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요섭 씨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왼쪽). 2013년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찍은 것이다. 박요섭 씨는 이날 시찬이가 자신을 처음으로 업어 주었다고 했다. (사진 제공 박요섭)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박요섭 씨의 카카오톡 프로필은 아들 시찬이와 얼굴을 부비며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사진이다. 아빠와 아들이 너무 친근해 보여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시찬이는 그런 아들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아빠에게 안기고 얼굴을 부비는. 엄마가 집으로 오는 소리가 나면 문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유난히 정이 많고 착한 아이였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반 년 전에 가족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이에요. 자기가 먼저 아빠 끌어안고 얼굴 부비고 그랬어요. 그날 시찬이가 저를 처음으로 업어 줬어요. 얼마나 마음이 기뻤는지 몰라요. 정말 든든한 아들이었어요."

시찬이 부모님을 3월 22일 안산 합동 분향소 앞에서 만났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보며 이야기했다. 인터뷰 내내 덤덤하던 박요섭 씨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수가 적은 시찬이 어머니 오순이 씨는 옆에서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제 시찬이를 품에 안을 수도, 시찬이의 품에 안길 수도 없다.

▲ 시찬이 부모님을 만났다. 인터뷰는 안산 합동 분향소에 있는 기억과 약속의 방에서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아이를 못 찾았다는 건

세월호 침몰 소식이 전해진 당일에 박요섭 씨는 진도로 내려갔다.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지옥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냉철했다. 아들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혹시나 흥분해서 우를 범하지 않을까 침착하려 기를 썼다. "냉철해져야 해"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아이가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을 72시간으로 봤다. 그때까지 아들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나 3일이 지나고 5일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시찬이는 올라오지 않았다. '못 찾는 건 아닐까' 불길한 생각이 엄습할 때마다 너무 무서웠다. 시간이 갈수록 몸도 마음도 무너져 내렸지만, 아내와 딸의 얼굴을 보면서 또다시 이를 악물었다.

"일주일이 되고 열흘이 넘어가니까 진짜 미쳐 버릴 것 같더라고요. 나중에는 혼잣말로 그랬어요. '아들, 아들이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으니까, 아빠는 다 받아들일 거니까 돌아와만 주라'. 시찬이가 20일 만에 올라왔는데 참 깨끗한 상태로 왔어요.

또 한 가지 다짐한 건 시찬이 친구들 모두 찾을 때까지 팽목항에 있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삼우제 마치고 바로 진도로 다시 갔어요. 저희가 거기 있는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아직 찾지 못한 가족들 옆에 있어 주러 간 거예요. 그때는 정말 체육관이 썰렁했거든요. 그냥 같이 밥 먹고 회의 참석하고 체육관에 자리 하나 채우는 거였죠.

미수습자 가족들 마음이 어떨지 상상이 안 가요. 3일, 5일, 열흘만 지나도 진짜 사람이 이상해지거든요. 아이 찾겠다는 생각밖에 없으니까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도 굳어져요. 굉장히 날카로워지고요. 근데 700일이라는 건…. 정말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요."

박요섭 씨와 오순이 씨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는 중에도 자신들보다 더 힘든 사람을 생각했다. 시찬이를 찾고도 3개월 정도 더 진도에 있었다. 미수습자 가족들이 수습을 포기하고 인양을 결정한 후 안산과 서울로 올라왔을 때도 그들 곁에 있으려 노력했다. 미수습자 다윤이 부모님과 함께 청운동과 광화문, 홍대에서 자주 피켓을 들었다.

▲ 시찬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찍었던 가족 사진. 부모님은 그나마 최근에 찍은 사진이라 다행이라고 말했다. (사진 제공 박요섭)

'기도하고 있다'는 말

시찬이 부모님은 둘 다 모태 신앙이다. 시찬이라는 이름도 '시와 찬미'라는 뜻이다. 오순이 씨는 두 아이를 낳을 때 빼고는 교회에서 봉사를 하지 않은 적이 없다. 보통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착하고 성실한 집사님이었다.

박요섭 씨는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목사는 아니지만 자신을 '평신도 사역자'로 여겼다. 교회 음향 쪽에서 일하며 이걸로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다니고 있던 교회가 큰 건물을 짓고 대형화의 길을 가는 걸 보면서 회의감이 들었다. 누구에게 배운 건 아니지만 그는 교회가 큰 규모를 지향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교회 생활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기에, 세월호 침몰 후 박요섭 씨와 오순이 씨는 교회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 물론 교회가 부족한 면도 있지만 그래도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끝까지 보살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참사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허망함만 남았다. 박요섭 씨가 팽목항에서 겪은 일이다.

"참사 전에는 몰랐는데 다윤이네와 우리가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더라고요. 다윤이 못 찾고 너무 힘들고 지쳐 있을 때 목사님이 한번 내려오셨어요. 제가 목사님 손을 꼭 붙잡고 얘기했어요. 예배를 너무 드리고 싶다고요. 너무 기가 막힌 상황을 신앙의 힘으로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한 거죠. 그때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이후로 아무런 조치가 없었어요. 제 간절함이 전해지지 않았나 보죠."

▲ 시찬이는 든든한 아들이었다. 엄마가 저녁에 운동을 가려고 하면 엄마를 지켜 준다며 따라나서는 아이였다. (사진 제공 박요섭)

오순이 씨도 말했다.

"같이 봉사도 하고 친하게 지냈던 교인들에게 다윤이 얘기를 했어요. 아직 못 찾았으니까 관심을 가져 달라고요. 피켓 들어 달라고까지는 말도 못 해요. 여기 분향소 예배에라도 한번 나와 달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냥 '기도하고 있어'라고 답해요. 교회에서 좀 관심을 가져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 교회가 참사 이후에 기도 많이 했다고 해요."

"철야 예배 때나 기도회 때 기도 제목으로 나왔겠죠. 딱 그 정도인 것 같아요. 설교 때나 기도할 때 예화나 기도 제목으로 쓰는 수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 바깥 일에 무관심해요. 그러면서 세월호 가족과 관련해 말도 안 되는 문자메시지가 돌 때는 그거 퍼 나르죠. 세월호 가족들이 교회 때문에 상처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시찬이 부모님은 참사 전에 다녔던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그곳에 나가서 기도만 할 수는 없었다. 교회를 나와서는 안산 합동 분향소 앞 기독교 컨테이너에서 하는 예배에 참석했다. 거기서 세월호 가족들을 기억하고 위로해 주러 온 많은 기독교인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를 지지해 주는 분도 많은 걸 알아요. 그분들한테는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요. 물론 대부분 작은 교회이고 전체 교계에서 보면 아주 미미하겠죠. 바닷물이 3%의 염분 때문에 썩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분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완전히 썩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 오순이 씨 가방에 달려 있는 버튼. ⓒ뉴스앤조이 구권효

진실을 찾아 달라

수십 년간 교회를 다니고 열심을 다했지만 참사를 겪으며 풀리지 않는 질문이 쌓여 간다. 박요섭 씨는 요새도 중얼중얼 기도하며 하나님께 하소연한다고 했다. 도대체 나에게 이런 일이 왜 일어난 거냐고. 왜 시찬이를 그렇게 데려가셨냐고. 하지만 2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하나님은 '침묵'이다.

"하나님은 답이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기도해요. 저는 몰라도 하늘로 간 시찬이랑 친구들한테는 꼭 말씀해 주셔야 한다고."

박요섭 씨는 기독교인들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스스로 진실을 찾는 노력을 하라'는 것.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건 그 다음이고, 먼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스스로 찾아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진실에 대한 개개인의 작은 열망이 모일 때 언젠가 세월호 참사의 해법을 찾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언젠가 그날이 오겠죠. 몇 년이 걸리든 몇 십 년이 걸리든. 우리는 지치지 않아요. 엄마 아빠니까. 끝까지 갈 거예요."

시찬이 아버지의 이야기는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9화 '하나님! 우리 아이들에겐 꼭 설명해 주세요' 편에서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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