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C. 블룸 <For A Church to come>(헤럴드프레스, 2013년 3월 출간)

2년 전에 책을 하나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피터 C. 블룸의 <For A Church to come>이라는 책입니다. 철학, 사회학, 신학이 한데 어우러진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칸트, 니체를 지나 포스트모더니스트 철학자들이 망라되었고, 특히 레비나스와 데리다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책 제목에  붙어 있는 'to come'이라는 형용사구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막상 번역을 하려니 마땅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최종 편집을 끝냈지만 아직도 제목을 정하지 못하고 출판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어려운 철학 용어들과 신조어들을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제가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좋은 책은 지평을 넓혀 주기 마련입니다. 이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평을 넓혀 준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새로운 관점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것을 불가능과 가능의 역설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서를 새로운 의미로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각을 제게 제공해 주었고, 그동안 오래도록 품어 왔던 몇 가지 문제들도 해결해 주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 철학자들과의 만남

무엇보다 포스트모더니스트 철학자들과의 만남 자체가 은총이었습니다. 그들의 글을 보면서 그들의 사유가 얼마나 깊고, 생각의 갈래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물론 '탈구축'이니 '해체'니 하는 말들 자체가 난해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단순히 지평이 넓어졌다는 표현으로는 담아 낼 수 없을 정도로 신세계에 다다랐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동안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에 대해 얼마나 피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진리의 해체나 진리의 터 자체가 사라진 것으로 여겼던 이전의 이해가 얼마나 유치한 것이었는지를 절감하였습니다. 예전에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아케다)을 해석하는 방식이 2만 가지가 넘고 지금도 다른 해석의 방식이 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이들 포스트모더니스트 철학자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레 짐작을 하거나 아는 척하는 저의 경솔한 오만함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고, 진리에 대한 그들의 진지함에 감동을 받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데리다의 종교 이해

데리다 역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크 데리다를 '무신론자'라고 간주하곤 하지만, 데리다는 사실상 현대 종교 연구에서 중요한 철학자 중의 한 명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서두에 말한 'to come'에 대한 기원이랄까, 이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데리다는 종교가 그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약속'을 담아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세계'란 '불가능성의 세계'이며 언제나 '다가오는 세계(world-to-come)'입니다. 이렇게 '다가오는(to come)' 혹은 '도래하는'이란 말의 의미는 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결코 도래하지 않는 불가능성의 세계이지만 그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열정을 부여잡는 것이 바로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리다에게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passion for the impossible)'입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 반전과 역설이 존재합니다. 도대체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 열정을 가질 이유가 무엇인지를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무조건적인 사랑, 용서, 환대, 우정이나 절대적인 정의 등은 인간이 인간인 이상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서 실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실현 가능한 세계에만 안주할 때, 종교는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능한 것을 지향한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능성의 세계 너머에 대한 희망과 갈망을 가지고, 그 불가능성의 축을 지속적인 '참고서'로 맞아들일 때 비로소 종교는 그 존재 의미를 확보하게 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약속의 미래를 간직함으로 우리는 이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무조건적인 사랑, 용서, 환대, 우정이나 절대적 정의와 같은 것들을 현실 세계에서 실천해 나갈 수 있고 그 실천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 환대할 수 없는 이를 환대하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사실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구현할 수 있는 방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리다에게 '오직 가능한 개념이란 불가능한 개념(the only possible concept worthy of the name is impossible concept)'이라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이지만 이곳이 바로 데리다에게는 종교적 가치의 심오한 의미가 비로소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실험으로서의 신앙

피터 C. 블룸은 자신의 책 <For A Church to come>에서 데리다의 종교 이해를 차용하여 불가능이 오히려 가능함임을 역설하며 개인에게 주어진 신앙의 기회가 일종의 실험(Experiment)임을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기회가 실험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책임과 복음의 불가능성을 결합하는 절묘한 신앙 이해입니다.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에 반응하는 인간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연결해 줍니다. 어떤 사람은 보다 큰 사랑으로 반응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적은 사랑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 주어진 실험의 기회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며 동시에 책임지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노력도 그대로 땅에 떨어져 사라지는 것이 없게 되는 이 이해는 참으로 귀한 절묘한 신앙 이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이 믿음이냐 행위냐를 가를 필요가 없어집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에게 항상 최선의 노력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더 깊이 깨달아 알 뿐입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성취도 자기 의도 자리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불가능이란 벽 앞에서 좌절할 필요도 없고, 교만해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실험의 기회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수 있고 그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의 실험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이라는 데리다의 말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의 의미와 상통하는 순간이었고, 그것을 실험이라는 말로 표현한 불룸과 교감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불가능과 산상수훈

거기에 더해 또 다른 귀중한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제게 산상수훈은 언제나 난감한 숙제였습니다. 언젠가는 성령의 능력으로 산상수훈을 살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은 늘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럴수록 자신을 채찍질하며 노력해 보았지만 개인으로서의 그런 노력들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온전하라"는 불가능한 말씀 앞에서 부질없는 또 다른 종교적 욕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산상수훈을 이해하는 96가지 해석을 배웠지만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이라는 종교 이해와 ' to come'이라는 형용사구가 그 모든 고민을 일시에 해소해 주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통치 강령인 산상수훈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성령 공동체를 이루어 성령에 이끌린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영원한 지향점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이끄심이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그 지향점에 무한히 수렴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접할 수 없는 불가능이었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어떠한 성취와 업적에도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는 영적 항생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불가능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민하고 나름대로 노력하였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성인들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불가능한 일들은 성인들이나 할 수 있는 일로 치부함으로써 자신이 처하게 되는 모순이나 부족한  현실을 애써 회피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많은 방식은 죽음 이후나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미루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불가능성을 미래에 가능한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들은 치열하게 살아야 할 현재의 신앙생활을 회피할 구실을 제공해 주었고, 기독교를 피상적인 종교로 만들거나 피안의 세계 너머로 밀어 내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현실에 무력한 종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데리다는 다시 우리에게 귀한 통찰을 제공해 줍니다.

"종교란 책임성이다"

데리다는 "종교란 책임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다(religion is responsibility or it is nothing)"라고 종교를 규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데리다에게 무책임함은 악마적인 것(the demonic)입니다. 그는 종교는 타자들의 부름에 반응하거나 응답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책임성이라고 말합니다.

타자들에 대한 책임성은 사실 예수의 종교 이해에서도 그 핵심을 이룹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특히 최후의심판에 대한 예수의 비유(마태복음 25장)는 철저히 나와 타자의 관계가 책임성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금 내가 속한 사회의 지극히 작은 자들인, 가난한 자. 굶주린 자, 헐벗은 자, 옥에 갇힌 자, 낯선 자, 병자, 고통당하는 자에 대한 연민과 책임성의 실천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책임성을 실천해야 할 이런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책임을 실천하려면 정의에 대해 민감해야 하며,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해야 하며, 다른 이에 대한 복합적 의미의 환대에 관해서도 깊이 고민하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이와 연관된 질문들을 던지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 없이 무신론자로 치부하던 한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게서 진리의 깊은 세계를 엿보게 된다는 것 역시 또 다른 역설이었습니다. <For A Church to come>이라는 책의 제목을 '영원히 미완성인 교회를 향하여'라고 붙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저의 교회와 복음에 대한 열정을 불태워 보려 합니다.

최태선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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