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힘 있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폭력의 방편으로 사용하는데 그래서 '손 좀 봐 준다'는 말이 그런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데 반하여 능력 있으신 예수님은 과연 그 손을 어떻게 사용하셨을까요? 예수님이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셨는가를 안다면 우리들은 당연히 그분의 방법을 따라 해야 하기에 그런 생각이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유난히 손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수님도 우리 사람들 손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셨나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까요?

I. 사람을 피하시는 예수님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막 3:9)."

예수님께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하시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예수님은 당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모두 다 용납하실 분 같은데 본문 9절에는 그러한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배를 띄우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계신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이상하지요? 사람들을 예수님은 피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9절 전반부에, 그 이유를 일차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밀치고 하니까, 그것을 피하시기 위해서 배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밀치고 하는 것일까요? 10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예수님이 사람들을 피하여 배 위에 앉아 계신 이유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도록 많은 사람이 몰려왔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했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예수님을 만져서 병에서 낫고자 그랬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라." 이 말이 개역한글판에는 "핍근(逼近)히 함이더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핍근히'란 말은 매우 가까이 달려든다는 말로 저돌적(猪突的)으로 달려드는 무리들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병자들이 예수님이 위험할 정도로 예수님에게 몸을 던지고, 달려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피하여 배에 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10절의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라"이란 말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만진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손을 대어 여기저기 주무르거나 쥐다는 뜻인데 손을 내밀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지고자 했을까요?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이미 나와 있습니다. 바로 10절 상반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만지고자 했던 이유는 예수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 소문이 사람들이 예수에게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II. 다가옴을 허용하시는 예수님

그러나 그것이 이유의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그것만으로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그리 많이 몰려왔다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치유 능력이 있다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만지게 하도록 했던 것은 그들이 느끼기에 예수님의 마음 씀씀이가 예수님에게 다가가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7~12절은 앞에 있는 구절들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1~5)."

이 구절에서 우리가 유심히 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이 일이 벌어진 그날이, 그리고 그 시간이 바로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의 날짜 계산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밤12시부터 다음 날 밤 12시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는데 반하여, 이스라엘에서는 그날 해가 진 시간부터 다음 날 해가 질 때까지가 하루입니다. 마가복음 3장 1절 이하의 구절에서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아직 안식일이고, 해가 떨어지기까지 몇 시간이 남아 있는 줄 모르겠으나, 그때까지 기다리면 될 것을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지나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누가 거기에 대하여 가타부타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오히려 4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물으시고는 그들이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잠하니까 그 시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을 각오하시면서, 예수님은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5)."

예수님의 마음은 '그런 것쯤 상관치 않겠다, 너희들 눈에는 안식일이 중요한 줄 몰라도 내 눈에는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손 마른 사람,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겠느냐, 그러니 그런 고생을 한 시라도, 아니 일 분 일 초라도 더하게 하는 것은 내 마음이 아프다. 그러니 이런 시비쯤은 내가 기꺼이 안고 가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를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셔서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 결과 8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큰일을 듣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불쌍히 여겨 주신다.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시는 분이다. 폭력이 아니라,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고, 우리에게 손 내밀라신다. 그러니 우리도 기꺼이 손을 내밀자' 하면서, 예수님을 만지려 한다는 것입니다.

III. 손잡아 주시는 예수님

사람들은 어쨌든 진정을 알아주게 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진정을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알아주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보고 그에게로 몰려온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향하여 진정 긍휼의 마음으로 치유의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은 그저 그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장 39절 이하를 보면 그 모습이 더욱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39~42)."

41절,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이 그 나병 환자를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를 잘 표현해 주는 구절입니다.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다음 구체적인 행동이 있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예수님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자기 앞에 있는 나병 환자를 향하여 손을 뻗었습니다. 손을 내민 다음에는? 그 나병 환자를 향하여 뻗은 손이 멈칫 멈칫 머뭇거린 것이 아니라 "그에게 대시며", 즉 그를 만졌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나병 환자들은 결코 다른 사람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길을 가다가도, 저만치 사람이 오는 기척이 들리면 자기가 나병 환자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만지기는커녕 가까이 하기에도 너무 먼 당신들이 바로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런 나병 환자를 예수님은 손을 뻗어서 만지고 그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그 만짐은 그를 싸매고 보듬고 그 아픔을 같이하는 행동입니다. 그 마음이 그의 손을 움직여 그 나병 환자를 잡은 것입니다. 비단 겉으로 나타난 사건이 그랬을 뿐만 아니라, 그 행동, 그 기적의 이면에는 예수님의 마음, 그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규례를 과감히 넘어 서십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은 안식일 규례를 뛰어 넘어,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 결과 오늘 본문 10절,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오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래서 예수님이 아픈 사람을 얼마나 불쌍히 여겨 주셨는가, 그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 기초하여 손을 뻗고, 그 아픈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 아픈 마음을 어루만진 결과, 그렇게 사람들을 몰려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몰려온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몰려올 때, 단순히 병 고침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 또한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아픈 마음, 아픈 육신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예수님에게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는 '하이 화이브(Hi Five)'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하이 화이브는 외국 관습이니까,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해 볼까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그 뜻을 알고 계시지요? 두 사람 사이가 완벽하게 통한다는 말입니다. 마음도 통하고, 행동도 통해야만 동시에 손바닥이 마주쳐 울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말은 완벽한 조화, 완벽한 어울림, 완벽한 소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완벽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병자들을 정말 불쌍히 여기며, 저미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주셨고 그 마음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기꺼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을 통해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손을 내밀어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모두 그를 향하여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그의 따뜻한 마음을 잡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하여 우리 믿는 사람들이라도 그런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며, 나의 가진 것으로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 주며 손을 맞잡고 여기 저기 박수 소리 울리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런 박수와 어울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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