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주최로 열린 '교회 세습, 신학으로 조명하다'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네 번째 발제문은 현요한 교수의 '교회 세습에 대한 조직신학적 고찰'입니다. 필자에게 허락받아 분량을 줄여 등록합니다. -편집자 주

전 세계적으로 한국은 대형 교회가 많은 나라로 유명하다. 그런데 많은 대형 교회들이 너도나도 세습을 감행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며,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요 일간지에 신문광고까지 내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이제는 교회 세습이 대형 교회들뿐만이 아니라, 중소형 교회들에까지도 번져가고 있다. 교회 세습이 이제 한국교회에서 하나의 트렌드요 관행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같은 기독교인이요 기독교 지도자로서 부끄러움과 더불어 자괴감을 금할 길이 없게 한다.

이 글은 교회 세습이 옳지 않음을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이미 상식처럼 된 일에 관하여, 세속 정치나 공개된 기업에서도 세습을 좋지 않게 보는 것이 상식이 된 사회에서, 새삼스럽게 교회 세습을 반대하는 신학적 근거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곤혹스러운 일이다. 신학대학의 어느 동료 교수가 말하기를,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무슨 대단한 초자연적 능력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상식적인 것을 못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매우 정곡을 찌른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 특히 '교회의 주권' 관점에서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성도들', '시민',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성전(엡 2:19)' 혹은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고전 3:9) 등으로 불려진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의해 모여진 하나님의 백성이다(벧전 2:9).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고전 12:27, 엡 1:23). 이는 교회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며, 그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낸다.

교회를 이렇게 이해할 때, 교회 세습은 교회의 주님의 주되심을 부정하거나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교회를 세습하는 것은 특정 목회자와 그 가문이 교회의 주권을 차지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론, '교회의 표징들' 관점에서

예로부터 교회는 교회의 중요한 특징들을 교회의 '표징(marks)'이라는 용어로 신앙고백에 담아 표현하여 왔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본성을 가진다. 이 네 가지 표징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 교회에 부여된 서술적인 특징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이루어 가야 할 명령이기도 하다. 지상의 역사적인 교회는 완전하지 않다. 그것은 신적 근거를 가지는 동시에 여전히 유한하고 죄인인 인간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 네 가지 표징들을 자신의 행위와 삶을 통해서 드러내고 실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첫째, 교회 세습은 교회의 일치성을 훼손한다. 교회는 하나이다(엡 4:4~6). 교회의 하나 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의 특징이다. 그런데 교회의 세습은 교회 안에 분쟁과 분열을 야기한다. 또한 교회의 세습은 사회가 무어라 하든, 다른 교회야 어찌 되든 자신들의 교회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개교회주의적 발상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아래에서 논할 교회의 거룩성과 보편성을 포함하는 교회 전체의 일치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둘째, 교회 세습은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한다. 교회는 거룩하다. 교회의 거룩함의 근거는 교회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된 사실에 근거한다. 교회의 거룩함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하여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세습은 이러한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한다. 교회의 세습은 교회의 목회직이 무슨 세속적인 권력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교회를 세습함으로써 교회의 거룩함은 권력과 이익을 세습하는 속됨으로 왜곡되고, 거룩한 섬김의 직무는 지배하고 군림하는 권력으로 왜곡된다.

셋째, 교회 세습은 교회의 보편성을 훼손한다. 교회는 보편적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본래 'catholic'인데,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 'kata'와 'holos'의 합성에서 온 말로서, 전 세계에 있는 전체로서의 교회를 가리키며, 이는 교회의 전체성, 우주성 혹은 보편성으로 이해된다.

교회의 보편성은 또한 공공성(publicness)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회 세습은 이러한 교회의 보편성과 공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이다. 교회를 세습하는 것은 교회의 보편성과 공공성을 해치고 교회를 사유화(私有化)하는 일이다. 교회 세습은 교회를 사적인 단체로 만들어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하는 것이며, 교회를 공공성을 상실한 "그들만의 교회"가 되게 한다. 곰탕집을 하던 부모가 그 업을 자식에게 물려주어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데 왜 교회는 안 되는가? 그것은 바로 교회가 그런 사설 자영업이 아니고, 보편성과 공공성을 가지는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세습은 교회의 사도성을 훼손한다. 교회는 사도적이다(엡 2:20). 교회가 사도적이라는 말은 교회가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에 기초하여 있으며, 그 복음을 계속해서 전파하도록 보내심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사도성은 사제나 목사들에게 안수를 통해 부여된 특권이 아니라, 교회가 전파하는 복음이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과의 내용적 연속성을 가지며, 계속 그 복음을 전파할 사명이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 세습은 결과적으로 특정 가문의 목회자만이 그 교회에서 복음을 설교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교회를 사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특정 가문의 단체로 변질시킨다.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핵심 메시지인 하나님나라를 전파한다. 우리의 신학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선포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런데 우리의 신학은 우리의 말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와 행동과 삶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주 그리스도는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다(계 17:1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왕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그리스도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낮추고 인간의 모습, 종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요, 섬기는 지도자이며 섬기는 왕이셨다. 그런데 오늘날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 교회들은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올바르게 반영하고 있는가? 또 담임목사직의 세습은 하나님나라와 그 정의를 올바르게 반영하고 있는가?

교직자 소명론, 청빙론의 관점에서

교회 세습에 대한 비판론이 맹렬하게 일어나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목회자 청빙(부르심)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세습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칼뱅은 교역자(주로 목사)가 정식으로 세움을 받는데 있어서 두 가지 요소를 말한다. 즉, 각 사람이 하나님 존전에서 의식하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소명, 즉 내적 소명(inner calling)과 신자들(교회)이 어떤 신자의 자질과 자격을 보아서 선택하는 외적 소명(outer calling)이 그것이다.

먼저 내적 소명에 대하여 살펴보자. 목사의 자녀가 다시 목사로 부름 받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세습하는 교회의 모든 목사들이 과연 그 부친이 사역하던 바로 그 교회를 향한 진실한 내적 소명을 받았는가?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것보다 낫다는 극히 사적인 동기가 지배적임을 부인하기 어렵지 않을까?

외적인 소명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세습을 감행하는 교회들은 그 결정 과정이 절차상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외적 소명의 정당한 절차를 밟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 매체는 세습한 교회들의 청빙 과정에 여러 가지 불법, 탈법의 사례가 있었음을 보도하고 있다. 또한 외부인 후보자에겐 아예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정당한 청빙인가? 또한 외부인 후보자가 있어도, 아들 목사가 이제 원로목사가 되는 부친의 카리스마적인 영향력의 후원을 받고 있는데 공정한 심사가 가능할까? 또한 세습이 예상되는 자녀가 이미 그 교회 안에서 교역자로 일하면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지지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설사 외부인 후보자가 있더라도 과연 동등한 심사가 가능한가?

전체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고전 10:23)"라고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다 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세습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해서 세습을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세습을 하지 않는 것이 전체 한국교회를 살리는 일이다. 세습을 하려는 아들이 정말 그렇게 훌륭한 분이라고 하면, 그분은 독립적으로 자신의 길을 갈지라도, 다른 많은 교회들이 그를 청빙하기 원할 것이고, 훌륭하게 그 일을 감당해 낼 것이다. 혹은 스스로 나아가 개척을 할지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한국교회는 더 생기가 돌고, 더 희망차지 않을까?

현요한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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