준다. 정치권력의 후원에 힘입어 진행된 종교개혁의 끝은 전쟁이었다. 종교개혁의 이상은 100년이 넘는 전쟁 속에서 남아 있기 어려웠다. 종교적 이상이 아무리 훌륭해도 타인에게 강요하는 방식은 처참한 결과를 만들었다. 그렇게 유럽이 피 흘리며 관용을 학습하는 동안, 역설적이게도 종교는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밀려났다.

배덕만 교수는 종교개혁 이후 이어진 유럽 역사 그리고 한국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미국 교회사와 초기 한국교회사를 요약하면서 권력과 결탁해 얻은 아픈 현실을 지적한다. 지금은 우리가 종교개혁의 이상을 회복해야 할 시기인 동시에 종교개혁의 방법을 함께 반성해야 할 시기임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가능한 일'로 우리의 시선을 빼앗긴다면 아픈 역사를 반복하게 될 뿐임을 기억하자.

이 책은 하나의 표지다. 더 이상 이 길로 달려서는 안 된다는 짙은 형광색 경고판이다. 이 표지를 무시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이유들과 돌이켜 가야 할 새로운 방향이 다섯 장 안에 각각의 시선을 따라 제시된다. <터닝포인트> / 배덕만‧권연경‧김근주‧박득훈‧한완상‧강도현 지음 / 뉴스앤조이 펴냄 / 188쪽 / 1만 2,000원

생각하며 사는 신앙

역시 문제는 삶으로 넘어온다. 신약학자 권연경 교수는 칭의 중심의 종교개혁 신학이 지닌 한계를 짚는다.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국교회의 신앙은 그의 저작들이 반복해서 주목하는 지점이다. '공로주의'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던 종교개혁가들이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행한 선택과 집중은 이후에 '행위 없는 구원'이라는 왜곡된 신학을 초래하고 말았다. 문제는 그 신학이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 이르러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 우리가 함께 서 있다는 상황 인식은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신학의 한계를 이해하고 성경적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권 교수의 생각은 종교개혁을 하나의 도그마로 받아들였던 오랜 착오를 만회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게 회복된 균형은 삶에서 그 진실함을 나타낼 것이다. 생각하는 신앙은 도덕적 인간을 만들게 될 것이고,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사회는 도덕이라는 교차점에서 비로소 기독교의 아름다운 진실을 마주하게 될 테니까.

복음의 공공성

이렇듯 공적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는 우리의 부르심에 대한 이해와 다르지 않다. 김근주 교수는 이 복음의 공공성을 구약에서 먼저 찾는다. 대개의 한국교회가 부록쯤으로 여기는 구약성서 안에 제시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강조하면서 그는 '구약'을 통해 한국교회가 편협한 개인적 복음 이해에서 벗어나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구약학자로서 그가 늘 후렴구처럼 노래하는 "공평과 정의"라는 가치는 구약이 쉴 새 없이 예고한 메시아, 예수그리스도의 실체를 바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구약의 율법은 건져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건져진 백성에게 주어진 영광스런 삶의 방식이었다. 이것이 공적 신앙의 기초라고 볼 수 있다. 구약 율법이 제시한 하나님의 비전은 결국 예수그리스도로 결론 맺게 된다. 이런 오랜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결론으로서 신약에 나타난 예수를 편집적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은 온전하기 어렵다.

영화나 스포츠를 즐기는 우리는 주인공의 생사 여부나 게임의 승부를 확인하려고 관람료를 지불하지 않는다. 사실상 우리가 지불하는 비용은 과정에 대한 것이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재미와 가치를 경험한다. 결론으로서 복음의 위대함 역시 과정의 아름다움에 기인한다. 구약과 신약의 균형은 복음의 가치를 바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번 기회에라도 김근주 교수의 생각을 읽어 보자. 정리된 문장으로 읽더라도 김 교수의 설교나 강의를 한 번이라도 들었던 사람이라면 금방 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올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높고 "겁나" 빠르다. 그가 느끼는 사적 신앙이라는 현실의 기울기가 "한오백년" 사는 동안 너무 심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자본주의의 극복

경제와 관련해 박득훈 목사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강의는 과거 나라가 혼란스럽던 시대에도 우리 국민이 지금과 같은 수준의 극단적 자본주의를 원하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1948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1호 제84조를 처음 읽어 본 게 그때다.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 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이 놀라운 문장을 이 책에서 다시 만났다. 이와 같은 고상한 선배들의 상식은 이념의 대립과 남북의 분단 상황을 겪으면서 오갈 데 없어졌다. 공산주의를 개념이 아닌 아픔으로 경험한 이북의 그리스도인들이 월남하면서 자본주의가 신앙이 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어느새 한국교회는 왜곡된 자본주의가 한국 사회에 자리 잡는 통로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실 인식이 박득훈 목사를 ‘맘몬’과 싸우는 투사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그는 이 문답을 통해 한국교회의 모태가 된 미국 교회의 뿌리인 청교도 신앙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살핀다.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지켜 가면서 자본주의라는 현실과 얼마간 타협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서늘한 충고를 잊지 않는다. 현장을 살아가는 그의 목회적 고민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고민은 사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소명을 가진 독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사자 여물 먹이기

한완상 교수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랜 사회학자로서의 이력을 대변하듯 넓고 깊다. 그의 이야기는 성경의 시작과 끝을 훑으며 거대한 구속사의 패러다임을 바라보게 한다. 사드 배치라는 최근의 이슈를 기화로 해서 '칼과 칼이 부딪치는' 작금의 시대정신을 비판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제시한 '샬롬과 비움의 길'을 따르는 것이 교회에 주어진 사명이며 시대정신이라고 일갈한다.

포식자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 자체를 없애는 것이 '샬롬'의 길임을 말하면서, 그는 예수를 따르는 길은 "사자에게 여물을 먹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황이 아니라 강자로 인한 긴장 자체가 사라진 상태가 원초적인 창조의 아름다움인 '샬롬'이라는 것이다. 그가 한 가지 더 강조하는 것은 '비움'이다. 힘과 힘이 부딪혀 '쇼부(勝負)'를 보는 채움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가 표상하는 '비움'의 길이다.

마지막 질문

<터닝포인트>는 다섯 학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어제와 오늘을 읽으며 제시하는 내일에 대한 기대이다. "권력과 결탁하지 않는 순전함으로, 삶을 담보하는 신앙으로, 공공성을 회복하는 교회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공동체로, 샬롬과 비움의 신학으로", 결국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수렴되는 공통된 방향 제시다. 이 책을 읽는 누구나 이렇게 각각 다르면서도 일관된 다섯 가지의 대답에 동의하며 저마다 새로운 통찰들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런데 우리는 이 대답을 500년 만에 처음 들은 것일까?" 

밥 딜런의 오래된 노래 후렴구를 인용하며 글을 마쳐야겠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그가 노래했듯이 오래전부터 대답은 이미 바람 속에 불고 있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았던가. 다만 그 대답의 길로 걷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십자가의 길"이다. 문제는 수백 년의 경험으로도 잘 되지 않는 "순종"의 여부다.

내년 이맘때쯤 가을바람이 501번째 다시 불어올 때, 우리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500이라는 눈금에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었다는 민망함을 피할 길은 역시 읽은 대로, 배운 대로 한 걸음이라도 순종하는 길이다. 이것이 친절한 책 <터닝포인트>를 통해 함께 느껴야 할 서늘함이다.

이길승 /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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