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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그립고 더 보고 싶다"
[인터뷰] 세월호 참사 희생자 김동혁 군 아버지 김영래 씨
  • 구권효 기자 (mastaqu@newsnjoy.or.kr)
  • 승인 2016.03.3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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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래 씨는 2년이 지난 지금도 동혁이 영정 사진을 오래 보지 못한다. 동혁이 얼굴을 그린 그림만 바라볼 뿐이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세월호 참사 희생자 김동혁 군의 아빠 김영래 씨는 여전히 일을 한다. 2014년 4월 16일 전까지 한 직장에서 20년을 일했고, 이후 두 달 정도 쉰 다음 지금까지 계속 일하고 있다. 일이 끝난 저녁에는 학교나 단체에서 하는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에 간다. 주말에는 집회도 참여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참사를 겪으며 당면한 여러 법적인 문제를 공부한다. 지난 월·화요일에 열린 2차 청문회에 다녀오기 위해 주말 내내 근무했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2주 동안 매일 밤 12시 넘어서 집에 들어올 때도 있었어요. 힘들지만 아이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서…. 제가 못 지켜 준 아이인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내가 죽어서라도 동혁이가 돌아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텐데… 그렇게 되지 않잖아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침몰하는 배 안에서 한 아이가 남겼던 동영상에 동혁이가 나온다. 동혁이는 아빠 이름을 부른다. "우리 김영래 씨 아들이 고합니다. 이번 일로 죽을 수 있을 거 같으니 엄마 아빠 사랑해요. 예원아, 예원아 너만은 제발 수학여행 가지 마, 오빠처럼 되기 싫으면 제발. 마지막이야, 나 지금 기울어진 거 보이지?" 아빠는 영상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그거 생각하면 제가 좀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김영래 씨를 3월 30일 저녁, 안산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집 곳곳에 동혁이 사진과 동혁이 얼굴을 그린 그림, 판화 등이 걸려 있다. TV 옆에 놓인 작은 유리 상자에는 동혁이가 좋아했던 만화 '짱구' 나노블록과 건담, 사진첩 등이 들어 있다.

"아직도 우리 동혁이 영정 사진을 제대로 못 봐요. 얼굴 그림 같은 건 보는데…. 회사 사람들은 이제 좀 괜찮아졌냐고 물어요. 괜찮냐고요? 2년이 지났는데 처음보다 더 그립고 더 보고 싶어요."

   
▲ 김영래 씨를 만났다. 집 곳곳에 있는 아들의 흔적을 볼 때면 금방 눈물이 고였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동혁이한테 너무 미안한 게

2시간 정도 이야기하면서 김영래 씨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우리 동혁이한테 너무 미안한 게…"였다. 습관처럼 이 문구를 앞에 붙이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한 회사에서 20년을 근무할 만큼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지만 "아빠로서는 0점이었다"는 말도 했다. 동혁이와 행복한 날을 더 보내지 못한 게 평생 한으로 남을 것이다.

김영래 씨는 첫 결혼에 실패했다. 이혼할 때까지 가정이 불화했다. 아이들을 위해서 갈라섰다. 재혼할 때까지 5~6년을 혼자 키웠다. 주중에는 항상 일을 하니 아이들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동혁이는 아빠가 없으면 동생을 챙겨야 했다.

   
▲ 집 한편에 동혁이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 밑 유리 상자에는 동혁이가 좋아했던 것들을 넣어 놓았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동혁이는 착하게 커 주었다. 동혁이가 중학교 3학년 때 아빠는 학교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무슨 사고라도 쳤나 싶어 걱정했는데, 선생님은 오히려 동혁이에게 선행상을 주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말했다. 점심시간 때 동혁이가 학교에 있는 쓰레기를 줍고 다니는 모습을 봤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말했다. "동혁이는 참 착한 아이 같아요."

"저는 아이들한테 죄인이에요. 특히 동혁이한테는 좀 엄하게 대했어요. '아빠 없으면 네가 가장이다. 동생 잘 보살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죠. 그래도 애가 참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했어요. 사춘기 때도 저한테 한 번도 대든 적이 없어요. 차라리 또래 아이들처럼 반항하고 해 볼 거 다 해 본 아이였으면 조금 덜 미안했을 텐데.

동혁이한테 너무 미안한 게… 동생이 잘못한 것도 그냥 자기가 한 거라고 하면서 대신 혼났던 아이에요. 저는 또 바보같이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동혁이 마음은 알아주지도 못하고…. 나중에야 알게 됐어요. 정말 천사 같은 아이였어요."

지금 아내를 만나며 영래 씨와 아이들의 지난날 상처가 아물어 갔다. 참사 한 달 전, 가족은 모처럼 외식을 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동혁이에게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동혁이는 "다 같이 노래방에 가고 싶다"고 했다. 간혹 가족끼리 노래방에 갈 때면 잠이나 자던 아이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가족들은 노래방에서 신나게 놀았다. 동혁이가 그렇게 재밌게 노는 모습은 아빠도 처음이었다. 영래 씨와 아이들은 조금씩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그런 날만 있을 줄 알았다.

2014년 4월 16일. 참사가 일어나고 아빠는 살아갈 의미를 잃었다. 나쁜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때마다 '동혁이가 하늘에서 어떻게 생각할까'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다. '분명 저 녀석은 아빠 엄마 행복하게 살라고 했을 거야.' 그럴 때마다 아빠는 더욱 힘을 내서 팽목항이든 국회든 청운동이든 뛰어다녔다.

   
▲ 동혁이 동생 예원이는 2015년 단원고에 입학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아빠의 가슴을 무너지게 만든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2015년에 고등학교로 올라가는 동혁이 동생 예원이가 단원고로 가고 싶다고 했을 때다.

"예원이가 단원고에 입학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저는 결사반대했죠. '아빠는 이제 단원고 교복 못 본다. 아빠 죽는 꼴 보고 싶으면 가라'고 했어요. 그렇게 못 박았죠.

근데 며칠 뒤 예원이가 제 앞에 와서 그러는 거예요. '오빠 대신 꼭 졸업하고 싶어요. 단원고에 가야 그래도 오빠 교실 한 번은 더 볼 거 아니에요.' 제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거기서 제가 물러섰어요."

김영래 씨는 예원이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 동혁이는 예배당 시간에 자리에 앉아 졸기도 했다. 사진이 찍히자 멋쩍어하는 동혁이. (사진 제공 김영래)

보상금 어디다 썼느냐는 사람들

동혁이는 아빠를 따라 태어날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아빠를 닮아 뭘 하나 하면 오래, 성실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몇 년 전까지 안산에서 서울에 있는 교회를 다녔는데,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아빠가 주말에 당직이거나 몸이 힘들어 교회에 못 나가면, 예원이 손을 잡고 좌석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왔다 갔다 했다.

몇 년 전부터는 온 가족이 안산에 있는 작은 교회로 옮겼다. 참사 후 교회 담임목사가 항상 노란 리본도 달고 다니고 세월호 관련 행사에도 참석하면서 동혁이 가족들을 신경 써 주어, 교회에서는 작은 위안을 받고 있다. 그래도 힘든 점은 있다.

"항상 동혁이, 엄마, 예원이, 저, 이렇게 앉았거든요. 예배 드리다 보면, 이 녀석이 졸고 있는 때가 있어요. 자꾸 그 생각이 나서 힘들어요. 저 옆에 있을 것 같은데.

목사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기도 말미에 항상 세월호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그러시거든요. 그런데 교인들이 다 그런 마음은 아닌 거 같아요. 얼마 전에 아내가 한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가 그렇게 돼서 스타 됐네?' 식으로요."

   
▲ 동혁이는 동생 손을 잡고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하며 교회를 다녔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피가 거꾸로 솟지만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니다. 20년을 다닌 회사에서도 영래 씨 가슴에 비수를 박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보상금 얼마 받았냐는 이야기부터 그 돈 어디다 쓸 거냐, 이제 2년 정도 됐으니 어디 놀러가자 등등. 십수 년을 같이 일해 온 동료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또 다른 상처로 남았다. "아직 해결 안 됐어? 다 끝난 거 아니야?" 영래 씨는 참사 후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다.

"그런 사람 많아요. 이제 사람들은 세월호에 전혀 관심 없어요. 참사 후에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정말 허물없이 친한 친구도 요새 그런 말을 해요. 친한 친구 자식이 그렇게 됐다면 어느 정도 관심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관심이 없다면 최소한 '내가 요즘 바빠서 확인을 잘 못했는데 혹시 지금은 어떻게 됐어?' 이런 게 정상 아니에요.

청문회 보면서도 느꼈지만 이 나라는 국가가 아닌 것 같아요. 국가는 국민이 우선 아닌가요. 그런데 대한민국은 지금 대통령을 포함한 상위 1%가 우선인 나라예요. 우리가 국민이고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정말 이 나라 너무 싫어요. 할 일 다 끝내면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어요."

우리들만의 리그처럼 보여도

   
▲ 세월호를 기억하고 함께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김영래 씨는 오늘도 힘을 낸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김영래 씨는 지금까지 많은 간담회에 참석했다. 700~800명이 오는 큰 규모에서부터 20~30명이 오는 작은 간담회까지 자리를 가리지 않았다. 학생들을 만나면 꼭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저희가 죄송하죠"라고 한다. 그는 말한다. "저는 동혁이 아빠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의 어른이기도 합니다. 어른으로서 이런 세상을 만들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참사 이후에 활동하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우리 일인데 자기 일처럼 생각하시고 함께해 주시는 분이 많아요. 근데 때로는 이게 '우리들만의 리그' 아닌가 싶어요. 이 바운더리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완전히 다른 세상이거든요. 세월호에 관심이 없고 이제 다 잊은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그런 사람들과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우리들만의 리그라도, 그렇게 함께해 주시는 분들 때문에 또 힘을 내요. 몸이 피곤해도 그런 분들 만나는 게 저한테는 약이에요. 저희는 앞으로도 계속 갈 겁니다.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아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밝혀 낼 거예요. 지켜봐 주시고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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