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보면 싸우는 것쯤은 어떤 부부에게나 있는 일이지요.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는데, 부부 싸움을 둘러싸고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역사학자의 기록에 의하면(한홍구, <대한민국사> 중에서) 예전의 박정희 대통령도 부부 싸움을 한 번 하면 그 정도가 아주 심각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화가 나면 재떨이를 던지곤 했는데, 육영수 여사의 이마가 깨져서 그 흉터를 가리느라고 앞머리를 한쪽으로 내리고 다녔는데, 그게 유행이 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고, 또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각각 성을 따서 '육.박.전'이라 불렀다는 말도 있습니다.

부부 싸움을 둘러싸고 이런 유머도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부부 싸움을 하고는 며칠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아침 일찍 회사를 가야 했기 때문에 테이블 위에 메모를 남겼습니다. "아침 6시에 깨워 줘!"라는 메모를. 부인에게 먼저 말을 걸기 싫어서 그랬겠지요. 다음날 아침 남편이 일어나 시계를 보니 이미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남편이 부인을 찾으러 일어났는데 침대 머리맡에 메모지가 놓여 있습니다. 거기엔 "6시예요. 빨랑 일어나서 출근해요!"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쪽지도 있었습니다. "6시 10분이에요, 늦겠어요."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려고 한다면, 말을 해야지요. 쪽지 대신에 흔들어 깨우든가 아니면 소리를 지르든지.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든가 해서 귀에 자극이 가게 해야 하는데, 아무리 잠귀가 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는 사람에게 쪽지를 들이밀어서 깨우려 한다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이지요. 따라서 귀가 들리는 사람에게는 음성언어인 말로 해야 서로 간에 의사가 통할 것입니다.

I.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에바다!"

자, 그렇다면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의사가 전달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말을 하는 대신에 다른 방법으로 의사를 전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희한한 장면이 나옵니다. 34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지금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에게?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32절)."

귀먹은 사람에게 뜻밖에 예수님은 "에바다"라고 소리를 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귀먹은 사람은 당연히 듣지 못할 것이니, 이런 사람에게는 "에바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부부 싸움하고 나서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은 아내처럼, 쪽지에 '에바다'라고 써서 보여 주는 것이 더 합리적인데, 예수님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소리 나는 언어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아서 과연 이게 확실한가, 하고 다시 한번 본문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래도 내용 중에 어디 하나 다른 틈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35절에 그 귀먹은 사람이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고 말하니 예수님은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하셔서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신기하지요?

자,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먼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말씀을 그 사람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것은 아닐까요? 왜냐면 36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사람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벙어리에게 말한 것은 별개로 하고 그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에바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무언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신 것이라는 말이지요. 예컨대, "내가 하는 이 말을 정작 그 사람은 듣지 못하지만 너희들은 듣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이 말은 그냥 귀로 듣는 차원의 말이 아니라 마음의 귀를 열고 내 말을 들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이런 생각은 틀린 것 같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34절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라고 말의 대상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들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저의 그런 생각이 틀린 것이지요.

II. 더구나, 따로 데리고 가셨다

제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지인들과 마가복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이 목사는 성경을 다 안다는 생각들을 하시는데, 오해입니다. 아니, 다른 목사님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저에게는 그 말이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마가복음을 다시 공부하면서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33절에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가셨다'고 되어 있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이 있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이 여기 왜 있지? 평소에 읽을 때에는 그냥 스쳐 지나갔던 대목인데, 평소에 읽을 때에는 그 말 속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말인데 다른 사람의 눈에 이상하게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려고 했다는 그런 생각에 대입해 보니 제 생각은 정말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에바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라면 굳이 그 사람을 다른 곳으로 따로 데리고 가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시 예수님은 왜 그 사람을 다른 곳으로 따로 데리고 가셨을까, 하는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왜 그를 따로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셨을까, 그 이유를 생각하다 한국 기독교사에 굵은 발자국을 남긴 목사님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해방 전후에 김익두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에 관련된 일화입니다.

그분이 사시던 황해도 신천읍에 돌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 다리 옆에는 앉은뱅이 거지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잊지 않고 꼭 얼마의 돈을 쥐어 주고 지나갔습니다. 때때로 김익두 목사는 '나도 베드로처럼 저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만 있다면 근사할 텐데' 하고 늘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적한 오후에 김익두 목사가 그 다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인적이 드문 시간이어서 매우 조용한 때였습니다. "한 푼 적선 합쇼!" 김익두 목사를 보고 앉은뱅이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은 인적도 뜸하고 마침 보는 사람도 없으니 이럴 때 한번 저 앉은뱅이를 일으켜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에 다시 한 번 주위를 빙 돌아다보니 마침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행여나 사람이 보는데 시도하였다가 만일 실패하기라도 하면 무슨 망신일까 싶어 아무도 없을 때 한번 시도해 보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때가 마침 좋았고 기회가 좋다고 생각되어 그 앉은뱅이에게 다가가서 불렀습니다.

"날 똑똑히 보시오!"
"예? 나요?"

앉은뱅이는 김익두 목사의 얼굴을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대답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앉은뱅이의 손을 꽉 움켜잡고 그를 주목하면서 큰 소리로 명령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외치면서 그를 힘껏 잡아 일으켰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살펴보니 앉은뱅이가 전혀 일어설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만 부끄럽고 무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순간 번쩍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왜 내가 믿음으로 하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았는가? 이런 연약한 믿음으로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키겠다고 나섰는가? 참 한심한 노릇이다." 생각할수록 자신의 행위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는 그 길로 예배당으로 뛰어 갔습니다. 강단 아래 무릎을 꿇고 깊이 탄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자신의 믿음이 부족함을 탄식하며 진심으로 깊이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목회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행위인가를 깨닫고 7일을 금식하며 철야로 기도했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쳐 한번 명성을 얻어 보리라'고 생각했던 허망한 명예욕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사랑과 긍휼의 눈물이 한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기도 후 김익두 목사는 그 앉은뱅이를 다시 찾아가, 함께 교회에 가 기도하던 중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주위를 한 바퀴 휘 둘러보고 기도했을 때는 실패했으나 회개하고 믿음으로 기도할 때는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혹시 그 목사님처럼 예수님도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데에서 고치시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물론 아니지요, 예수님은 적어도 그런 분은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 듣지 못하는 사람을 따로 데리고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데로 가셨을까요? 참, 복잡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그 듣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가고 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니 대화라기보다는 어떻게 해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III. 소통의 방법은 가지가지

저도 가끔씩 우리 병원에서 그런 경우를 만납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회사에서 일하다가 다쳐서 많이 입원하는데, 그중에는 한국말을 배워서 능숙하게 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정말로 한마디도 못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시도해 보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럴 때마다 저는 절망하며 뒤돌아서 오는데,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더군다나 듣지 못하는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셔서 귀를 열리게 하셨을까? 참 저도 배우고 싶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사소통을 주제로 하여 마가복음 공부 시간에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아기를 키우는 엄마는 언어 해독의 천재다. 그 실력이면 이집트의 상형문자 정도야 식은 죽 먹기로 해독해 낼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한두 살 아기의 옹알이에서부터 겨우 발성이 되는 아기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는다. 그뿐인가 그저 끄적거려진 몇 줄의 선, 곡선을 가지고 아이가 표현하고자 한 것을 용케도 읽어 낸다.

어떤 오지 탐험가의 이야기에 의하면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 오지 마을에 갔을 때, 영어고 불어고 스페인어고 간에 전혀 통하지 않으므로 그저 그들의 표정과 동작을 살펴서 마음을 읽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한데 그 마을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그 어느 곳에서보다 서로의 소통에 막힘이 없고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떠나올 때는 너무 정이 들어서 서로 안고 펑펑 울지 않을 수 없었단다. 오히려 귀국해서 만난 모국인들끼리 말이 통하지 않아 벽을 느꼈다던가.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언어' 즉 들을 수 있는 사람끼리 사용하는 언어를 가지고 그 사람과 소통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하늘과 교통하시고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하신 것입니다. 바로 34절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다는 말을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으로 해석하는데, 저는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무척 안타깝게 여기셨다. 따라서 그를 따로 데리고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서 그와 단둘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와 대화하고 소통하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 그 사람과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갖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 환자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온 피동적 인물이었고 자신 스스로는 고치려고 하는 의지가 거의 없던 상태였을 것이니, 예수님께서는 그 무감각하고 피동적인 인격에게 당신의 존재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시고 그로 하여금 믿음의 반응을 보이게 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IV. 예수님의 소통법

이렇게 해석을 하고 나니 34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혼신을 다하여 그에게 가장 잘 통하는 언어로 말씀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그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통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통하니 에바다, 곧 열려라 하는 말이 그대로 그 사람에게 응답되어 35절의 말씀처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에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자기 생각만 막무가내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와 인격적으로 교제하시며, 그런 다음에 그에게 자기 나름의 소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우리들은 흔히들 이렇게 합니다. 상대방은 전혀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선언하듯이 대화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우리끼리, 즉 듣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사이에도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무슨 소리야?" 우리가 흔히 화나거나 어이없을 때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한 말이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따라서 상대방이 우리에게 하는 행동이나 반응이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다르게 나올 때 우리도 모르게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소통의 방법, 다른 사람에게서 떨어져서 일대일의 관계를 만들고, 그 사람을 최대한도로 이해하면서 또한 그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다가가는 그 방법이야말로 우리가 따라 해야 할 것이라 봅니다.

또 하나 그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평생을 듣지 못하며 살아 온 사람, 따라서 다른 사람과 단절되어 살아오던 그에게 예수님은 따뜻한 미소로, 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언어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멀리 갈 필요 없습니다. 저는 우리 병원에 입원하여 잠시 동안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단절되어 상처와 병과 싸우는 환우 분들이 바로 그러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픈 것을 누가 알아줍니까? 내가 아파서 눈물 흘리는 것을 남편일지라도, 아내일지라도, 제대로 알아줍니까?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부부 싸움을 한 부부는 그래도 쪽지라도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했는데 이건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이니 얼마나 안타깝고 혼자서 답답합니까?

그럴 때 찾아오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혼자인 것을 아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과 통하지 못함을 아시고 찾아오셔서 인격적으로 교제하시고 더 나아가 에바다, 하시며 우리의 문제를 풀어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본문 37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한 것처럼 그러한 간증이 우리 입으로 흘러나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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