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세월호 이야기를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 가족들이 정치 세력과 결탁했다는 유언비어를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더 많은 평범한 사람은 세월호를 떠올리는 것 자체를 고통스러워한다. 내 삶 살기도 힘든데 세월호를 생각하면 더 슬프고 우울해진다. 그때 충분히 슬퍼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그런 이유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슬픔을 넘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한두 번 하던 일이 수십, 수백 번이 되었다. 안산에서, 광화문에서, 아니면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1년 넘게 꾸준히 일해 왔다. 처음에는 세월호가 정치적 이슈라고 치부했던 주변 사람들도, 세월호를 우울하게만 바라보던 사람들도, 그 사람들을 통해 세월호를 다시 보게 된다.

세월호 참사를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집사님'들이 모였다. 광화문광장 서명대에서 활동하는 조미선 집사(52), 천막카페에서 봉사하는 김장미 집사(35), 안산 합동 분향소 목요 기도회를 돕고 있는 조선재 집사(45), 항상 세월호 피켓을 목에 걸고 다니는 남기업 집사(47). 원래 사회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다. 이들 중에는 오히려 보수적인 교회에서, 교회만 알고 살던 사람도 있다. 그들은 지금도 교회 안과 밖에서 느끼는 온도 차를 극복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들과 3월 31일 서울 청파동 <뉴스앤조이> 사무실에서 좌담을 열었다. 항상 세월호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라 얘기가 우수수 쏟아졌다. 전체적으로 유쾌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지만, 희생된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이들이 어떻게 세월호와 함께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어 보자.

▲ 지난 신학생 좌담회에 이어, 이번에는 집사님들이 모였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

- 지금 세월호와 관련해서 하시는 일이 뭔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소개해 주세요.

조미선 / 처음에는 광화문 서명지기로 시작했어요. 요즘은 일주일에 하루 이틀만 나가지만, 2014년 8월부터 1주기 때까지는 거의 매일 나갔어요. 제 직업이 비정규직 영어 강사인데, 서명지기는 정규직 수준으로 했어요. 영어 강사이다 보니 광화문에 관광 온 외국인들에게 세월호 참사에 대해 설명하고 서명을 많이 받았죠.

1주기 집회가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그때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심했거든요. 저는 집회 맨 앞에서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있었어요. 시위도 처음 해 봐서 얼굴도 안 가리고 갔더니 언론에 얼굴이 많이 나가더라고요. 아이들이 집에서 전화 올 정도로요. 그 이후로 투사가 돼서 최전선에 서 있어요. (웃음)

김장미 / 이 언니 그때 TV에 많이 나왔어요. 기사에 자료 화면 꼭 넣어 주세요. (웃음)

▲ 그래서 찾았다. 빨간 원이 조미선 집사다. (사진 제공 길바닥저널리스트) 

조미선 /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얼마 안 돼서, 유가족 어머니 중 한 분이 방송에서 얘기하신 걸 들었어요. "내 아이가 죽은 게 내가 이 사회에 무관심했던 것 때문인 거 같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무너질 때 나는 아무 관심도 갖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시위든 봉사든 뭐든지 좀 해 달라." 그게 머릿속에 계속 남았어요.

거기에 신앙적인 마음이 있었죠. 저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소속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전통 있는 순복음 교회죠. 제가 교회 선교국에 5년 있었어요. 거기서 배운 대로 그 땅을 밟고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팽목항에 내려간 거예요. 저는 50 평생 어떤 사회적인 일에 관여해 본 적이 없었어요. 민주화운동 때 데모도 안 했어요. 시위는 못하지만 봉사는 해야겠다는 마음이었죠.

▲ 조미선 집사는 영어 강사다. 세월호 봉사를 일보다 더 열심히 했다. 기하성(순복음) 소속 교회에 다닌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참사 31일째 내려갔어요. 검안소에서 봉사하게 됐는데, 그때 한 달 만에 아이가 올라온 거예요. 소식을 듣고 맨 처음 검안소에 온 사람은 여자 스님이었어요. 그분은 거기서 가족들과 숙식하면서 지내고 계셨어요. 아이가 올라오면 꼭 기도를 해 준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거기서 1박 2일 봉사하면서 만난 분들은 스님 아니면 가톨릭 신자였어요. 가톨릭 장례지도사들도 거기 계속 머물러 있었거든요. 여러 언론사가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거절했어요. 혹시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갈까 봐.

시신을 건지고 팽목항까지 오는 데 1시간 정도 걸려요. 그 사이에 그 아이의 엄마와 얘기할 수 있었어요. 그 엄마도 교회 집사님이시더라고요. 여기에 계시는 한 달 동안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어봤어요.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팽목항에 각 종교 천막이 다 있었는데, 기독교가 영향력이 제일 없었어요. 그때 세월호가 선교지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일시적으로 끝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기도-봉사-시위로 이어진 경우예요.

김장미 / 참사 몇 달 후 장영승 대표님이 서촌갤러리에서 희생된 아이들의 꿈을 이뤄 주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어요. 저는 그때 갤러리 지킴이를 하면서 세월호 활동을 하게 됐어요.

저도 기하성 교단 소속 교회를 다니는데요. 저뿐 아니라 가족들이 전부 순복음 교회를 다녀요. 당시 교회에서는 저만 노란 리본 달고 스티커 붙이고 다녔어요(물론 지금도…). 저만 이상한 사람 같았어요. 마치 외계인처럼요. 주변에서는 이제 아무 말도 없는데 저는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페이스북으로 찾아보다가 지킴이를 지원하게 된 거였어요. 전시회가 끝나고 또 뭘 할 수 있을까 알아보니까 광화문 서명지기가 부족하다고 해서 거기로 갔죠. 몇 달 있다가 미선 언니 소개로 천막카페로 가게 됐어요. 제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저녁 늦게까지 있지는 못하고요. 대신 당번인 날 오전 일찍 나와서 봉사하고 있어요.

조선재 / 1주기까지 세월호 활동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어요. 그냥 페이스북 보면서 링크하고,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도보 행진 하면 참석하고 그랬죠. 유가족과 접촉할 기회는 없었어요. 참사 이후 1년 동안 계속 분노하고 울고 위정자들 욕하고 금식 기도하고…. 개인적으로 그렇게 지내다가, 합동 분향소에서 목요 기도회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매주 교회들이 와서 기도회를 주관하는데, 안산의 교회는 별로 없고 다른 지역 교회가 많더라고요. 참석 첫날 기도회 마치고 가려는데, 예은이 어머님이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안산 분이 더 귀하다'시면서. 정말 안산에서 참석하는 분들이 거의 없었어요. 그렇게 함께 얘기하고 생각을 나누다 보니까 가족들과 친해진 것 같아요. 사실 모임에서 제가 특별히 하는 건 없어요. 그냥 허드렛일 도와드리는 정도죠.

▲ 좌담 당일에도 남기업 집사는 피켓을 메고 왔다. 문구는 그때그때 바뀐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남기업 / 저는 직장 때문에 광화문이나 안산에는 많이 못 가서 세월호 가족들을 많이 만나지는 못했어요. 참사 후에 특별법 제정 운동이 시작되고 하니, 교회 내 카톡방에 세월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고요. 언론들은 계속 왜곡 보도하고. 내가 움직이는 동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어요. '목에 피켓을 걸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들 생각에 자극을 좀 줘야겠다 싶었죠. 2014년 8월 어느 날, 뉴스를 보다가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어요. 당장 집 밖으로 나가서 라면 박스 주워 와 피켓을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피켓을 목에 걸고 다녀요.

처음에는 좀 긴장되고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러웠죠. 그런데 한 달쯤 지나니까 내가 피켓을 메고 있다는 인식도 못하게 되더라고요. (웃음) 효과가 좋았어요. 유가족이냐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고요. 그러면 저는, 평범한 시민인데 지금 잘못된 소문이 돌고 있어서 안타깝다고 답하죠.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화하면서 조금씩 시선이 달라지는 사람도 있었어요. 물론 지지·격려하는 사람도 많았고요.

교회에서도 뭘 할 수 없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2015년 1월 교회에서 피케팅을 시작했어요. 그냥 저 혼자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뜻이 맞는 사람 2~3명이 모였고, 인근 교회 청년들도 함께하게 됐어요.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교회 사람들과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하는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어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셔야 하는데…

- 세월호는 다른 참사와는 다르게 기독교인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배가 가라앉는 걸 실시간으로 보면서 우리가 다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결국 아이들은 한 명도 살아돌아오지 못했죠. 참사 이후 신앙적인 회의가 들지는 않으셨어요?

▲ 남기업 집사는 토지+자유연구소 소장이다. 자신이 다니는 전통적인 대형 교회에서 조금씩 변화를 만들고 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남기업 / 참사 이전과 이후 제 신앙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는 말처럼. 사실 우리도 그렇지만, 기울어진 배 안에서 아이들이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이런 고민을 많이 했죠. 저는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를 하는데, 이후로 아이들에게 기도 응답에 대한 얘기를 못하겠더라고요. 지금도 정리가 안 돼요.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도 그때 그 아이들과 수장됐다고 말하는데, 와 닿지가 않아요.

지금은 '하나님은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구나' 그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에 대한 질문은 속 시원하게 답이 안 됐어요. 많은 신학자·목회자가 여러 관점에서 대답을 내놨지만, 말의 향연처럼 느껴졌어요.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서 직접 물어봐야 할 거 같아요.

작년 어느 날은 피켓을 들면서 너무 속상했어요. 사회나 교회나, "유가족들이 왜 저러냐"는 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속으로 하나님께 엄청 토로했죠. 그랬더니 제 마음속에 하나님이 강하게 얘기해 주셨어요. '기업아, 너 잘하고 있어. 너무 고맙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나의 이 작은 행위가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정말 아름답고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장미 / 저는 세월호 참사 이전에는 순복음 교회에서 강조하는 기복 신앙을 가지고 살았어요. 그렇게 기도하고 그걸 당연한 줄 알았어요, 전혀 문제없이. 매주 설교에 은혜 받고 눈물 흘리고요.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1999년 씨랜드 화재 사건이 생각났어요. 그때 희생된 아이들 나이가 지금 제 아이와 같은 나이예요. 그때 저는 고등학생이었고요. 분명히 그 순간에는 슬퍼했을 텐데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세월호 참사 이후에 생각이 났어요. 기사들을 막 찾아보니까, 그때 잘못했던 사람들 지금 다 잘 살고 있었어요. 희생자 부모님들은 여전히 힘들고. 보면서 통곡을 했어요.

세월호 참사 후에 김삼환 목사님(명성교회)이 "아이들이 그렇게 된 건 대한민국에 회개의 기회를 주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식으로 설교하셨잖아요. 저도 그런 말에 길들여져 있었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어른들의 죄잖아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그 아이들과 함께 우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조선재 / '왜'라는 질문 앞에서 답을 찾는 건 어려운 것 같아요. 이건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렇잖아요. 얼마 전 신문 기사에서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자살 폭탄 테러에 동원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이들은 의심을 덜 받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작년에는 터키의 바닷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아이 쿠르디 소식으로 많은 사람이 마음 아파했죠. 지구상에 너무도 많은 크루디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끔찍해요.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생명들에게 왜 이런 일들이 벌어져야 하는지 어느 누가 답할 수 있겠어요? 신앙이 있어도 쉽게 답하지 못할 거예요.

사실 신앙에 대한 회의는 이명박 전 대통령 보면서 이미 많이 느꼈어요. 참사 이후로는 더 많이 느끼죠. 기독교인 유가족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자기들은 참사 이후 한국교회에 회개 운동이 일어날 줄 알았대요. 한국 사회가 이렇게 거짓되고 부패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침묵할 수가 있느냐고 하세요.

조미선 / 난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서 엄청 많이 기도했는데. 그때는 사람들한테 왜 우리 이명박 장로님 그렇게 핍박하냐고 그랬어요. 세월호 이전에는 그냥 그렇게 살았어요.

김장미 /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꼭 하고. 교회에서 통성기도로 엄청 했어요. 하면서 눈물 흘리고.

조선재 / 저도 대학 다닐 때 CCC(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 훈련받았거든요. '비판하기보다 기도해라', '성령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라' 이런 말 무지하게 들었어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기도만 해서 이 지경이 됐구나 싶어 많이 부끄러워요.

조미선 / 저는 지금 다니는 교회를 35년 동안 다녔어요. 제 삶 중에 교회와 연관되지 않은 게 없었어요. 참사 이전에 5년간 선교국에서 봉사했는데요. 담당 목사님이 주지해 준 멘트가 있어요.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은 일하신다'. 너무 좋은 말이죠. 저는 그 말을 믿었어요. 세월호 침몰할 때, 페이스북에 도는 기도 제목으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요. 그 기도 제목에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써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보는 눈앞에서 다 수장됐잖아요…. 나중에 시연이 동영상 보면서 더 울었어요. 아이들이 그 안에서 그렇게 기도했는데….

저는 작년 참사 1주기 광화문 기도회 때, 예은 아빠 유경근 위원장의 발언에서 깨달았어요. 그때 유경근 위원장이 "아이들과 선생님은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지금은 기도할 게 아니라 뛰쳐나가야지'라고 하셨을 거다"고 했어요. 그게 저한테 주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말이 다 맞는 건 아니구나. 기도하고 행동도 해야겠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에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세월호에 관심을 가지고 봉사하는 걸 마치 인본주의, 하나님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말해요. 그건 신앙이 아니라는 식으로. 저도 그런 교회를 오래 다녀서 처음에는 고민이 됐어요. 그런데 그때 유경근 위원장의 말을 듣고 확신했어요. 이제 교회에서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 같아요.

최근에 창현 엄마와 절친이 됐어요. 나이도 같아서 서로 반말해요. '순화야!', '미선아!'. (웃음) 요즘에는 간담회도 같이 가요. 사람들이 가끔 물어봐요. '왜 당신은 유가족도 아닌데 2년간 그러고 있느냐'고. 저는 그런 질문에 대답하려고 가는 거예요. "유가족이 옳기 때문이다"라고 답해요. 유가족은 자신들이 옳다고 말을 잘 못해요. 근데 저 같은 일반인이 얘기하면 효과가 더 크죠.

▲ 조선재 집사는 자동차 판매원이다. 안산에 거주하는 그는 합동 분향소 앞 기독교 부스에서 열리는 목요·주일 기도회에 성실하게 참석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어느 날 창현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나는 세월호 이후 기도해도 응답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요즘 느끼는 건, 하나님의 응답은 사람이었다는 거야". 그래, 맞구나. 확신이 섰어요. 그 전에는 신앙이 뭔가 추상적·피상적이었는데 이제 아주 실제적으로 바뀌었어요.

조선재 / 고등학교 선생님인 후배가 있어요. 그 친구도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삶이 많이 변했죠. 자신이 단원고 선생님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침몰할 때 똑같은 선내 방송이 10번 이상 나왔잖아요. 안전한 선내에서 대기하라고. 그 상황에서 누가 권위자겠어요. 그 방송을 무시하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할 선생님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 후배도 그 상황이었으면 아마 가만히 있었을 거라고 말해요.

예은 아버님 말씀처럼,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기도보다는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게 맞지만, 그렇게 행동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봐요.

저는 그 얘길 들으면서 교회를 생각했어요. 교회에서 권위자는 목사님이잖아요. 과연 목사님 말씀에 무조건 '아멘' 하지 않고 목사님 말씀이 성경적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목사님 말씀이 무조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교인들이 너무 맹목적인 신앙의 분위기 가운데 오랜 시간 살아온 거 같아요.

꾸준히, 오래

- 지금은 세월호 가족들과 많이 만나고, 꽤 친하신 분들도 있는데요. 처음에 그들을 대할 때 어렵지는 않으셨어요?

조선재 / 안산 기도회에 오는 분들 보면 다들 조심스러운 게 눈에 보여요. 어떤 말로 위로를 해 줄까 생각하고. 그런데 정작 엄마 아빠들은 위로의 말보다는 진상 규명을 위해 목소리를 내 주고 함께 움직여 주길 바라세요. 처음에는 저도 어려웠죠. 하지만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나니 그분들도 그냥 똑같은 엄마 아빠들이에요. 위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같은 길을 가는 동행자죠.

조미선 / 세월호 가족들을 가까이 하려고 특별히 노력을 하지는 않았어요. 먼저 다가가기도 어렵고. 현장에 같이 있어도 잘 몰랐어요. 봉사는 1년 반 넘게 했지만 유가족과 친하게 된 건 최근이에요. 제가 봉사하면서 느낀 점을 페이스북에 많이 올려요.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요. 유가족들도 그걸 본 거 같아요. 그런 바탕 위에 유가족들과 한번 관계가 생기니까 급 친해졌어요.

근데 어느 순간 보니까, 페북 친구가 다 세월호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남았더라고요. 저에게 세상 사람은 두 부류였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과 안 다니는 사람. 지금도 두 부류인데요, 좀 바뀌었어요. 세월호에 관심 있는 사람과 관심 없는 사람. (웃음) <뉴스앤조이>에 기사 두 번 나가면서 교회 친구들은 다 떨어지고, 유가족들과 친구가 됐어요. 이후 기독교인 유가족들을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어서 더 친해졌죠.

그러면서, 정말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깨닫게 됐어요. 전에는 '유가족들은 여전히 4월 16일입니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잘 와 닿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예진이 엄마가 그러는 거예요. 자기는 거울을 볼 때마다 예진이를 찾는대요. 예진이가 자기랑 너무 닮아서 거울만 보면 예진이가 보인다는 거예요. 그때 정말 알았어요. 이분들은 2년이 다 돼 가도 여전히 2014년 4월 16일 그대로구나. 그렇게 알게 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지금 세월호는 봉사도 아니고 그냥 제 삶이에요. 예배고 신앙이에요. 피켓 시위를 할 때도 주일예배 때같이 정성스럽게 기도하면서 해요.

▲ 오랫동안 꾸준히 그 자리에 있는 것. 그게 위로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김장미 / 서촌갤러리 지킴이할 때, 부모님들이 청운동에서 노숙하고 계셨어요. 그때는 또 상황이 상황인지라 선뜻 말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어요. 그래도 지킴이 활동 끝나고 갈 때 항상 들러서 인사하고 갔어요. 인사라도 하고 가자는 마음으로. 꾸준히 오랫동안 가니까 부모님들이 조금씩 마음을 여시더라고요. 보니까 한두 번 오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부모님들은 누가 올 때마다 간담회급으로 설명해 주시는데, 그 사람이 더 이상 안 오니까 좀 허탈해하셨던 거 같아요.

그분들에게 위로는 말로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내가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거. 부모님들은 저 사람이 언제까지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거 같아요. 관심 없어 보여도 매번 오던 사람이 안 오면 그분 어디 갔냐고 물어보세요. 그런 모습 보면서, 그 자리에 오랫동안 있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저도 이제 주일날 예배로 채워지지 않는 게 있어요. 예전에는 주일예배뿐 아니라 구역 예배도 열심히 다니고 그랬는데. 지금은 아픈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예배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남기업 / 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안산에 가니까 세월호 가족들과 많이 만나지는 못했어요. 처음에는 어려웠죠.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하나 쭈뼛쭈뼛하고, 할 말도 없고. 그런데 기도회 끝나고 시찬이 아빠, 예은이 엄마가 고맙다고 저를 꼭 안아 주는 거예요. 갈 때마다 엄청 반가워해 주고. 오히려 제가 위로를 받았죠. 가족들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뭐 말로 위로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요. 그냥 지금 하는 활동, 주위에 알리고 교회에서 피케팅하는 거 계속 꾸준히 하는 게 위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보면 어색하고 그래요.

상처도 위로도 교회가 제일 많이

- 현재 다니고 있는 교회는 어때요? 집사님들의 활동을 지지해 주나요?

조미선 / 저는 진짜 세월호 전까지 보수적인 교회, 진보적인 교회,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냥 다 우리 교회 같은 줄 알았죠. 광화문에서 보니까 세 종류의 교회가 있더라고요. 세월호 참사에 가슴 아파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소수의 교회가 있고요. 십자가와 태극기를 같이 들고 와서 찬송보다 애국가를 더 많이 부르는, 세월호에 참여하는 걸 종북·빨갱이 취급하는 극단에 있는 교회. 그리고 처음에는 슬퍼했다가 이제는 나 몰라라 하는 대부분의 교회들. 저희 교회는 세 번째에 속하지만 약간 두 번째 쪽으로 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최근에 창현 엄마 아빠가 저희 교회에 온 적이 있었어요. 저희 교회가 보수적이라 유가족들이 실망할 것 같아서 좀 걱정이 됐죠. 다행히도 담임목사님이 유가족들 만나 주셔서 이야기는 나눴는데요. 간담회 한번 하자는 제안은 정중하게 거절하시더라고요. 예배 때도 세월호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하셨어요. 유가족이 왔는데 소개도 안 하고. 속이 많이 상하더라고요.

이런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렸어요. 그런데 그 글을 보고 다른 교회 목사님들이 저에게 연락을 하시더라고요. '우리 교회는 집사님 다니시는 교회보다는 작지만 유가족들 이야기를 꼭 듣고 싶다'고요. 그렇게 다섯 교회가 연결됐어요.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저희 교회 교인들도 저한테 연락이 와요. '유가족이 왔었냐'고. 광화문 한번 오겠다는 말에, 차라리 간담회에 오라고 했어요. 이번에 몇 명 온다고 하더라고요. 하나님이 길을 이렇게 여시나 싶어요. (웃음)

김장미 / 저는 그동안 정말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거 같아요. 매주 설교 들으며 은혜 받고 뜨겁게 기도하고.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항상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였어요. 목사님께서는 이 땅의 대통령과 위정자들에게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고, 전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세월호 참사 이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들었어요. '기도만 하면 되는 걸까. 정말 아픈 사람들은 밖에 내버려 두고 외면한 채로'. 물론 교회에서 많은 구호 활동을 하지만, 하나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적용되고 어떤 사람들한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지 헷갈렸어요. 장로님들은 여전히 대표 기도 하시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해 달라고 하고. '과연 이렇게 기도만 하면 그런 일이 생기는 걸까'.

교회는 세월호 참사 전이나 후나 똑같아요. 교회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어요. 기도 제목에 자꾸 반발감이 생기고. 세월호와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일이 터지면, 설교 시간이나 대표 기도 시간에 등장하고. 빨갱이라는 말은 안 하지만 다들 그런 정치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또 다음 날 광화문 와서 미선 언니한테 토로하고.

작년에 성완종 회장이 자살했을 때, 저희 교회에서는 '어떻게 하나님 믿는 사람이 자살을 할 수 있느냐'는 식의 설교가 나오더라고요. 오히려 자살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자살을 택했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그게 세월호 의인 김동수 씨 이야기랑 겹쳐서 다가왔어요. 교회는 정말 딱 그 틀 안에만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기업 / 제가 다니는 교회는 3,000명이 다니는 큰 교회, 전통적인 장로 교회예요.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있는 교회는 아니죠. 그래도 고등부 담당 목사님한테 같이 피케팅하자고 했더니 같이 하더라고요. 그다음에는 교육 담당 목사님한테도 같이 하자고 했더니 또 같이 해요. 이후에 고등부에서 세월호와 관련해 어떤 프로그램을 했어요. 하지만 교회 리더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더라고요.

이후 담임목사님과 한번 대화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대화를 오래 했는데 평행선이더라고요. 그러면 차라리 유가족을 만나 보시는 건 어떻겠냐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세요. 그래서 실제로 작년에 담임목사님과 유가족들이 만났어요. 대화를 하면서 유가족들 말을 다 받아들이시지는 않아도 생각을 좀 바꾸시더라고요. 그분이 60이 넘으셨는데 대단하시죠, 자기 생각을 바꾼다는 게.

지금은 상황이 좀 나아졌어요. 담임목사님이 좀 생각을 바꾸시니까 교회에서도 노란 리본 착용한 사람이 많이 보여요. 다들 마음은 있는데 그동안 교회 분위기가 좀 아니니까 알아서 떼고 들어온 거예요. 아직 많은 분들은 세월호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변화가 있었죠. 올해 6월에는 저희 교회가 안산 목요 기도회도 한 번 주관하기로 했어요.

조미선 / 예전에 <뉴스앤조이>에서 목사님이 아니라 성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글을 봤는데. 아니야, 성도만 바뀌면 너무 힘들어. (웃음)

조선재 / 저는 안산에 있는 작은 침례 교회에 다녀요. 저희 교회는 많이 보수적인 편이에요. 세월호 이야기는 제가 하지 않으면 전혀 안 나와요.

안산에 살아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안산에 있는 교회들에 배신감이 많이 들어요. 희생자가 있는 교회들이 많은데 어쩌면 그렇게 잠잠한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고무적인 건, 이번에 안산 분향소 기독교 부스가 넓어진다는 거예요. 함께 예배하는 분들이 많아져 그동안 많이 협소했거든요. 사실 1주기 때만 해도 기독교 부스가 한가했지만, 지금은 사람이 제일 많이 모여요.

예은이 어머니 말씀처럼, 교회가 상처도 제일 많이 주고 위로도 제일 많이 주는 것 같아요. 이런 걸 보면 한국교회에 완전히 희망이 없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목요 기도회에 참여하면서 귀한 분들 정말 많이 만났어요. 동지애를 느껴요. 페이스북 친구들은 많이 잃었지만. (웃음)

조미선 / 우리는 길게 가나 봐. 우리 교회 사람들도 처음에는 저를 이상하게 보다가, 제가 계속하니까 요새는 뭔가 있나 보다 해요. 그러면서 조금씩 궁금해하더라고요. 질기면 이기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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