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생은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스물세 살부터 취업을 준비했다. 졸업 후 백수 생활하는 선배들을 하도 많이 봐 와서 4학년 1학기 때 휴학한 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정보도 얻고 준비도 했다. 그러다 전공과 관련한 곳에서 일하며 험한 꼴을 당했다. 생각보다 부정과 비리가 많았고, 직원들의 급여는 물론, 근무 환경도 상상을 초월했다. 이후 축구공 패스 연습하듯 왔다 갔다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다 엉뚱한 곳에서 1년간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는 1년의 계약직이 끝나고 백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백수로 지내려면 고향으로 내려오라는 부모님의 호출에 고향으로 돌아가 집에서 취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취업도 못 하고 놀고 있는 아들을 보며 속 터지도록 속상한 부모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는 후배.

ㅡ 그렇게 집에만 있지 말고, 도서관을 가든 어디를 가든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든지 해라. 제발 좀 나가라!

그때부터 부모님이 주무시는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왔고 밥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시간에 몰래 먹고 다녔다. 부모님 뵐 면목이 없어서…. 도서관에 가서 악착같이 구직 활동을 위한 서류를 만들고 일자리도 알아보고 취업이 된 친구들의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교과서 삼아 보완하고 수정하며 5개월 넘게 이력서를 내고 면접 보기를 반복했다. 그 시절, 밤에 몰래 집에 들어와 방에 누워 잠을 청할 때면 항상 이런 생각을 했단다.

― 내일은 얼마나 더 지루하고 재미없을까? 내일은 뭘 해야 하나? 다들 자기 일을 찾아가는데 왜 나만 이렇게 무기력한가? 과연 나는 잉여 인간이 아닌 생산적인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 후배의 취업 소식을 들었다. 백수가 된 후로 부모님 뵐 면목이 없어 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몰래 들어와 잠만 자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삶의 고비에서, '정답'만 얘기하는 목사님과 교인들을 만났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림 제공 이현숙)

그 시절 교회가 진짜 고마웠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돈은 많이 못 벌겠지만 힘들고 어려워도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수도 없이 구직에 실패하며 취업 준비생 시절을 보내면서, 서럽고, 불안하고, 막막하고, 먹먹했다. 의지할 곳이 없어 새벽 기도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신히 버텨 나갔다. 그 시절 교회가 진짜 고마웠다.

가족들이 나를 몰아붙이고 비난할 때, 성도님들과 목사님은 내가 어느 자리에 있든지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 주셨다. 지금도 존경하는 한 집사님 가정은 옷도 사 주시고 맛있는 음식도 사 주시며 우스갯소리로라도 "우리 회사에서 일해라" 하시면서 마음을 편하게 해 주셨다. 만약 취업을 못 하고 있는데 목사님이나 교회 어른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면?

― 눈이 높아서 이것 재고 저것 재고 하니까 취업을 못 하는 거예요. 거기가 어디든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면서 변화시킬 생각으로 가면 일자리가 왜 없겠습니까? 눈이 높음을 회개하시고 낮은 곳으로 가세요! 그리고 더 기도하세요! 그거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이런 말을 들었다면 정말 욕이 나왔을 것 같다. 아니면, '그래. 역시 난 안 돼. 난 틀렸어…' 하면서 울었을지도.

새벽마다 기도했지만 허공에 드린 기도처럼 응답이 없던 어느 날, 한 곳에서 연락이 와 면접을 보게 되었다. 좋은 선배에게 전문적으로 일을 배우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일할 수 있는 좋은 기독교 문화가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기도가 응답이라도 된 듯 지방의 작은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는 아마 그 험난한 시절에 교회가 곁에 없었다면, 교회 목사님과 집사님 부부의 응원이 없었다면,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을까 싶다고 했다.

뭐?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는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며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라는 이 찬양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결과적으로는 이 찬양 내용대로 고백할 수 있으나, 내가 살아온 수많은 과정에서 보자면 이 찬양은 소위 말하는 전혀 은혜가 되지 않는 찬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찬양이 나올 때마다 입을 열지 않고 그냥 가사를 꼬나보고 있었다. 가사를 이렇게 바꾸면 따라 부르겠는데…. "하나님 수도 없이 나를 실망시킨 적 있으시며 솔직히 몇 번쯤은 공평과 은혜로 안 지키신 것 같았네~."

내가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 나는 참 순수했다. 고2 때 거듭남을 경험했는데, 주일날 교회 갈 때 젤(왁스처럼 머리스타일을 연출하는 제품. 당시 대유행)을 바르고 가면 지옥 가는 줄 알았다. 의심 없이 믿는 믿음이 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인생 모토는 '무조건 아멘'이었다. 믿어지면 크게 아멘 했고, 안 믿어지면 그 안 믿어짐을 삼키려고 더 크게 아멘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무조건 믿고 기도했다. 뭔가 마음속에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는 마음이 있어도 '아, 이건 마귀 새끼가 불어넣어 주는 생각이야!' 하면서, 그런 것들을 꾹꾹 삼키면서 기도했다. 그때는 신앙의 위장도 좁디좁아서 그런 것들을 꾹 삼키려다 보니 소화불량에 걸려 내 영혼은 늘 더부룩한 상태였다.

그렇게 한 살 두 살 더 먹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이상하리만치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을 겪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하지만 기도 시간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그런 기분을 솔직히 표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부터 쏟아 내고 싶은 정동들이 목구멍과 혀를 근질근질하게 했지만, 정말 살인적인 인내로 꾹꾹 누르며 내뱉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시절에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하루에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씩 기도했다. 나름 기도와 경건의 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중 대부분의 기도는 소화불량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ㅡ 하나님, 오늘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정말 이해는 안… 아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근데 그 새끼가 저한테 왜 그러는… 아니, 하나님께서 만날 만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신 줄 믿습니다.

― 하나님, 오늘 너무 아파서 뒤지겠… 아니, 하나님을 더 의지하라고 주신 가시인 줄 믿습니다.

― 오늘 성경을 읽는데 이건 도대체 뭔 소린지… 아니, 이해가 안 돼도 믿습니다.

뭐, 이런 식이었다. 하나님께는 절대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나는 참 착한 피플이었다. 시편을 읽을 때도 하나님께 매섭게 따지는 시인들을 보면서 '이쉑들은 간에 보톡스를 맞았나? 믿음을 중고나라에 팔아먹었나…?'라는 생각을 했다. 낯설기 짝이 없는 기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에 터닝 포인트를 가져다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건 나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사건이다. 모든 장례 일정을 마친 뒤 나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와 쭉 함께 계셨고, 어떻게 보면 어머니나 아버지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머니와 보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많이 좋아했고 할머니와 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세에 비해 건강했던 할머니께서 89세에 갑자기 방에서 쓰러지셨다. 할머니는 내게 어지럽고 정신이 없다고 하셨다. 나는 몹시 당황했고 어떻게 할지 몰라서 이리저리 가족들에게 전화했는데, 제대로 연락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불현듯 이런 응급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래서 전화를 하면 출장을 나와 링거를 놔 주는 사람을 불렀다. 전화를 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링거를 놔 주셨다. 할머니는 편하게 잠드셨고 사태는 여기서 종결되는 줄 알았다.

잠시 후 할머니께서 일어나셨는데, 그때부터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흡사 짐승 같은 소리, "으어허허 끄어어억 이히이힉" 이런 소리였다. 당황스러웠다. 다시 가족과 친척들에게 전화했다. 마침 삼촌 중 한 분이 병원 쪽에서 일하셨는데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온다고 하셨다. 삼촌이 오기까지 4시간 동안 이 세상에 할머니와 나만 존재하는 듯했다. 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 도와주세요. 할머니를 살려 주세요.

이런 상황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믿고 그렇게 착한(?)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상황은 1센티미터도 나아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삼촌이 오셨고, 가족들도 속속 도착하면서 뭐라뭐라 대화를 하더니 할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응급실로 모셔야 하지 않느냐고 했고 어른들은 결사반대했다. "그렇게 하면 병원에서 어떻게든 할머니 '숨'은 붙어 있게 하겠지만, 그건 살아도 산 게 아니라 할머니를 더 힘들게 하는 일이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힘없는 나는 그렇게 죽어 가는 할머니를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고통 속에 계시던 할머니는 2주 후쯤,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장례식 내내 상주인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충분히 슬퍼할 시간, 아니 조금이라도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와 주었다. 호상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3일장을 치르는데 마침 기말고사 기간이어서 교수님께 연락했다. 몇몇 교수님은 사정을 봐주셨지만 몇몇 교수님은 그럼에도 시험을 보러 와야 한다고 해서 나는 장례식장에서 시험 공부를 했다. 사람들이 나한테 독한 새끼라고 했다. 심지어 할머니를 화장하고 재를 뿌린 그 손의 온기가 식기도 전에 그 모습 그대로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왔다. 그때까지도 하나님께 착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뜻 안에 있는 거지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지요?"

그리고 그 모든 장례 일정을 마친 뒤에 나에게 아주 이상한 일이 생겼다. 마음의 감각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희귀한 경험이었다. 내 육체라는 그릇 안에 영혼이 담겨 있는데, 그 영혼이 무슨 일 때문에 가출을 하고는 들어오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을 만나도, 예배를 드려도, 성경을 읽어도, 기도를 해도 그냥 멍했다. 하루는 소파에 앉아서 4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한 적도 있다. 하루에 한두 시간은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넋 나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였다.

그러는 중에도 늘 기도 시간을 지켰다. 나가서 습관적으로 기도했다. 오늘 뭐가 감사하고, 제가 지금 어려운 상태여서 말씀도 잘 못 읽고, 예배도 잘 못 드리고, 그래서 죄송하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신데 제가 이래서 죄송하고…. 대략 이런 기도였다. 여전히 착한 기도.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났는데, 도저히 내 마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집 앞에 있는 단골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께 상담 비슷한 걸 했다.

꺼져, 그딴 사랑 필요 없어

의사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 그건 정주 씨가 슬퍼해야 할 시간에 충분히 슬퍼하지 못해서 그래요. 지금 누군가에게 응어리진 분노 같은 게 있지 않나요? 이해 안 되고 억울한 감정들이요. 그 대상에게 찾아가서 그걸 있는 그대로 표출하세요. 욕을 해도 되니까 아무 숨김없이 그 바닥에 감추어 놓은 문을 열고 다 쏟아부으세요. 그래야 돼요.

그 말을 들을 때 가장 먼저 생각 난 분은 하나님이었다. 분명 나를 응어리지게 만든 분은 그분이었다. '근데 어떻게 감히 그분께 내 감정들을 솔직하게 다 쏟아놓나? 할머니 일에 대해서도 따지고 싶은 게 산더미지만 그분은 선하고 신실하신데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욕? 말도 안 돼. 벼락 맞으려고.'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갈수록 마음의 병세는 깊어져 이렇게 사느니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본당에 앉아 습관을 따라 형식적으로 기도를 드렸다. 마음은 있는지 없는지 전혀 미동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순간, 섬광처럼 번뜩이면서 그동안 잘 삼키지도 못하면서 억지로 참아 낸 수많은 소화불량의 세월들이 생각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누르려고 했는데 눌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신음 소리가 생각났다. 싸늘하게 식은 할머니를 염한 모습. 함께 보내 왔던 따스했던 시간들. 화장한 할머니를 뿌릴 때 느꼈던 감각들. 그리고 그날 바로 시험을 보러 갔던 그 X 같은 경험들까지.

화생방 훈련 때 가스를 마신 것처럼 참을 수 없는 게 속에서 올라왔다. 억울함이었다. 그리고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가진 단어장 중에서는 욕밖에 없었다. 쩌렁쩌렁하게 그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토했다.

― X발! X 같아! 하나님 정말 싫고 짜증나.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요? 지랄스러워….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신실하다고? 선하다고? 그럼 설명해 봐.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사랑하니까? 꺼져!! 그딴 사랑 필요 없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두 달 동안 가출했다고 생각한 그 마음이 돌아왔다. 몹시 아프기 시작하더니 딱딱한 고체와 같은 마음이 곧 흐물흐물 액체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언어로 기도하지 않았다. 존재 자체를 부둥켜안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쏟아 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솔직함이며, 완전한 쏟아짐이었다. 산화되듯 그렇게 모든 존재가 다 토해지고 나서 시계를 보니 세 시간쯤 지난 뒤였다.

그리고 그 후에 놀라운 회복이 있었다. 마음의 감각이 회복되었고,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 온 소화불량도 놀랍게 사라졌다.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거나, 따지거나, 실망한 것들을 말하거나, 욕을 쏘아 대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쌍욕을 하며 있는 그대로 밑바닥에 있는 깊은 것까지 쏟아부은 그 3시간 동안, 하나님은 나를 꼭 안고 계셨다. 놓지 않으셨다. 그때 살아온 세월에 대해 모든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 고통 속에 함께 울고 계셨던 하나님의 눈물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때 이후로 하나님과 나는 정말 많이 친해졌다. 이젠 무조건 믿지 않는다.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솔직히 하고, 따지고 싶으면 따지고, 야리고 싶으면 야리고, 정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간다. 이전에 착한 기도를 드렸던 나보다 지금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그분의 끝없는 품으로 솔직히 뛰어들자

나와 같은 병을 앓는 분들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솔직함은 구타당해서 침묵하고 있고, 여러 가지 문제와 사건들의 심문 속에 공식적으로 해야 할 말들을 기계처럼 진술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들 말이다. 근데 그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좋은 신앙의 모습인 걸까?

교회에는 그 어느 곳보다 꼰대들이 많다. 아플 때는 아파하고, 힘들 때는 힘들어하는 게 정상인데,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감사하라고 한다. 기도할 수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한다. 아플 때 아파할 수 있도록 그냥 두면 안 되는 건가? 꼭 답을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어지간히 힘들 때는 힘내라는 말이 위로가 되지만, 정말 힘들어 죽을 것 같을 때는 힘내라는 말이 도리어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이 충분히 잘 힘들어할 수 있게 기다려 주고 믿어 줄 수는 없는가? 무조건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만이 과연 좋은 신앙인가?

하나님은 그런 꼰대가 아니다. 아플 때는 아파해도 된다. 힘들 때는 힘들어해도 된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된다. 솔직하게. 존 버니언의 말처럼 "기도는 말을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지 않는가? 온 존재와 욕으로(?) 솔직히 그분 앞에 나아감으로써 꼭 안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처럼 소화불량을 앓는 분들이 그 따스함 속에서 뻥 뚫리는 역사를 맛보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품은 아메리카노 한 잔처럼 좁지 않다. 끝없는 바다와 같아서 우리의 모든 아픔, 슬픔, 욕들까지 그 안에서 깊이 잠기며 익사하지 않는가? 그분의 끝없는 품으로 솔직히 뛰어들자.

그게 바로 답이다

어려운 중에도 교회학교를 섬기며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 내고 이제 막 취업해 첫발을 내디딘 자매님, 학비는 장학금으로 생활은 발톱이 빠지도록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 가며 남들보다 긴 유학 생활을 보내야만 했던 페이스북 친구님, 사회복지사로 취직해서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려 힘쓰는 후배 녀석…. 이들은 파란 싹이 나는 봄 같아야 할 청춘들이다.

지금 우리가 비록 어둡고 답답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있지만, 주변의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파고 곱지 않은 시선에 이리저리 숨고 싶지만, '취준생'이라는 딱지에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싫다는 고백을 했을 때 그 어떤 위로나 훈수도 하지 않고 함께 손을 내밀어 울어 주었던 교회학교 교사들, 귀국해 이런저런 말로 상처받고 좌절했을 때 맛있는 밥이나 먹자면서 할 수 있다고 웃어 주었던 친구들, 부모님마저 아니꼽게 생각할 때 격려와 위로를 주었던 목사님과 성도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아무리 쌍욕을 해대도 나를 꼭 안고 계신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며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내게는 이게 100점짜리 찬양이 아니다.

"하나님 몇 번씩 나를 실망시킨 적 있으시며 가끔씩은 공평과 은혜로 나를 안 대해 주신 적도 있었네."

그냥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우리의 마음을 토해 놓는 것, 그 자체로 100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려고 일을 행하시지는 않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실망하고 그런 원망과 아쉬움을 토해 낸다고 해도 우리에게 실망하지 않으시니까 말이다. 하나님을 깊이 미워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겠는가?

'답' 없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 솔직히 나아가는 것, 그게 바로 '답'이다.

▲ 김파전의 2030 미생 이야기는 매주 화요일 업데이트됩니다. (그림 제공 이현숙)

글쓴이는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송파구의 한 교회에서 '파전'(파트타임 전도사)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동년배 직장인으로 치면 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84년생 서른두 살의 김파전. 비록 전도사님이라 불리지만 세상살이는 '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김파전이, 위로받아야 할 교회에서조차 미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2030들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신학과 이론으로 내린 정답과 같은 '제자도'가 아니라, 2015년 대한민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젊은 크리스천이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삶의 제자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의 제자도'라는 말은 멋지지만, 사실 실제 삶은 김파전의 '파전행전'일 수밖에 없지만요. 

김파전의 이야기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2030세대들이 겪고 있는 리얼한 삶입니다. 어렵고 힘든 미생의 삶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행복을 발견해 가는 이야기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제목은 파트타임 전도사(파전)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행전)라는 뜻으로, '파전행전'이라 지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한 편씩 업데이트됩니다. - 편집자 주  

*김파전의 페이스북 www.facebook.com/mukhyan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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