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4년 1월 28일, 주현절 후 넷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11 / 신명기 18:15-20 / 고린도전서 8:1-13 / 마가복음 1:21-28

Olafur Eliasson, 'The weather project'.
Olafur Eliasson, 'The weather project'.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 바닷가로 오신 예수는 어부의 삶을 살아온 제자들이 매일 새벽 맞이하는 '오늘의 파도' 혹은 '오늘의 날씨'처럼 나타나셨습니다. 외부의 세계를 철저하게 경외하는 것은 물 위에서 평생을 보내야 했던 어부들에게는 익숙한 방식이었으니까요. 그렇게 가리워진 길로 예수를 따라나선 제자들을 기록한 마가는 곧이어 그들이 가버나움의 한 회당으로 들어갔다고 장면을 전환합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갈릴리 바다와는 대비되는 회당으로 급격히 장소가 바뀌지요. 어떤 내부의 공간 안, 그곳은 말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한쪽에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너도나도 심각한 얼굴을 하며 앉아 있습니다. 햇볕과 모래가 섞인 바람을 맞으며 살았던 제자들의 그을린 얼굴은 회당 안을 구석구석 누볐지요. 회당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얼굴들도 부지런히 선지자 예수를 좇았습니다. 회당 안은 군데군데 기둥이 있고 소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울렸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막 1:21-22)

이전에 없던 소리

이전에 없던 소리들이 회당의 기둥을 반사시키며 울려댔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율법학자들에게서 나왔던 소리와는 달라 사람들은 놀라움에 웅성거렸고, 웅성거리는 소리는 내면의 들썩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것이 바깥으로부터 사람들의 내면으로 들어간 것은 예수가 바닷가의 배를 탔던 어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 것과 다름없었지요. 바깥에서 들어온 새로운 생기(生氣)는 회당 안을 휘젓습니다. 회당의 천장과 벽에 부딪치는 활발한 기운 앞에서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옛 깨달음들은 무용지물이 되기도 했고, 혹은 그것을 무너뜨리고 재건하기도 했습니다. 죄의 어두운 동굴 같았던 이들이 맞이한 이 말씀은 어떤 존재를 저항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가는 그곳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해요. 소리치는 존재도 물론 새로운 빛의 기운을 보고 놀란 이들 중에 한 명이었지요.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막 1:24)

소리치는 사람은 외부로부터 당도한 예수의 소리에 극렬하게 저항합니다. 회당 전체의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듯이 '나'와 '당신'이 아닌 '우리'와 '당신'으로 표현하며 순식간에 선을 달리 긋습니다. 두려움은 자신의 과거가 부정당할 때 극심합니다. 부정당한 나는 '우리' 안에 숨어 이름 없는 자 같이 되어 '우리'로 몸집을 키워 마주한 빛 앞에 맞섭니다.

앤 린드버그의 '긴 태양'. 사진 출처 annelindberg.com
앤 린드버그의 '긴 태양'. 사진 출처 annelindberg.com
우리를 멸하러 온 당신, 우리와 상관없는 당신

'나' 가 '우리' 안에 숨어 버리면 마주한 당신과의 관계는 모호해집니다. 관계는 개인과 개인의 서사로부터 발생하고 예수는 개인의 역사 안으로 걸어 들어오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 안으로 숨어 들어간 내가 '익명의 존재'가 되어 버릴 때, 내 앞에 있는 타자와는 관계를 맺기 어려운 상태를 취할 수 있게 되지요. 타자와 능동적인 조우가 어려울 때, 대중의 속으로 숨어 버리고픈 욕구는 나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기 위하여 취하는 방어적 선택 아니겠어요. 익명의 존재가 된 나는 신념도 가치도 정체성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 없는 존재가 되어 나를 노출할 수 없지요. 그러나 숨은 무리 안에서 상대를 몰래 살펴볼 수 있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 안에 둘러싸인 익명의 존재는 이윽고 외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 뒤에 숨겨진 말은 외치지 않아요.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못 찾겠지만요.'

소리치는 아우성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회당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막 1:24)는 '너희들'이 아닌 '너', 개인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가십니다. 엄한 목소리는 대중이 아닌 한 사람에게 강하게 직선으로 나아갑니다. 회당을 이리저리로 굴절하며 울렸던 거룩한 말씀은 이제 한 사람에게로 모아집니다.

잠잠하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는 발화하는 존재 속에 있는 다른 존재에게 말을 거십니다. 꿰뚫어 보는 분의 시선은 귀신 들려 소리 지르는 자가 아닌, 그 안에 또아리를 틀고 들어앉은 존재에게 가 있지요. 샅샅이 살피시는 이(시 139:1)의 눈길은 미동 없이 날카로운 메스처럼 그 존재를 구분하여 부르고 쫓아내십니다.

잠잠하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막 1:25)

회당 안의 모든 눈동자들은 예수와 귀신 들린 자에게 가 있습니다. 수많은 눈동자가 저마다 흔들리고 영혼의 빗장이 열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해요. 자복하는 영혼들이 나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주저앉아 놀라움에 벌벌 떠는 이들의 울음소리도 들리곤 합니다. 그리고 이 장면이 영 못마땅한 서기관들과 율법 선지자들도 기둥 뒤 어딘가에 있지요. 예수를 따라나섰다가 회당 어딘가에서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제자들은 한 존재를 향해 걸어오시는 예수를 다시 한번 마주칩니다. 손님처럼 내 인생에 깊숙히 들어오신 주님을 한 발자국 더 깊은 곳에서 만나니, 내 안의 그분이 머무실 거처는 조금 더 넓어집니다.

사랑하는 영혼아, 네 몸을 단장하여라

 

사랑하는 영혼이여, 아름답게 단장하라

죄의 어두운 동굴 떠나 밝은 빛 가운데로 들어와 찬란히 빛나기 시작하여라

구원과 은혜로 가득한 주님이 이제 너를 그 손님으로 초대하려 함이니,

하늘을 다스리시는 그분, 이제 네 안에 머물기 원하시네

 

(Schmücke dich, o liebe Seele 코랄 가사)

갈릴리의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의 인생 안으로 걸어 들어가신 예수는, 회당에서 만난 귀신 들린 자에게도 그렇게 존재의 심연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십니다. 영혼 안에 있는 다른 존재를 불러 쫓아내시고, 잠잠하고 평온할 것을 명령하시지요.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권위 있는 새 교훈(막 1:27)이라고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두웠던 동굴 같은 마음에 빛이 조명되며 그 안의 거처가 새롭게 되는 풍경을 마주합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사랑하는 영혼아, 네 몸을 단장하여라 Schmücke dich, o liebe Seele(BWV654)'를 통해 내면을 가꾸어 그 안에 거하실 예수의 거처를 마련하라는 오르간 코랄을 작곡합니다. 그리고 이 곡이 오늘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함께 들어 볼 곡이에요.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바이마르 시기(1708~1717) 18개의 코랄을 작곡하는데요. 그리고 훗날 라이프치히에서 이 곡들을 다시 교정하는 일에 착수합니다. 그때는 바흐가 작곡가로서 말년의 시기를 보냈던 1744년쯤이죠. 그는 정성을 다해 30여 년 전에 작곡했던 곡들을 다시 들춰내어 수정을 해요. 이미 존재했던 크뤼거(Johann Crüger)가 만든 선율과 프랑크(Johann Franck)가 지은 가사를 따와 '사랑하는 영혼아, 네 몸을 단장하여라 Schmücke dich, o liebe Seele(BWV654)'를 작곡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찬송가를 뼈대 삼아 자신만의 코랄을 작곡하는 것은 바흐 이전의 시대에도 흔한 교회 음악가들의 작곡 방식이었어요. 파헬벨(Johann Pachelbel 1653~1706)이나 뵘(Georg Böhm, 1661~1733) 그리고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는 이미 코랄 선율을 기초로 오르간 곡들을 만들어 독일 일대의 교회 음악을 발전시키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바흐는 이전에 있던 스승들에게서 자립을 시작하며 그만의 어법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여기서 기존의 작곡가와는 차별되는 지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요한 크뤼거의 'Schmücke dich, o liebe Seele' 악보.
요한 크뤼거의 'Schmücke dich, o liebe Seele' 악보.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Schmücke dich, o liebe Seele' 악보.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Schmücke dich, o liebe Seele' 악보.

바로 코랄의 대응하는 모티브를 창조적으로 작곡하는 방식인데, 이를 가리켜 알버트 슈바이처는 "코랄 선율선들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바흐의 정신에서 어떤 통일성, 부드럽고 푸른 안개 너머로 보이듯 옛 형식의 확고한 윤곽을 어렴풋이 보여주는 통일성이 생성된다"1)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형식을 '신비스런 형식'이라고 이름 붙여요. 다른 말로 내면 안을 풍성히 비추는 따스한 빛의 기운이 코랄 선율이 드넓게 펼쳐진 가운데 자유스럽게 감정이 일렁이듯 나타난다고 볼 수 있어요. 멜로디를 장식음을 통해 꽃을 가꾸듯이 장식하고, 그를 받쳐주는 반주부는 포근한 품과 같은 따스한 음색이 등장하여 감싸 주지요.

구원과 은혜의 성육신 되신 예수는 내면 안으로 깊이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신비하게 거주하시는 가사를 지닌 이 곡은, 보통 성만찬을 위한 음악으로도 많이 연주됩니다. 사라방드 같은 3박의 춤곡 같기도 한 부드러운 경쾌함을 지닌 이 곡을 가리켜 로버트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은 "고정 선율 주위에는 금색의 잎사귀들로 만들어진 화환이 걸려 있으며, 그 안에는 축복이 부어져 있다"2)고 칭찬했다고 해요.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바흐의 라이프치히 오르간 코랄, '사랑하는 영혼아, 네 몸을 단장하여라 Schmücke dich, o liebe Seele(BWV654)'를 노틀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올리비에 라트리의 연주로 듣습니다. 이제 막 예수를 따르기 시작한 제자들과, 회당 안에서 놀람과 경이를 만난 사람들, 그리고 고침 받은 귀신 들렸던 사람 곁에서 예수의 목소리처럼 들어 보겠습니다.

주) 

1) Schweitzer, Albert.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서울: 풍월당, 2023),. 434.

2) 나진규. 바흐의 오르간 음악. (서울: 가온음출판사, 201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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