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막 10:45)

예수님은 섬기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냥 봉사하고 도움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좇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섬김은 당위이며 동시에 의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자신들이 섬기고 있다고 믿고 있고, 자신들이 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홍수에 마실 물 없다는 말처럼, 섬김이라는 단어가 난무하지만 정작 섬김을 경험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섬김이라는 단어가 김일성 일가가 명절에 하사하는 쌀이나 고기처럼 선전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군림하고 지배하면서 말로만 섬기기 때문에 섬김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를 왜곡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섬긴다는 말을 하면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선심 쓰듯 던져 주는 물건이나 친절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여러 기독교의 비극 중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목표는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섬김이란 타인이 나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느냐에 그 진정성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여하히 타인이 나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느냐가 섬김의 바로미터란 말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섬긴다고 말하지만 섬김을 받는 사람이 섬김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이처럼 섬김을 시혜로 생각하며 높은 자의 위치에 서려 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정말 그 섬김을 원하는지가 참된 섬김의 시금석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큰 용기와 신뢰로 바친 섬김이 막상 상대방에게는 섬김이 아니라 차별과 불평등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참된 섬김은 내가 섬긴다는 의식조차 없어야 합니다. 내가 섬긴다는 생각을 가지고 섬김의 영광이 나에게 돌아오기를 바랄 때 그 섬김은 순수성을 잃고 결과적으로는 또 다른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이 높은 사람이 이렇게 몸을 굽혀 섬기고 있다는 생각으로 하거나, 그런 자신의 섬김을 남에게 보이려는 의식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한 그 행위가 무엇이든 그것은 이미 섬김이 아닙니다. 도움을 베풀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움이 도움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그 도움은 도움이야 되겠지만 섬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섬김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

저는 예수님의 메시지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것은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과 동급 위치에 놓았을 뿐 아니라 그 둘을 동일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마 21:37-39). 예수님에게 있어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똑같은 중요성을 가집니다. 그런데 성서를 보면 다른 모든 것은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 우선순위에 있어 가장 앞서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에 있어서는 그 순위가 무시되고 순서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 본회퍼의 말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직도 교회가 필요한가?'라고 자문하지만, 이 물음은 틀렸다고 했다. 본회퍼는 우리가 질문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교회도 존재하고 하나님도 존재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그러니 그분께 기꺼이 도움을 드리겠느냐?'는 질문을 받는 존재라고 했다." (에릭 메택시스, <디트리히 본회퍼>, 포이에마, 193~194쪽)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단순히 그리스도인 자신의 섬김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일이고, 그것은 인간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돕는 것입니다. 섬김은 단순히 타인을 돕는 것이 하니라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다른 모든 것에 적용되는 우선순위가 적용되지 않고 그 둘이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더욱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섬김이 어려운 이유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가 마지막날 지옥에 떨어진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 품에 안긴 것 역시 그가 단순히 가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와 가난은 인간의 존재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부한 사람이 교만한 것이 아니라 부와 교만이 존재로 엮여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겸손한 것이 아니라 가난과 겸손이 존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사로는 물질로도 가난했지만 마음으로도 가난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지만 부자는 그런 나사로를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호화로운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거지 나사로가 자신의 식탁 밑에서 떨어진 음식을 먹도록 허용한 것을 큰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여기며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부를 자신의 능력으로 여기며 한껏 호화로운 삶을 즐겼습니다. 자신의 부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할 수 없는 마음이 그를 지옥에 떨어지게 한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부와 동일시한 결과입니다.

부자이면서도 가난한 자가 되신 예수님은 가난의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은 수사적인 과장법이나 단순한 역설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존재과 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가난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참된 섬김이 어려운 것은 가난해지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자는 아무리 스스로 자신을 낮춘다고 하여도 실상은 자신을 낮추는 만큼 더 높아지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깊이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설립한 사랑의 수녀회에 다른 모든 가톨릭 수도회가 하는 세 가지 서약인 순명, 정결, 청빈에 가장 가난한 자가 되어 가난한 자를 섬기겠다는 한 가지 서약을 더했습니다. 참되게 섬기려면 스스로 가장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와 가난이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임을 그녀는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

따라서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는 사람,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남을 위해 상대의 처지가 되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처럼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곧 성숙이며 동시에 참된 섬김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 5:4-5)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통해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합니다. 그리고 인내는 그 사람의 인격이 됩니다. 그 인격이 단련되어 마침내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참된 섬김은 바로 그렇게 희망이 된 사람이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어떤 당위나 의지에서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발로가 곧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과 섬김

그리스도인의 성숙의 과정에서 가난은 그 첫 관문이며, 배경이며, 최종 결과물입니다. 가난과 섬김은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섬김을 말하면서도 참된 섬김을 알지도 실천하지도 못하는 것은 한사코 가난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는 사람만이 섬길 수 있고, 주님의 길을 좇을 수 있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길이 가난이라는 이 사실은 다른 모든 성서의 진리처럼 역설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이 역설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진리의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가난은 곧 세파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가난은 두렵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자녀들의 가난은 더더욱 두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가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했던 모든 것들은 허상이 되어 사라집니다. 새로운 삶이 열리고 우리의 모든 삶은 섬김이라는 이전의 삶과는 다른 방식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 가운데서 찬양이 되시고 영광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곧 창조의 완성이며 진정한 화해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그 섬김은, 이 세상의 방식인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부패를 방지하고, 희망을 주는 소금과 빛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부족한 우리를 택하셔서 당신의 손과 발이 되게 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가난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이 일에 꼭 참여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모든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섬김과 마찬가지로 어느 것도 간단하고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너무도 경박하고 진중하지 못한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무시하고, 다른 종교를 폄하하고, 자연 훼손에 압장서는 폭력적인 일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진리란 진리가 가지는 속성 그대로 다가서면 사라지거나 멀어지는 신기루와 같은 특성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할수록 자기 부족을 깨달아 알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그렇게 자기 부족을 깨달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잘못을 지적하고 격려하면서 성령의 이끎과 보호 속에서 불가능한 복음의 삶을 끝까지 살아야 하는 나라입니다.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로 실패와 좌절을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 가는 그 길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최태선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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