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구절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왜?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믿는 자들을 지켜 주시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를 마치 아버지가 아이들을 건사하는 것처럼 먹이시고 지키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맞습니다. 본문은 그래서 참 좋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이다, 아멘,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말씀인데, 문제는 무엇이냐? 우리가 그것을 쉽사리 내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말씀, 믿어야지 하면서도 그것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문제인 것입니다. 좋은 말씀이긴 한데, 현실로 돌아오면 그게 말이 되나, 하는 경우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그러면, 우리 한번 과거로 돌아가 어린아이였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도, 어렸을 때에는 당연히 모든 걱정 근심거리를 다 부모님에게 맡기고 살아왔습니다. 내 근심 걱정을 부모에게 이야기하고, 그러면 그런 아이들의 근심과 염려를 들은 부모님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어머니는, 직장에 다니니 저녁 늦게야 아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음날 수업 준비를 위해서 준비해 갈 물품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어머니가 낮에는 직장에 있으니 필요한 것들을 말하지 못하다가 저녁에 퇴근한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머니 부랴부랴 문방구에 뛰어가 사다 준비를 해 줍니다. 어머니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늦은 시간에도, 시간을 따지지 않고 준비를 해 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실상은 우리 어릴 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부모의 보살핌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에는 근심을 모두 부모님에게 맡기고 살아왔습니다. 당연히 그런 근심과 걱정은 모두다 아버지 어머니가 맡아 처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인이 되어서, 장가들고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는 이제 상황이 바뀌었지요? 우리들이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서 아이들의 근심거리, 걱정거리를 맡아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힘닿는 데까지, 자식들을 위해서 무언가 해 주고, 더 해 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라는 것.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어린 시절에 그런 걱정을 안 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한번 되돌아본다면, 이런 인생 순환의 법칙이 무언가 어떤 가르침이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 들지 않으시는지요? '어, 그러고 보니 나도 어릴 적에 그런 식으로 컸고, 또 내 아이들은 그렇게 지금 내가 해 주고 있다면, 우리 인생의 시스템이 그렇게 되는 것이구나' 이런 깨달음이 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어릴 적에 그렇게 했듯, 지금도 나를 그렇게 돌봐 주는 어떤 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저는, 가끔씩 힘들 때,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납니다. 이럴 때 아버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어머니라면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해 주셨을까? 아버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나에게 좋은 방향을 제시해 주실 수 있을 것인데, 등등. 저는 하나님이 그런 아버지라 생각합니다.

저의 어려움을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눈길로 저를 바라보시면서, '너의 어려움을 다 안다' 하시는 부모님처럼 나를 살펴보시며 보살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그 다음 말이 결론입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도, 들판의 풀들 꽃들도 하나님이 몸소 기르시는데 하물며, 너희들은 어떠하겠느냐? 지켜 주시고 돌보시니, 염려할 것 없다는 것이지요.

2.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에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로

그런데 본문을 읽다가 문득 이상한 대목이 눈에 뜨였습니다. 25절에 염려하지 말라 하더니 31절에서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절)."

두 구절은 아무리 읽어 봐도 같은 내용입니다. 더군다나 구절을 이끌어 가는 첫 마디도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문장을 시작한다는 말은 그 구절의 내용이 결론적이라는 것일 텐데, 같은 결론을 반복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요. 그렇게 같은 문장을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한 경우, 반복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반복한다는 것은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그 구절들을 반복해서 말씀하시면서 강조하시는 것일까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그것밖에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그 이유를 몇 가지 열거하신 다음에 다시 한 번 염려하지 말라고 반복하시면서, 그것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영어 성경으로 읽어 보았더니, 뭔가 다릅니다. 주어가 달랐습니다. 무엇을 먹을까라고 말하는 동사의 주어가 달라진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25절에는 한글 번역 그대로 예수님이 너희(2인칭 복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장 형식은 명령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Therefore I tell you, do not worry about your life, what you will eat or drink; or about your body, what you will wear. Is not life more important than food, and the body more important than clothes?"

그런데 31절은 한국어 성경과는 달리, 주어가 달라집니다.

25절은 'what you will eat or drink'였는데 31절에서는 'What shall we eat?'로 바뀐 것입니다. 즉,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에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로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31절에서 무언가 달라졌음에도 한글 성경은 바뀐 것에 주의치 않고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25절과 동일하게 번역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너희들'(2인칭 복수)에게 명령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1인칭 복수)로 바뀐 영어 성경 구절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염려하지 말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혹은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라고 말하면서 염려하지 말라."

우리 한글 성경은 주어에 관심을 두지 않고 번역을 해 놓아 25절과 31절의 구절이 똑 같이 여겨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뿐만 아니라 원어 성경에도 그렇게 주어를 달리하여 번역하고 있는데, 주어를 달리하고 있으니 분명 뜻이 다를 것입니다.

3. (우리 모두) 염려하지 말자

그렇게 주어가 바뀐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2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이라고 2인칭 복수인 상대방에게 말씀하십니다. 몰려온 사람들을 향하여, 그러니 예수님의 앞(상대편)에 서서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들'이라고 부르시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25절로 말씀을 시작하신 다음에 그렇게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열거하시며 조목조목 그 이유를 들어 설득에 설득을 다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26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왜냐면 하늘의 아버지가 다 돌보시기 때문이다. 하늘의 새들을 보고, 들의 들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28절)."

그렇게 하신 다음에 31절에는 다시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이번에는 주어를 바꿔 '우리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문장의 내용은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우리 염려하지 말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듣고 있는 청중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가상하여 언급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라고 걱정하며 말할 것인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언어 습관을 보면 상대방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나 실상은 말하는 사람의 의중이 들어 있는 말. 같이 (동참)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는 말이 있습니다. 예컨대, '밥을 먹어라' 라는 문장과 '밥을 먹자'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다. 두 문장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말입니다. '밥을 먹어라'라는 말은 말하는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 다만 말을 듣는 상대방에게 먹으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밥을 먹자'는 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모두 밥을 먹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밥 먹자'라는 말 앞에 '우리'라는 말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밥 먹자' 31절은 바로 그런 식의 발언입니다. 그렇게 주어를 바꾸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데에는 바로 예수님의 의중이 반영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염려하지 말라"고 상대방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염려하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이라고 말씀하실 때와 '우리는'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너희'에서 '우리'로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듣는 청중을 향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26절~30절까지 그렇게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열거하시며 조목조목 그 이유를 들어 설득에 설득을 다하십니다. 설득을 하신 다음에는 그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고 그 얼굴에 어떤 기색 –하나님의 보살핌을 확신하고 염려하지 않겠다는 다짐하는–을 읽으신 다음에, 그들을 가슴으로 꼭 안아 주시고 품어 주시면서 "우리 염려하지 말자, 먹는 것 마시는 것 입을 것, 우리 전혀 걱정하지 말자"고 속삭여 주시는 것이 바로 3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다만 '상대방'으로 보지 않으시고 같은 '우리'로 칭해 주시는 은혜.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며 모든 것을 맡기고 의탁하는 믿음을 가진 예수님은 우리들을 자기 자신처럼 여기시며, 같은 편으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희'와 '내'가 아니라 '우리는'- 이라는 말로 염려를 그치도록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권유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25절과 31절은 한국어 성경으로 읽으면 같은 말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

25절에 이어 31절에서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31절을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우리 모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자."

'하지 말라'와 '하지 말자'의 차이, 글자 하나 차이이지만 그 의미는 천지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상대방으로 여겨, 그저 말을 던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같이 그런 염려를 하지 말자고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면서, 어깨를 다독거려 주시면서, 우리 염려하지 말자, 우리 먹는 것 마시는 것 가지고 염려하지 말자, 우리 앞으로 그렇게 하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염려하지 말라 vs 염려하지 말자

그런데 그 말 후에 바로 이어서 32절에는 다시 '너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

여기에서는 왜 '너희'라는 말을 사용했을까요?

일인칭 복수(우리)에서 다시 이인칭(너희)인 너희들로 돌아간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 32절에서 강조점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 나 예수의 아버지도 되시며 우리의 아버지도 되지만, 바로 너희, 너의 아버지이시다. 각자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니 각자 너의 아버지인 하나님이 바로 '너'에게, 너에게만, 너 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너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니 염려하지 말라. 너의 아버지 하나님은 세상 살면서 우리에게 이러한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라는 말을 강조한 것이지요. 너희 하늘 아버지가 바로 너희에게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1)."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나'의 필요를 아시는데 우리는 무슨 염려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하여 예수님이 친히 우리에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우리 모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자"고 하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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