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법무부장관이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피해자에게 사과한다"며 녹화 공작 사건 항소 포기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이종명 목사가 별세한 것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보도자료를 통해 한 사과를 받을 수 없다며 "정치 쇼"라고 비판하고 있다. 사진 출처 법무부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피해자에게 사과한다"며 녹화 공작 사건 항소 포기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이종명 목사가 별세한 것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보도자료를 통해 한 사과를 받을 수 없다며 "정치 쇼"라고 비판하고 있다. 사진 출처 법무부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녹화 공작' 피해자라는 법원 판결을 받은 이종명·박만규 목사에게 사과하고 항소를 포기하겠다고 12월 14일 법무부 보도 자료를 통해 밝혔다. 그러나 피해자와 대책위원회는 사전에 이런 연락을 듣지 못한 채 뉴스를 보고서야 사과 사실을 알았다며, 진정성 없는 정치적 수사라고 비판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11월 22일 녹화 공작 사업 피해자 이종명·박만규 목사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일부 인용해, 정부가 두 사람에게 각각 9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12월 14일 오전 항소 이유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그런데 법무부는 돌연 14일 오후 입장을 바꿔 '국가배상 소송 항소 포기'라는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 법무부는 "소위 '프락치 강요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에 대하여,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며 피해자들의 신속한 피해 회복을 위하여 항소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한동훈 장관이 "피해 회복을 돕기 위해 항소 포기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피해자분들께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도, 국민의 억울한 피해가 있으면 진영 논리와 무관하게 적극적으로 바로잡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도 밝혔다.

법무부는 14일 오후 녹화 공작 사건에 대한 항소를 포기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며, 앞으로도 '진영 논리와 무관하게' 문제를 바로 잡겠다는 한동훈 장관의 말을 소개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을 뿐더러, 추가 소송에 대한 입장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법무부 보도자료 갈무리 
법무부는 14일 오후 녹화 공작 사건에 대한 항소를 포기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며, 앞으로도 '진영 논리와 무관하게' 문제를 바로 잡겠다는 한동훈 장관의 말을 소개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을 뿐더러, 추가 소송에 대한 입장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법무부 보도자료 갈무리 

법무부의 항소 포기 보도 자료는 14일 저녁부터 여러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정작 녹화 공작 피해 당사자나 대리인 누구도 이와 같은 사실을 접하지 못했다. 당사자들은 14일 오전 법무부가 항소를 한 사실까지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소송 당사자인 박만규 목사는 12월 15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형식도 내용도 다 틀린 사과"라고 비판했다. 14일 저녁 쉬고 있다가 대책위원회 관계자의 전화를 받고서야 한동훈 장관이 사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박만규 목사는 "정말 의지가 있다면 당사자에게도 연락하고, 그간 재판 과정에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 '사실관계 입증이 안 됐다'는 소리를 한 것도 철회해야 하는 것 아니냐. 사과라기보다는 기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며 불쾌해했다. 

이종명 목사(사진 왼쪽)와 박만규 목사(사진 오른쪽)가 6월 9일 <뉴스앤조이>와 만나 40년 전 신군부의 '녹화 공작' 피해 사실을 회상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이종명 목사(사진 왼쪽)와 박만규 목사(사진 오른쪽)가 6월 9일 <뉴스앤조이>와 만나 40년 전 신군부의 '녹화 공작' 피해 사실을 회상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이종명·박만규 목사는 1981년 목원대학교 신학과에 입학 후 학생운동을 하다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 징집'을 당했다. 이후 복무하면서 수시로 운동권 학생들의 동향을 보고하라고 강요받았고, 고문과 회유에 따른 압박감, 동기들을 배신해야 한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 왔다. 

특히 박만규 목사가 법무부의 발표를 수긍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이종명 목사가 1심 판결 후인 12월 7일 별세했기 때문이다. 이종명 목사는 건강 악화로 입원해 11월 말 열린 선고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한 주간 내내 이종명 목사의 빈소를 지키다 왔다는 박만규 목사는, 이 목사가 생전 녹화 공작에 대한 트라우마로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이종명 목사는 지난 6월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도, 당시 사건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고통스러워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고 말했다. 

이종명 목사는 1심 판결문이 공개된 후 이를 읽고 지인들이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에 "보안사 녹화 사업 판결문 기사를 읽다 보니, 그때의 끔찍했던 마음의 상처가 돋아나와(트라우마?) 또 괴롭고 아프네요"라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동기로서 옆에서 이 목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봐 왔는데, 진정성 없이 보도 자료로 '사과한다'는 입장을 내놓으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박 목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 목사는 평소에 괜찮아 보여도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그때 일을 떠올려 힘들어했다. 이번 재판 때도 법정에 증인으로 나가 '죽음을 오간 녹화 공작 때문에 지금도 트라우마가 계속된다'고 발언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피해자의 상황이나 의중을 먼저 알아보지도 않은 채, 한동훈 장관이 일방적으로 "사과한다"고 발표한 것은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불쾌함을 드러냈다.

5월 16일 이종명 목사와 박만규 목사가 서울 퇴계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녹화 공작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요구하는 모습. 뉴스앤조이 최승현
5월 16일 이종명 목사와 박만규 목사가 서울 퇴계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녹화 공작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요구하는 모습. 뉴스앤조이 최승현

녹화공작·강제징집국가폭력피해자들을위한기독교대책위원회(대책위)와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진상규명위원회도 12월 15일 한동훈 장관의 일방적인 사과를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책위는 "40년 만의 사과가 피해자도 알지 못하는 '뉴스를 통한 기습 사과'라니 참담하다. 피해자도 모르는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너무 기만적이다"라고 했다. 

대책위는 법무부가 소송 과정에서 "배상금 9000만 원이 많고, 국가 폭력에 대한 사실 입증이 부족하고, 소멸시효도 완성되었다는 주장 등으로 피해자를 괴롭혔다"면서, 정말 진정성을 보이고 싶다면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하라"며 올해 안에 피해자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라고 한동훈 장관에게 요구했다. 

아울러 대책위는 이종명·박만규 목사 외에도 130여 명이 소송을 진행 중이라며, 정말 진심 어린 사과를 하려면 법무부가 보인 소송에서의 주장들을 철회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변론 과정에서의 궤변을 중지하라고도 요구했다.

대책위의 성명서 발표 후 한동훈 장관의 일방적인 사과를 비판하는 보도도 이어졌지만 법무부 입장은 달라진 게 없다. <뉴스앤조이>는 12월 15일 법무부 대변인실에 △법무부가 이종명 목사의 별세 소식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피해자에게 사전에 항소 취하(포기) 의사를 밝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14일 오전에 항소장을 제출했다가 번복한 이유는 무엇인지 △이후 유사 사건에 대해서도 '소멸시효 완성' 등의 주장을 철회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소송을 하지 않을 예정인지 물었다.   

법무부는 20일 오후 회신에서 "이종명 목사 별세에 대한 것은 소송당사자 개인에 관한 내용으로 법무부에서 답변하기 어렵다"고 답하지 않았고, "소송 절차상 피해자에게 사전에 항소 포기 의사를 밝히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항소장을 제출했다가 번복한 이유에 대해서는 "실무상 착오"였다고 주장했다.

대책위가 '책임 있는 후속 조치'로 언급한 다른 녹화 공작 피해자에 대한 소송 취하 요구에 대해서도 법무부는 명확히 답변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 중인 개별 사건들에 대하여는 절차상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기 어려운 점을 양해 바란다"고 답했다. 

대책위에서 활동 중인 황인근 목사는 법무부의 이 같은 태도를 비판했다. 그는 20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피해자에게 하지 않은 사과는 받을 수 없다. 이런 모습은 국민을 지키는 모습이 아니라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미지 관리하는 것으로 보여 개탄스럽다.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하고, 다른 피해자들에 대한 소송도 전부 취하해야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2월 7일 별세한 이종명 목사의 생전 모습. 그는 1심 판결문을 읽으면서도 트라우마로 힘들었다는 심경을 지인들에게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지난 12월 7일 별세한 이종명 목사의 생전 모습. 그는 1심 판결문을 읽으면서도 트라우마로 힘들었다는 심경을 지인들에게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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