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거의 30년 만에 죽마고우를 만났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다른 친구에게서 듣고 저에게 연락을 하였습니다. 만나 보니 지난 세월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서로에 대해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까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새삼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검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감이 날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리거나 계산할 필요 없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친구로 다시 제게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남은 벽이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교회입니다.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찾아온 친구와 교회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금기입니다. 그 친구는 오래도록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해 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의 전통에 속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교회에 대해 말하지 말 것, 특히 목사와 관련해서는 말하지 말 것, 어느 선 이상을 넘어서면 멈출 것, 이런 내용들이 친구가 자신의 교회로부터 받아 온 훈련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가급적 교회와 관련된 잘못된 일들을 말하지 않도록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말을 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유치한 생각을 주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이 무당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그들은 다시 개인의 신앙에 유익이 없거나. 신앙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굳이 그런 말을 해서 신앙을 해칠 필요가 없다는 말로 자신들의 의도를 각색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교인들은 여간해서는 규모나 치적과 같은 피상적인 자랑 이외에는 결코 교회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고, 한 번 선택한 교회를 바꾸지 않는 것이 신앙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심어 놓았습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일은 교회를 배신하는 것으로 여기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교인들은 누구나 자기 교회를 절대로 떠나지 않는 것이 바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통해 그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르심의 두 요소

'떠나라'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부르심은 '떠나라'와 '가라'입니다. 이처럼 부르심의 요소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떠나라'에 대해 살펴보면, 하나님의 그 떠남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구별해서 지적하십니다. 떠나는 것들의 순서는 덜 친밀한 것에서 매우 친밀한 것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희생이 덜한 것에서 더한 순서로 떠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 떠남의 의미를 랍비 수스아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고향, 네가 스스로 얽어맨 것에서 떠나라.
그리고 네 친척, 네 어미가 너를 얽어맨 것에서 떠나라.
그런 다음 아비 집, 네 아버지가 너를 얽어맨 것에서 떠나라.
그런 연후에라야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갈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에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목숨을 내건 행위였습니다. 씨족이 한 고향에서 살면서 서로를 보호하고 서로의 재산을 지켜 주었는데 방패막이이며 성벽과 다름없던 그것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모든 안전을 포기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떠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가라'

부르심의 두 번째 요소는 "가라"입니다. 하란 땅에 주저앉아 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떠나게 되었을 때 가나안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곧바로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 그랬듯이 하나님은 이번에도 목적지를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만 지시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지시에도 어떤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목적지를 알 수 없었기에 아브라함은 여기저기 방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랑은 사실 방랑이 아니었습니다. "순례자는 길을 가지만 집을 떠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방랑하고 있었지만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지시하에 있었기에 목표 없이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순례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지를 알려 주시지 않은 것은 아브라함이 어떤 길을 가든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실 것이며 그의 앞길을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온 존재를 하나님께 내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어디로 인도되는지 모르지만 인도하시는 그분을 신뢰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위험이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기에 어디로 이끄시든 그분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의 목적지

부르심의 두 요소를 통해 우리는 '믿음의 여정'의 특성을 발견합니다. 떠나는 것은 우리가 속해 있고,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여정이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의 여정은 과거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으로의 진입입니다.

에덴을 떠나 성을 쌓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던 가인의 후예들인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쌓았던 성을 이제 다시 스스로 허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려면 반드시 그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사실은 믿음의 여정이 가지는 기본적인 요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두 벌 옷도, 여분의 신발도, 최소한의 보호 도구였던 지팡이마저도 버리고 떠나야 했습니다. 믿음의 여정에 들어서려면, 하나님이라는 보이지 않는 '불성곽'에 의지한다는 것을 의지적으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여정에 들어서야 합니다. 무방비 상태로 목적지를 모른 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익숙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복되는 떠남과 감을 통해 점차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실낙원 이후 분리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외로움과 두려움, 믿음에 대한 회의와 혼돈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법을 배워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임을 깨닫고, 늘 함께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그분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여정의 성패 여부가 바로 이 철저한 의존에 달려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목적지가 장소가 아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 움직일 때 우리는 이미 목적지인 그분과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타성에서 벗어나기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떠남과 머묾의 반복이었습니다. 그가 과거의 타성을 완전히 벗어나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까지 그것은 계속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할 때까지 그가 머물고 싶은 곳이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머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머물게 하신 가나안에 이르러서도 그의 여정은 계속되었습니다. 최종 목적지인 하나님께 도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타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의 의미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줌파 라히리는 벵골 출신 런던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축복받은 집>,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그저 좋은 사람> 등의 작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그는 자기가 글을 쓰는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존재의 신비를 탐구하고, 자기 자신을 견뎌내고, 자기 밖에 있는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함이 그것입니다. 영어는 그런 글쓰기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지만 너무나 익숙하기에 가끔은 그를 타성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줌파 라히리는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다른 언어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탈리아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어휘와 용례를 하나하나 익혀 나가는 과정을 통해 그는 살아 있음의 희열을 느낍니다. 이탈리아어는 그에게 완벽함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불완전할 자유를 주었던 것입니다.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를 익히고 그 낯선 언어로 글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라는 책 속에 담아냈습니다.

그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거기에 빠져드는 것을 호수를 건너는 일에 빗대 설명합니다. 호수 가장자리만 빙빙 돌며 헤엄을 치면 결코 건너편에 당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명대 없이 기슭을 떠나 호수를 가로지르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심연은 더욱 큰 공포가 되어 우리 삶을 잡아당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줌파 라히리는 익숙한 언어를 잠시 떠나 낯선 언어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았기에 언어 선택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사물과 세상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낯선 언어,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투성 속에 갇히기 쉬운 삶을 긴장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의 여정이 떠나서 가는 것이라는 사실의 근본적인 의미는 그 길에 들어선 사람이 끊임없이 타성에서 벗어나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타성에 젖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계속해서 머물던 곳을 떠나, 감으로써 배우고 성숙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은 바람처럼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성령에 이끌림을 따라가는 정해지지 않은 계속되는 순례의 여정이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을 환대의 공간으로 바꾸고, 타성에 젖은 생각이나 입장, 자기를 세상에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버릇에서 탈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떠나는 교회

그런데 그런 믿음의 여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절대로 떠나지 말아야 하는 곳으로 교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장소가 교회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믿음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교회는 머물다 떠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교인들은 믿음에 관한 여러 잘못된 타성에 젖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교회에 정착함으로 말미암아 그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타성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배우지도 못하고, 영적인 성숙도 이루지 못하고, 무엇보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과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믿음의 여정을 계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남으로 그동안 자신에게 익숙했던 것들, 그동안 자신이 쌓아 놓은 것들을 버리고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타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더 깊은 주님과의 교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믿음의 여정은 떠나는 것입니다. 반드시 떠나서 가야 하는 여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나안 성도들의 출현은 성령의 역사이고, 가나안 성도들 개인에게는 새로운 은혜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낯선 언어를 익히는 것과 같은 인내와 노력을 경주해 나갈 때 성령의 새바람이 불어오고 교회는 쇄신될 것입니다. 물론 가나안 성도 개인들에게는 믿음의 여정을 계속하게 됨으로 얻는 영적 유익이 더해질 것입니다.

최태선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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