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91년생 모태신앙입니다. '보통의 교회'에서 '보통 청년'으로 있으면서 고민했던 문제를 나누고 싶어 글을 씁니다. 함께 신앙생활한 분들, '평범한 성도'와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점도 있습니다. 기도 제목 나누기, 간증, 청년의 비전, 선교, 셀 모임, 교회 봉사, 신학의 부재 등이 그 내용입니다. - 필자 주

한국교회가 추구할 권력

한동안 나라 안팎으로 권력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습니다. 권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와 함께 많이 논의됐던 게 민주주의였습니다. 한편으로 '불의한 권력에 따라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서도 많은 기사가 나왔습니다. 로마서 13장의 해석을 놓고서도 기사가 많이 나왔습니다. '어떤 권력을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행하는 권력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조금 부족한 듯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다뤄 보고자 합니다.

우선 권력과 권위에 대한 개념을 먼저 설명하고 가겠습니다. 권력과 권위는 비슷한 듯 다른 의미입니다. 권력은 사전적 의미로 "개인 혹은 집단이 타인 혹은 타 집단을 강제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권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가장 익숙하게 연관되어 떠오르는 것은 국가권력, 공권력, 정치권력, 권력 다툼 같은 단어들입니다.

권위는 다릅니다. 사전적 의미로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입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권위는 권력을 행하는 것에 대해 '인정하는 것'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 힘을 사회와 개인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권력이 있어도 권위를 인정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기독교인의 영향력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영향력으로 세상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의 가치를 따르게 한다면, 그것이 곧 권력입니다. 그 영향력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낸다면 그것이 곧 권력입니다. 교회가 예수의 가치를 가르치는 곳으로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곳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그 핵심이 '섬기는 권력'을 행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섬기는 권력을 제안하며

저는 '섬기는 권력'이 한국교회가 추구해야 할 권력의 방향이라 생각합니다. "참된 권력은 섬김이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말입니다. 특히 가난한 자, 상처받은 자, 미약한 자를 섬기는 것을 권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교황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부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다만 진정한 권력이 섬기는 데 있다는 교황의 표현은 적절했다고 봅니다. 섬기는 권력이 예수님이 행하신 권력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권력을 행하는 방식에서 예수를 닮아야 합니다. 그래야 권위가 섭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막 9:3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짓누르는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면 가장 밑으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구하기 위해 거대한 권력으로 자신을 믿지 않는 자를 때려잡지 않으셨습니다.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3년간의 공생애 결론은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미약한 자, 상처받은 자를 섬기시는 데 공생애를 사용하셨습니다. 섬기는 권력이 예수님과 기독교에게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높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교회의 권위와 권력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권력은 높은 자리에 가야 생깁니다. '섬기는 권력'은 사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어리석은 짓입니다. 부유한 자, 인정받는 자, 강한 자에게 잘하면 자연스럽게 권력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한국교회, 특히 일부 대형 교회는 섬기는 권력은커녕 자꾸만 높아지고자 합니다. '기득권'과 함께하고, 그들을 닮아가려 합니다. 한국교회는 예배당이 커지고 있습니다. 유명 인사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기독교 방송과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간증하는데, 가나안 신자는 늘어만 갑니다. '영향력을 떨치자'는 기도회와 운동이 이어지는데 교회의 권위는 점점 줄어 갑니다. 대형 교회 목사들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것은 '섬기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을뿐더러 '섬기는 권력'들과 함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으로만 보이는 '섬기는 권력'을 한국교회가 행사할 수 있도록 한번쯤 고민해 봐야 합니다.

'섬기는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이 이상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섬기는 권력'을 지금 비판받는 대형 교회 목사들이 행사하고 있다면 달라 보일 것입니다. 교회가 돈이 많은 사람, 정치적 권력이 있는 사람, 명예로운 사람 말고도 부족한 사람들을 섬긴다면 더 많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거대한 예배당 근처 하루하루 살기 팍팍한 아르바이트생, 청년들, 노인들을 돌본다고 생각해 봅시다. 분하고 서러운 사람들 곁에서 항상 함께 있어 주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면 교회는 권위를 얻을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권력과 부를 내려놓으면 더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줄 것이고, 진심을 다하는 성도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더 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권위를 부여받는 방식입니다.

교회 안부터 바뀌어야

교회 안이 바뀌어야 합니다. 교회 안의 권력이 세상과 똑같이 '남들을 복종하게 하는 능력'으로 인식된다면, 교회 '밖'으로 배출되는 권력 역시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 직분, 나이 등으로 파벌이 나뉘고, 이를 통합하고자 목회자 혹은 높은 직분자가 권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교회는 세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부에서부터 권력이 '섬기는 것'이 된다면, 교회는 그 권위를 인정받을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무시당하는 것은 교회 안팎으로 행하는 권력 방향이 세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대기업처럼 큰돈을 만져야 할 필요도, 정치판을 기웃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큰돈을 만져서 세상을 바꿀 것 같고, 정치권력을 얻어야 세상의 악행을 바로 잡을 것 같지만 그렇게 할 때 교회의 권위는 무시당합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 권력 문제로 대표적인 게 평신도, 목회자 간 문제입니다. 2015년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은 교인 900명과 목회자 100명을 대상으로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목회자 윤리 문제'가 무엇인지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이때 교인들은 목회자의 가장 큰 윤리적인 문제를 '독단적이고 권위적인 교회 운영'(37.9%)이라고 응답했습니다. 이후 '불투명한 재정 사용' 35.8%, '담임목사 대물림(세습)' 12.7%, '성 윤리'는 10.3% 순이었습니다. 이 역시 권력관계가 잘못됐을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목회자 100명의 응답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점 역시 흥미롭습니다. 목회자들 역시 '독단적이고 권위적인 교회 운영'(40%)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습니다. 가나안 신자들도 독단성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고 응답합니다. 독단적인 교회는 오히려 권위를 잃습니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
택하신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29)

이 글을 쓸 때 묵상한 고린도전서 1장 27-29절 말씀으로 글을 맺습니다. 우리가 높아지고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낮추실 것입니다. 한국 대형 교회가 권력과 돈과 어울리고자 할 때 낮추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련해 보이는 그 섬김이 교회의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미련한 것들을 택하셔서 그 능을 보여 주실 분입니다. 아무리 미약해도 하나님이 택하시면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섬기는 권력'을 보여야 합니다. 가난한 자, 미약한 자, 상처받은 자를 돌보는 권력을 교회 안팎으로 내보일 때, 권위가 설 수 있습니다. 교회 권력의 방향을 통해 권위는 달라져야 합니다. 한국교회 권위를 일으킬 가장 먼 방법 같지만, 오히려 가장 가까운 방법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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