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이 보내온 설교문입니다. <뉴스앤조이>는 민주 회복, 경제 평등, 평화통일, 생태 환경과 사순절의 의미, 대선에서의 기독인 역할 등을 담은 대선행동의 사순절 공동 설교를 2월 27일부터 4월 3일까지 매주 월요일 6주간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

종교개혁 500년과 대선이 중첩된 2017년을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성공 신화에 도취되어 예수의 삶을 잊었고 촛불 민심과도 불통했으며 예수 팔아 돈과 권력을 탐하는 한국교회 민낯을 세상도 알고 우리도 알기 때문입니다. 태극기와 십자가, 심지어 성조기까지 들고 나와 탄핵 반대 외치는 다수가 대형 교회 성도들이라 하니 시대의 징조를 왜 이렇게 역행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지금 세월호 3주기와 겹치는 금번 부활절 예배에서 세월호 참사를 일체 거론 않기로 했다는 최근 교계 보도는 기독교의 끝을 보여 줍니다. 세월호는 물론 탄핵 정국, 종교개혁 500년, 이 모든 것이 지엽, 말단적이기에 오로지 부활만을 선포하기로 했답니다. 아마도 그들에겐 교리로서의 부활, 죽음 이후의 부활만이 중요할 뿐 지금 이곳에서의 '삶 속의 부활'은 생각조차 없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다시 살지 못하면 예수의 부활도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부활 신앙이 본래 생물학적 죽음(sterben)에 대한 반대 개념이 아니라 총체적인 사회적 죽음(Tod)에 대한 저항인 것을 기억해야 옳습니다.

교회 사랑이 남달랐던 노(老)신학자 존 캅의 책 <영적 파산>을 접해 읽었습니다. 이 땅 교회들은 미국 교회를 힘써 배우려 하지만 평생 교회를 사랑하며 신학했던 노신학자의 눈에 정작 미국 교회는 '영적 파산' 상태로 보였습니다. 축복, 나아가 심리, 상담이란 이름으로 교회가 사적 개인의 문제에만 관심을 둔 채 공론의 장인 사회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상호 연결된 장(場)에서 공존하나 모래알처럼 흩어진 개인들만을 관심, 주목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파산'의 뜻을 다음 세 차원에서 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파산된 한국교회의 실상을 적실하게 표현하고 인지하기 위함입니다. 시대(역사)의 징조와 자연을 보며 하느님 깨닫기를 바랐던 예수와 그의 마음을 잊었으니 '영적 치매'이고 하느님을 교회 속에 가뒀으니 '영적 자폐'일 것이며 그 하느님 이름으로 권력, 명예, 돈을 탐했으니 '영적 방종'이라 할 것인 바, 이 셋이 '영적 파산'의 실상이자 내용입니다.

아직도 다수 대형 교회들은 이런 자화상에 아픔을 느끼기보다 불황 속 헌금 감소를 더 중시하고 있으니 누가 교회가 주는 물을 선뜻 마시려 하겠습니까? 고통하는 현장 곳곳에서 '곁'이 되고자 힘썼던 '작은 교회'들 덕에 세상은 아직도 교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순절 절기에 탄핵 정국하의 교회들은 이런 '불편한 지적질'을 인내하며 아프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종종 잊고 있으나 교회 개혁과 세상 개혁은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공존해야 옳습니다. 우리는 흔히 초대교회로 돌아갈 것을 열망합니다. 그러자면 근대의 산물인 개신교회와 중세의 가톨릭교회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것입니다. 근대 개신교가 세상 권력을 움켜쥔 중세 교회를 비판한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 권력을 능가하는 정치제도가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루터의 '두 왕국'설을 근거로 정교(政敎)분리를 선언한 개신교는 탈(脫)정치화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서 13장을 오독함으로 국가(정치) 잘못을 비판할 수 없었고 오히려 권력에 편승했습니다. 히틀러 정권 당시 그에 동조한 독일 교회들이 바로 그 역사적 실상입니다. 탄핵 반대를 지지하는 대형 교회 목사들 역시 '두 왕국'설의 신봉자로서 정교분리. 영육 분리의 희생양들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열망하는 초대교회는 매우 다양했으나 '복음의 정치학'을 공통의 과제로 여겼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 머물면서도 그와는 다른 세상을 만들고자 힘썼던 까닭입니다. 하여 그들에겐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 밖을 상상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이었고 그것으로 하늘나라를 줄곧 바랐습니다. 죽어서 가는 공간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여기서 가시(구체)화시키고자 했습니다.

성서에 언급된 하느님나라 비유들 역시 거지반 체제 밖의 이야기들입니다. 어느 때에 일하러 오든지 동일 품삯을 준 포도원 주인 이야기, 대갚음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이자는 주인의 제안, 이것이 예수의 하느님나라 비유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것은 감당키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낯선 것을 상상하여 삶 자체를 달리 만들라는 것이 바로 '복음의 정치학'이었습니다.

겨자씨의 빠른 성장으로 주변이 감내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해 지듯이 기존 체제를 흔들어 그를 힘겹게 만들라고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초대교회로의 열망은 기존 체제를 향한 '불편한 지적질'과 맥을 같이합니다. 아마도 예언자란 불편한 지적질에 능한 사람일 것이고 그것을 고상하게 사회적 영성이라 일컬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국격(國格)이 무너지고 '헬조선'이 되는 현실에서 촛불 민심에 반(反)하는 교회 꼴이 우습고 비참합니다.

탄생한 예수를 품에 안고서 늙은 현자 시므온은 아주 감격해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로할 자가 태어났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보며 하느님께 주님의 구원을 보았다고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어머니인 마리아를 향해 험한 말을 쏟아 놓았습니다. 이 아이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비방받는 표증'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앞서 말한 이스라엘 구원자란 기대와 '비방받는 표증'이란 말이 상호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진 마지막 글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 마음을 칼로 찌르듯 아프게 해서 그들 숨은 생각들을 노출시키고 그 공간을 전혀 다른 생각으로 채울 것이라 한 것입니다.

민족의 구원을 갈망했던 노(老)현자는 예수의 삶을 정말 옳게 예견했습니다. 예수가 세상의 걸림돌이 될 것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자기 인생을 복되다 여기며 불렀던 찬가의 내용과도 맥이 같습니다. "제왕들을 권자에서 끌어내리고 비천한 자를 높였다. 주린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부한 사람을 빈손 되게 했다." 한마디로 예수의 3년 공생애는 시대를 향한 '불편한 지적질'로 점철될 것이란 예언이었습니다. 예수야말로 '불편한 지적질'을 자기 사명으로 여길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전 안팎의 구분을 폐했고 안식일과 일상의 구별을 없이 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의 간격을 소멸했으니 그는 비방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대접받지 못한 당대의 흙수저, 무(無)수저(암하레츠)들을 하느님 아들이라 불렀기에 정치, 종교적 기득권자들이 그를 불편해했고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품고 보았기에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달리 만들겠다는 예수의 자기 선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할 때마다 사람들 마음이 크게 아팠습니다. 그들 속 허망한 욕심, 알량한 기득권을 노출시켰기 때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향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했으니 누가 감히 돌을 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에 그는 '비방받은 표증'이었고 급기야 하느님나라 열정 탓에 그들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예수를 볼 때 우리들 무사안일함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예수가 꿈꾼 세상에 둔감한 채 오히려 그 이름을 헛되이 부르며 자기 살길만 찾는 까닭입니다.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세상을 향한 '불편한 지적질'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음을 사순절 절기가 일깨웁니다. '헬조선'을 만든 위정자들에 대해, 박근혜-최순실 농단으로 국격이 상실된 이 나라를 향해 맘껏 지적질을 하라 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불편한 지적질'이야말로 체제 밖 사유에서 비롯한 사회적 영성의 실상인 탓입니다.

이제 이 민족을 위한 하느님 구원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탄핵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대선을 향한 발걸음이 분주해 졌습니다. 새로운 기준으로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할 절대적 책무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앞선 두 차례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우리 교회는 큰 잘못과 실수를 범했습니다. 대형 교회들은 장로 대통령 만들고자 선동했고 자신들 기득권을 지키려 박근혜 현 정권을 탄생시켰던 까닭입니다. 이것 자체가 한국교회가 자초한 영적 파산의 실상이라 할 것입니다. 지난 10년간 이들의 행악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4대강 사업과 자원 외교를 통해 엄청난 빛을 남겼고 대한민국을 절망의 나락에 빠트렸던 것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상대로 사익을 추구한 흔적들이 도처에서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정신 못 차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종북·좌빨 이념을 부추기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허언(虛言)과 망언이 지속되니 제대로 된 지적질이 더없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혹독하게 비방받을지라도 예수 제자인 우리는 시대를 위해, 민족의 앞날을 위해 예수처럼 비방받는 자의 표증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민족을 구하는 길로서 2017년 기독교인들이 사는 방식이자 살아야 될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불편한 지적질'은 대선 후보자들을 향해서도 멈출 수 없습니다. 국격을 회복하고 '헬조선'을 치유할 수 있는 머슴을 찾기 위해 백번 죽고 천 번 고통하는(白死千難) 수고를 감당하십시다. 후보자들의 정책을 성서적 시각에서 묻고 또 물어 그들 숨은 생각을 만천하에 드러내십시다. 3·1 독립선언서가 말하듯 도의(道義), 곧 정의의 시대를 열어젖혀 정권 교체 이상의 국민주권 시대를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책무는 사순절을 맞는 기독인이 가져야 할 사회적 영성입니다. 더 이상 상전을 부러워 말고 노예처럼 살지도 맙시다. 권력자들, 법조인, 정치가들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였는지 여실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국민주권, 신앙 주권의 힘으로 사악한 정치가, 종교인들을 추려 냅시다. 기름진 성직자들의 감언이설에 결코 속지도 마십시다. '비방받는 표증'으로서의 예수 삶에 근거하여 정직하게 움직이는 만큼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 부활 없이 예수의 부활도 없다는 성서의 본뜻일 수도 있겠습니다. 엠마오 도상에서 방향을 바꾼 제자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달라졌으며 예수 부활이 확연해졌던 것을 기억하십시다. 전혀 다른 세상, 체제 밖을 향한 꿈을 꾸면서 교회와 사회를 향해 우리들의 '불편한 지적질'을 멈추지 맙시다. 기독교 신앙을 개인적 취향으로 삼지 말고 민족에게 위로와 구원을 선사할 힘이라 여깁시다.

정치 개혁과 종교 개혁을 함께 이루라는 하늘의 뜻이 2017년 대선을 앞둔 이 땅의 기독교인들에게 강력하게 임재하고 있습니다. 2017년 사순절 절기에 민족의 앞날을 위해 기꺼이 비방받는 존재가 될 것을 결단하십시다. 우리들 불편한 지적질이 이 땅을 구원이 땅으로 만들 것이기에 말입니다.

사랑의 하느님, 이 민족에게 구원의 때가 이르게 하옵소서.
종교개혁 500년을 맞아 한국 교회가 이 땅 백성들을 향해 큰 선물을 베풀게 하옵소서.
신앙 양심으로 큰 눈 부릅떠 올바른 지도자를 찾게 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행동한 만큼 세상이 달라질 것을 믿으며 탄핵 정국에서 우리들 할 일을 찾게 하소서.
개인으로 머물게 마옵시고 시대를 향한 옳고 바른 말을 토하며 예수 길을 가게 하옵소서.
하느님나라를 위해 기꺼이 '비방받는 표증'이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정배 / 전 감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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