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사는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의 저자이자, 일상 속에서 구조적·영적 원리를 성찰해 왔던 최규창 씨의 글입니다. 최규창 씨는 <뉴스앤조이>가 연재하는 장로 기획을 보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페이스북 담벼락에 글을 올렸습니다. 이 글은 그의 페이스북 글을 뼈대로 살을 조금 더 붙인 것입니다. 그의 글에서 한국교회 안에 있는 두 가지 모습의 장로를 봅니다. 전문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오래전 내가 다녔던 한 중견 교회는, 20여 년 전 200여 명 되는 성도들의 무리한 헌신으로 제법 큰 교회 건물을 건축했다. 교회가 몇 개 층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학원, 독서실 등에 세를 주었다. 그 덕분에 건물을 밤새 지키는 경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두 명의 노인이 경비를 맡았는데, 그중 한 사람은 오래 전 사고로 손가락 몇 마디를 잃은 독거노인이었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의자 하나 있는 좁고 추운 경비실에서 항상 성실하게 일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0년 전쯤 어느 날 그 노인이 교회의 수석 장로였던 C 장로를 찾아와 울면서 어떤 고백을 했다. 지난 수년간 교회 건물 및 시설 담당인 S 장로에게 명절이나 연말연시 때마다 강제로 돈을 상납해 왔다는 것이었다. 바로 며칠 전에도 찾아와 돈을 가져갔는데, 한 달에 몇 십만 원 받는 급여에서 그거 떼고 나면 자기는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C 장로에게 하소연했다. 경비 노인의 급여는 아마도 건물 입주자들이 내는 관리비에서 지급했겠지만, 그를 고용하고 관리하는 책임과 권한은 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오롯이 교회의 문제였던 것이다.

C 장로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S 장로가 그럴 리가…. 당회 때마다 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해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가장 많이 주장했던 이가 바로 S 장로였고, 자신과도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에 C 장로는 쉽게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가난하고 손가락도 없는 불쌍한 노인에게서 수년간 돈을 뜯어 갔다니 어떻게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경비 노인은 C 장로에게 상납 장부를 보여 주었고,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모욕적인 말들과 종 부리듯 하는 언행에 대해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작년에 입주민의 모욕적인 말 때문에 분신자살한 한 아파트 경비원의 사건처럼, 아마도 그 시점에서 그가 C 장로를 찾은 이유는 돈보다는 심각한 인격 모욕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노인은 S 장로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다. 거짓말이 아님을 직감한 C 장로는 목사와 상의한 후 당회원들과 이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당회로 불려 온 S 장로는 정색하면서 날뛰었고, 다른 장로들은 정확한 사실을 모르니 S 장로의 일방적인 말만 들으면서 할 말을 잃은 채 난감해했다. C 장로 역시 S 장로를 믿고 싶었으나 증거가 너무 명확했고, S 장로의 설명보다는 경비 노인의 말이 더 일관성이 있는 것 같다고 소견을 밝혔다. 그리고 경비 노인과의 대질 확인을 해 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S 장로는 "왜 나를 못 믿느냐",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나의 결백을 맹세할 수 있다"고까지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만약 자기가 결백하면 이 모든 책임을 C 장로가 져야 한다고 압박을 해 왔다.

신앙을 목숨처럼 생각하고 평생을 철저한 자기 검열의 고행으로 살다시피 했던 C 장로는 S 장로의 '맹세'를 듣는 순간, '혹시 경비 노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고, S 장로가 맹세까지 했으니 사실 여부를 떠나 이 문제를 이 선에서 덮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한다. 그가 결백하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맹세까지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만약 그의 맹세가 거짓이라면 ― 당시 고신 교단의 신앙(코람데오)에 따르면 ― 그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인데, 이 교회가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C 장로는 용기를 내서, 당일 비번이었던 경비 노인을 교회로 오라고 연락을 했고 마침내 대질 확인이 이루어졌다. 경비 노인은 처음엔 오지 않으려고 했다. 자기를 모욕적으로 하대하던 S 장로를 대중 앞에서도 직면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C 장로의 강권으로 결국 대질이 이루어졌는데, S 장로는 그 자리에서 노인이 입도 뻥긋하지 못하도록 쉴 새 없이 그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돈이 건네진 정황에 대해서는, 그 노인이 자발적으로 건물 담당 장로인 자신에게 떡값으로 선물을 주었는데, 계속 거절하다가 딱 한 번 받은 적이 있다는 식으로 유야무야 어중간한 실토를 하는 선에서 마무리해 달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나머지 장로들도 대충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S 장로를 거들고 있었고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경비 노인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C 장로는 그 노인의 모습을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고 가장 원초적인 언어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자후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눈물을 쏟으며 자신을 변론하고, 처음으로 S 장로에게 대항하는 모습은 그 자리의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고, 결국 S 장로는 모인 사람들에게 저주의 욕을 퍼부으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말았다. C 장로는 장애인이 될 정도로 고생하면서 70여 년을 살아온 한 인간을 이렇게 깊은 고통과 모멸감 속에 빠뜨린 장본인이 바로 '교회'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기도원을 찾아 산으로 들어가 한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건은 다시 이상한 방향으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 노인은 결국 경비 일을 그만두었고 교회는 적당한 선에서 그에 대한 보상을 했다고 한다. 그가 보상을 원했는지 또는 계속 일하기를 원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교회로서는 그러한 불미스러운 일의 당사자인 그를 계속 일하게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당회원들은 S 장로를 몇 번 찾아갔고, 설득해서 다시 데려오려고 노력했을 뿐, 그 사건을 정식 치리 안건으로 상정도 하지 않았다. S 장로는 C 장로가 자신을 쫓아내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항변했고, 생업도 멈춘 채 교단과 노회를 돌아다니면서 계속 C 장로를 비방하고 다녔다. 모든 분노가 C 장로를 향해 폭발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C 장로는 경비 노인을 찾아가 사죄하고 개인적으로 보상도 해주었으나, 경비 노인은 "장로님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장로님을 보면 하나님 믿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자기의 일은 이제 잊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C 장로는 5년 전에 고인이 되신 나의 아버지다. 평생토록 가정이나 다른 어떤 일보다도 교회를 우선했고, 목사를 받들어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일이라고 굳게 믿으며 일관되게 사신 분이었다. 고신 교단에서 31년간 장로를 지내셨고, 거의 바리새인에 준하는 율법적 삶을 사셨다. 성도들 빚 보증을 밥 먹듯이 서 주고, 언제나 사람을 믿어 주는 바람에 나의 어린 시절은 매년 이사 다녔던 기억밖에 없을 정도로 가정 살림이 어려웠었다. 교회의 온갖 지저분하고 골치 아픈 일은 다 맡아서 해결했고, 그 덕에 어머니는 심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나와 신앙의 컬러가 많이 달라 다툼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을 향한 그 열심과 충성은 내가 세 번 죽었다 깨도 흉내 내지 못할 경지였다. 갑작스런 죽음 이후 교회 성도들 중에는 '내 가족이 죽었을 때보다 더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서 몸져누운 사람들도 있었다.

교회에서 산전수전 겪은 아버지였지만, 위의 사건은 그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고, 이후 S 장로의 비방과 거짓말로 불필요한 오해가 많이 생겨나 아버지의 건강은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심각하게 악화했다. 이 사건에 대해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고, 논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만약 싸운다면 자신의 속은 후련해질지 모르지만 교회는 더욱 난장판이 된다는 것이 그분의 판단이었다. 묵묵히 기도하고 시간이 가게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것이 그분이 당신의 생명을 소모하면서 취했던 평화의 방법이었다. 당시 다른 교회에 다니던 나도 당장 달려가 난장판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을 매일 느꼈을 정도로 억울했는데 그분은 오죽했을까 싶었지만 당시는 그 뜻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것이 옳은 방법인지는 확신이 없다. 그 결과 교회는 다시 평화로워졌지만, 담임목사와 당회는 별로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죄 때문에 온전한 지식과 판단력이 사라진 인간에게, 이제 '완전한 진실'과 '완전한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의 기준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고,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해석하는 스탠스는 모두 다르다. 그래서 나는 사회가 성숙하고 인간성이 진보한다는 것의 한 의미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이 보편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 폭'이 어느 정도 구체화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요즘처럼 공직(후보)자들의 비리가 서너 개는 기본이고, 더 많아도 별 다른 국민적 반발 없이 무마되어 그가 공직에 앉게 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자꾸 보게 되면, 우리는 결국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의 폭이 매우 광범위하고 상대적이라는 데 동의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확실히 우리 사회의 정의의 기준은 불과 몇 년 전에 비해서도 많이 퇴보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절망스러운 것은 '거짓에 대한 관대함'이다. '어떤 부정한 짓을 하는 것'과 '그 일에 대해 거짓말 하는 것', 또는 '그 일을 덮기 위해 더한 일을 계속 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욱 나쁜가. 나는 주저함 없이 후자의 경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금방 드러날 일인데도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하고, 큰소리치고, 눈물까지 보이고, 하나님을 두고 맹세까지 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얼마 전에도 두 시간 만에 드러날 거짓말을, 국민을 상대로 태연하고 자신 있게 하는 고위 공직 후보자를 TV에서 보았다. 그는 결국 무난히 그 직에 임명되었다. 국가 경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런 허물은 덮어 주자는 사람들의 합의가 과연 국가를 위해 이득인지 의문이다. 그리고 그가 정말 경제에 도움이 되는지도 전혀 검증된 바가 없다. 목사와 장로의 비리와 부정에 대해 '교회에 덕이 안 되니 덮어 주자'는 당회의 결정 앞에, 우리는 교회가 정치보다 전혀 나을 바가 없다는 자괴감을 갖게 된다. 차라리 거짓을 말하기로 작정하고, 법정 선서를 거부한 전 국정원장이 더 인간적으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고 실수를 한다. 어떤 인간도 예외는 없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약해지기 때문에 항상 악에 넘어지고 때로는 심각한 부정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사회나 조직은 이런 것에 의해 무너지지는 않는다. 사회는 악한 구조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면역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처럼, 자신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 거짓말하고 더 심한 악으로 대응하는 것은 결국 사회를 무너뜨린다. 그 악은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닌, 자기 의지적이며, 자기 결정적이고, 주도적인 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폐해는 우리를 모두 무너뜨리고 결국 행악자 자신도 패망하게 만들 것이다.

기독교의 미덕인 '용서'는 전자의 경우에는 적용되지만, 우리가 예수님이 아닌 이상 후자의 경우에도 이를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죄도 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사람을 용서할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다. M. 스캇 펙은 귀신이나 사탄이 아니라 '거짓의 사람들'에서 진정한 악의 실체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자녀에게 더 좋은 것이라 믿고 무의식적으로 해 오던 사소한 거짓말들이 아이들의 인생을 심각하게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거짓'을 심은 것이다. 가정과 사회의 가장 치명적인 악은 (영향력이 너무 지속적이라는 의미에서) 바로 '거짓'이다. 그리고 그 아비는 사탄이다.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은 넘어지고 실패한 후에 어떻게 회복하고 일어나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나는 현재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미덕은 '용기'라고 생각한다. 공직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그렇게 좋은 지위를 차지하고 싶다면 할 수 없다. 그들을 인준한 당의 국회의원 수를 국민이 뽑아 줬으니, 소선거구제를 기반으로 다수결 체제 민주주의 국가의 공동 운명을 사는 시민으로서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그것이 옳은가 하는 판단은 유보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사회는 정치와 종교, 학문, 직장에 이르기까지 거짓이 지배하는 세계다. 실패와 불법이 지배하는 세상만이라면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할 것이고, 우리는 매우 바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 실패와 불법이 회개 없이 연장되고 반복, 재생, 증폭되는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세상은 교회를 필요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도 세상의 한 조직으로서 생존하기 원한다면 그 거짓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죄악 된 세상 속에 살 수밖에 없지만, 이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거짓의 앞잡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죄를 단회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고백과 용서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진정한 '기억의 치유'(미로슬라브 볼프)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교회에 진정한 치유가 없다면, 역으로 여전히 거짓이 그것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최규창 /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저자, (주)포리토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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