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에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모든 신앙생활의 원천,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말씀을 담은 문헌…. 하지만 잠시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보면, 그리고 몇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 이 간단해 보이는 질문에 간단하게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성서는 하나의 책이 아니다. 작게 보아도 '구약'과 '신약'이라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온갖 장르의 문헌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모음집이다. 게다가 이 모음집은 처음부터 오늘날 독자들이 읽는 '책'의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문헌들은 구전의 역사까지를 포함하면 3,0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나 몇몇 문명사적 전환의 영향 아래, 여러 '번역' 과정을 거쳐 우리 손에 쥐어졌다.

이 과정의 복잡다단함과 두터움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성서를 '읽는다'고 할지라도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성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좀 더 나아가 성서라는 오래되고도 낯선 '고전'이 지닌 풍요로운 세계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성서라는 문헌이 지닌 역사성을 의식해야 한다.

<성서, 역사와 만나다 - 민족의 경전에서 인류의 고전으로>(비아)의 지은이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간과하는 전통과 역사에 대해 탐구해 온 학자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 수석편집자인 티모시 조지는 그를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교 옹호자이자 미국이 배출한 최고의 교회사 학자"라고 평했다. <인디펜던트>는 사설에서 "그는 개혁의 역사를 잊은 프로테스탄트뿐만 아니라, 동방 교회를 잊은 서방 교회의 망각을 일깨운 역사학자"라고 적었다. 서방 교회에 동방 교회의 가치를 되새겨 주었듯, 프로테스탄트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개혁의 역사를 되새겨 주었듯 펠리칸은 이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성서라는 책을 접했을 때 잊거나 간과하기 쉬운 복잡다단한 역사를 되새겨 준다.

책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들어가는 말 △단 하나의 성서, 온전한 성서, 순수한 성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히브리어로 된 진리 △그리스어로 말하는 모세 △기록된 토라를 넘어서: 탈무드와 계속되는 계시 △이루어진 율법과 예언서 △두 번째 언약의 형성 △성서의 백성들 △원천으로 △오직 성서 △정경과 비평가들 △인류를 위한 소식 △성서 안에 있는 낯선 신세계 △나가는 말. 펠리칸은 이를 통해 성서의 탄생과 번역, 편집 그리고 전파의 역사를 연대기순으로 보여 준다.

<성서, 역사와 만나다 - 민족의 경전에서 인류의 고전으로> / 야로슬라프 펠리칸 지음 / 김경민, 양세규 옮김 / 비아 펴냄 / 416쪽 / 2만 원

구전의 시기를 거쳐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서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그리고 히브리어를 망각한) 유대인이 늘어나자 첫 역사적 변곡점을 맞는다. 구전에서 기록으로, 더 나아가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새로운 매체와 언어를 입게 된 것이다. 이 번역을 통해 유대교는 한 민족의 종교에서 세계 종교로 변모하며 동시에 훗날 유대교 이상의 '세계종교'가 될 그리스도교에게 자양분을 제공한다. 새로운 종교, 그리스도교는 70인역을 통해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공고히 했으며 그리스어에서 라틴어 중심으로 문명의 중심이 바뀌자 불가타 성서의 번역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의 연속성을 이어 간다.

르네상스 시기 '원천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각 고전을 원어로 읽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종교개혁가들은 이 움직임의 영향을 받아 성서 '원전'의 가치를 천명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이 이 신앙의 원천을 접할 수 있도록 토속어로 번역하는 과업을 이어 나갔다. 근대를 계기로 일어난 역사적·문헌학적·언어적·문학적 비평은 성서를 대하는 새로운 렌즈를 선사했으며, 동시에 성서는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돼 명백한 인류의 '고전' 자리에 올랐다.

위에서 볼 수 있듯 구전에서 책으로, 한 민족의 경전에서 온 인류의 고전에 이르기까지 성서는 최소한 2~3번의 문명사적 전환을 함께했으며(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우리 손에 닿기까지 수없이 많은 번역 과정(비단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전환하는 작은 차원의 번역뿐만이 아니라 한 문화를 또 다른 문화에서 소화해 내는 거대한 차원의 번역까지를 포함한 과정)을 거쳤다. 성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말씀'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본문에서도 언급하듯 성서가 전승과 기록, 번역과 편집을 통해 온 인류에게 전해지는 과정은 어두컴컴한 동굴에 진정한 세계의 밝은 빛이 비친다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쓴 은유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빛'을 바라본 인류가 동굴에서 나와 해방의 역사만 맞이한 것은 아니다. 성서를 접한 인류는 이내 '빛'의 소유권, 누가 진정으로 '빛'을 알고 있느냐며 다툼을 벌였다. 구전 전승이 기록이 되고, 여러 언어로 번역하면 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성서를 읽는 사람들의 상호 몰이해 또한 심각해졌다.

70인역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갈등을 낳았고, 불가타 성서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분리를 고착화하면서 동시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과 흐름을 같이했다. 종교개혁의 결과로 나온 루터의 독일어 성서를 필두로 한 온갖 토속어 성서는 서방 교회를 다시금 로마 가톨릭과 다양한 개신교 교파로 나누었으며, 나아가 종교인(유대인, 그리스도인)과 비종교인(세속화의 흐름을 같이하는, 종교를 갖지 않은 이들)의 분리를 촉발하고 이를 고착화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각 집단은 자신이 성서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한 해석을 해내고 있다고 자신했고 이에 비추어 이전의 해석, 다른 집단의 해석은 틀리고 잘못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를(또한 유대교는 그리스도교를),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을(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를), 근대 이후 비종교적인 지식인들은 종교인들을(마찬가지로 종교인들은 비종교인들을) 경멸하고 멸시했다. 성서학이 유례없이 발전한 20세기 초 독일에서 발생한 인류사에 유례없는 대학살은 '경멸'과 '멸시', 상호 몰이해가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면서 동시에 "빛이 퍼져 나가는 만큼 갈등도 커진다"는 성서의 역사 속 아이러니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교회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학자답게 펠리칸은 이 모든 빛과 어둠, 해방과 갈등의 역사를 이 한 책에 담아냈다. 그리고 성찰하는 신앙인으로서 그는 모든 장에서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연중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종교인과 비종교인에게 각 집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닫아 버린 새로운 빛, 성서의 풍요로움을 전하기 위해 고투한다.

그리스도인을 향해서는 유대교의 성서 해석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말하며 개신교인들을 향해서는 종교개혁 이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했고 풍요로운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내세웠던 '오직 성서'라는 관점으로 중세에 성서 연구를 등한시했다고 비판하는 이들은 불가타 성서와 라틴 전례문을 꼼꼼히 대조하며 살펴볼 필요가 있다."(209쪽)]. 또한 종교인들 전체를 향해서는 비종교인들의 성서 읽기가 어떻게 성서 읽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지를 상기한다["성서에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말이 진실이라면 비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말도 진실이다."(379쪽)].

(에드먼드 버크의 표현을 빌려) "오늘날 모든 인류는 성서의 '일시적인 소유자'이자 '종신 세입자'"라는 펠리칸의 진술은 오랜 시간 '그리스도교' 역사를 다방면으로 살핀 역사가로서의 결론이면서 동시에 인류에게 전해진 이 '빛'을 누군가 독점할 수 없으며, 이 '빛'이 타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쓰여서도 안 된다는 지성인의 경고이기도 하다. 또한 '빛'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신을 돌이키고 이를 다른 이들과 '누리는 것'이며 우리는 언제까지나 빛을 빛 되게 해야 한다고 신앙인으로서 고백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500년을 맞이해 '원전으로', 다시금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린다. 하지만 그 방식이 "특정 교회의 특정 성서 해석이 갖는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귀결한다면 지금까지 축적된 갈등과 어둠을 증폭하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언젠가 조지 산타야나가 말했듯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과거를 반복하는 형벌에 처해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우리에게 이 '빛'이 어떻게 전해졌는지를 '기억'하며 전해진 이 '빛'을 풍요롭게 나누고 이 빛을 향해 우리 자신을 돌이키는 것이다. <성서, 역사와 만나다>는 이를 위해 필요한 '기억'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성서학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 그리고 유대인 학살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던 시기 독일에서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본회퍼는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모든 것이 단기적이고 성급하지. 모든 위대한 업적은 (중략) '기억'을 필요로 한다네. 과거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도 않고 미래를 형성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그들은 대부분 '잘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라네." (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中)

양지우 /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마쳤으며, 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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