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주교, 사제, 수도사를 영적 신분이라고 부르고, 제후, 군주, 수공업자와 농부를 세속 신분이라고 사람들이 부르지만, 이것은 매우 교묘한 고안품이요 거짓일 뿐입니다. 아무도 마음 졸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 신분이며, 직분을 제외하고는 차이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1520년 루터가 쓴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일부다. 루터는 이 글에서 만인제사장론을 주장했다. 교황, 사제뿐 아니라 제후, 수공업자, 농부도 영적 신분에 속해, 기독교인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없다는 내용이다.

바른교회아카데미(이장호 원장)는 2월 13일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2017 한국교회 개혁 과제'를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 첫 번째로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을 다뤘다. 김판임 교수(세종대), 홍지훈 교수(호남신대),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가 각각 성서학자, 종교개혁학자, 목회자 입장에서 만인제사장론을 소개했다.

김판임 교수는 만인제사장론이 전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모든 기독교인은
동일한 영적 신분

김판임 교수는 '루터의 만인제사장론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발제했다. 그는 마르틴 루터가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에서, 개혁을 가로막는 로마교황청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만인제사장론을 꺼냈다고 설명했다.

루터는 로마교회의 문제점을 세 벽으로 표현했다. 첫째,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해 사제 계급을 일방적으로 우위에 두는 것. 둘째, 교황이 참된 성서 해석을 최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교리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 셋째, 오직 교황만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고 공의회 결정은 교황을 통해서만 할 수 있게 한 것.

루터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동일한 영적 신분임을 강조했다. 성서 해석 독점권도 교황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성령의 가르침으로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또 교황뿐 아니라 평신도도 교회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있다고 했다.

김판임 교수는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을 바탕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필요한 몇 가지 개혁안을 제시했다. 하나는, 죄를 저지른 목회자를 치리하는 문제다. 김 교수는 교회 안에 목회자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람 목회자에게 대항했다가는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도 돈다고 전했다. 목회자가 부패하는 이유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김 교수는 목회자라도 성범죄나 교회 재정 횡령 등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면 이를 덮지 말고 제대로 밝혀 징계해야 한다고 했다.

다음은 평신도 교육이다. 김 교수는 일부 목사가 성경을 왜곡해 교인을 위협하거나 잘못된 내용을 설교한다고 지적했다. 평신도들이 이에 넘어가지 않도록 전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끝으로 교회 안의 권력이 소수에게만 집중된 구조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날 교회 남성 장로로만 당회를 구성하고 있다. 김 교수는 장로뿐 아니라 집사, 권사 등 다양한 구성원을 당회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다.

김판임 교수는 만인제사장론이 전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독일 영주, 귀족들을 개혁 주체로 삼아 교황청에 맞서게 하려고 만인제사장론을 꺼냈다는 주장이다. 목사를 두지 않는 평신도 교회는 만인제사장론을 오해해서 나온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루터에게는 사제직을 없애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홍지훈 교수는 루터의 3대 논문과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통해 만인제사장론을 설명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개신교 목사는 전문직 종교인"

홍지훈 교수는 '마르틴 루터와 칼뱅의 만인제사장론'을 주제로 발표했다. 루터의 논문을 바탕으로 만인제사장론이 지닌 의미를 설명했다. 칼뱅의 만인제사장론은 <기독교강요> 최종판 4권에 서술된 교회 직제 부분을 근거로 댔다.

홍지훈 교수는 루터가 1520년 7월에 발표한 <신약성경에 있는 거룩한 미사에 대한 논고>에서 만인제사장론이 처음 등장했다고 말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각각의 사람은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사제들이다"고 서술했다.

한 달 뒤 루터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를 썼다. 이 책에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몸과 지체를 인용하며, 모든 기독교인은 동일한 영적 신분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홍 교수에 따르면, 루터는 논문에서 사제, 제후, 일반 교인들에게는 신분의 차이가 없고 단지 직무의 차이만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는 만인제사장론이 더 명확히 드러난다. 루터는 논문에서 모든 사람이 사제라는 말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사제(Priester)와 평신도(Laien)의 차별을 거부하고, '모두 사제'(alle Priester)라고 서술했다.

<목회직에 대하여>에서 루터는 사제직(sacerdos)의 역할을 설명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것 2) 성례전을 집전하는 것 3) 매고 푸는 권세 4)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 5)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 6) 교리와 영들에 대해 판단하는 것 등이다. 루터는 이 역할이 그리스도의 권위로 모든 기독교인에게 주어졌다고 했다.

홍 교수는 칼뱅이 루터의 만인제사장론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칼뱅이 직접 만인제사장론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의 저서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홍 교수는 칼뱅이 목회직의 효용을 다루면서 그 직분의 위임을 과장하거나 무시하는 양극단을 경계했다고 했다. 목회직이 기능적인 면에서 하나님께 위임받았지만, 그렇다고 목회자의 권위를 내세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칼뱅의 목사직 이해를 다룬 한 신학자의 글을 소개했다. "개신교 목사는 성직자라는 명칭보다 전문적인 훈련과 엄격한 인증 과정을 통해 교회 사역을 담당하게 된 전문직 종교인으로 보아야 한다."

지형은 목사는 한국교회 가장 큰 병폐가 권위주의라고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한국교회 큰 병폐,
목사·장로의 권위주의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는 '만인제사장론과 21세기의 목회 상황'을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한국교회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지적했다.

지 목사는 한국교회 가장 큰 병폐가 목사·장로의 권위주의라고 비판했다. 이들이 교회 건물·재정·교인의 규모, 교계에서 맡은 직책을 벼슬이나 권력처럼 여긴다고 했다. 이런 모습은 예수 가르침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세속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비판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라고 했다(눅 22:26). 지 목사는 예수가 강조한 '섬기다(디아코니아)'가 '노예'와 연관된 말이라고 했다. 이를 오늘날에 적용하면 총회장, 지방회장, 노회장을 '총회종', '지방회종', '노회종'으로 바꿔 부를 수 있다고 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인을 한 몸으로 표현했다. 지 목사는 바울이 교회 안 직분을 계급, 권력으로 인식하는 것을 책망했다고 했다. 교회도 여러 지체가 서로 연결되어 한 몸을 구성하는 것처럼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지 목사는 권위주의에 빠진 교회는 왜곡된 선교를 한다고 했다. "선교라는 이름은 있지만 개교회 선전에 불과하다. 복음을 전파하는 게 아니다. 특정한 목회자나 어떤 사람의 업적이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게 아니다. 사회에서 교회라고 불리는 집단이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지 하나님나라가 작동하도록 섬기는 게 아니다. 그로 인해 기독교 자체가 안티 기독교가 된다"고 말했다.

지 목사는 교회가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동체는 인격적인 사귐으로 서로 일상을 나누며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지 목사는 만인제사장이란, 모든 교인이 서로 사랑하며 함께하는 공감 공동체라고 했다. 이 가치를 회복하지 않으면 한국교회 미래는 암울하다고 말했다.

세 발제자는 한국교회가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을 교회 안에 실제로 적용시켜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바른교회아카데미는 이번 세미나에서 세 개 발제 주제를 마련했다. 첫 번째가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이었다면, 다음은 '교회 정치 제도와 직제'다. 마지막 주제는 '교회의 사회적 신뢰 회복'이다. 두 번째 시간에서는 박경수 교수(장신대), 박원호 목사(주님의교회), 이국운 교수(한동대)가 발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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