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녹화綠化. 머리에 든 '빨간 물'을 빼고 푸른 사상을 주입한다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대표적인 군사정권의 인권유린 사례다.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 운동에 나선 이들을 좌익·용공으로 몰아 강제로 군대에 보내 버리거나, 붙잡아 우경화 교육을 하고, 이들을 '프락치'로 삼아 운동권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도록 했다.

어떤 이들은 이 프락치 활동에 적극 가담해 출세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사가 지난해 논란을 일으킨 김순호 경찰대학장이다. 운동권 출신인 그는 동료들을 밀고하며 경찰에서도 승승장구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반면 어떤 이들은 군사정권에 대한 협력을 끝내 거부하다 잔혹한 고초를 겪었고, 몇몇은 의문사당하기도 했다.

2021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1981년부터 1988년까지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등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된 '녹화 사업' 피해자가 2921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진화위는 녹화 사업 피해자들의 '프락치 강요' 업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국군보안사령부는 '보안부대령'을 위반하여 학원·노동·종교 분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학생운동권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한 '녹화 공작' 및 '선도 업무' 명칭으로 대규모 공작을 시행함에 있어 입대자 중 '특수 학적 변동자', '선도 대상자' 등 학생운동 전력자들을 상대로 과거 재학 시절 활동하였던 각 조직에 침투하여 '조직원 동향 파악' 및 '시위 정보 파악' 등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하였다."

녹화 사업 피해자 중에는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고, 특히 목사들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신학대 학생들은 당시 군사정권의 눈엣가시였다. 서울 종로5가에서 열리던 목요 기도회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과도 같았고, 각 신학대학은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뉴스앤조이>는 그중 지난해 진화위로부터 녹화 사업 공작 피해자로 인정받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이종명·박만규 목사를 6월 9일 서울 중구 필동 카페바인에서 만났다. 현재 이 목사는 충남 아산 송악교회에서 지역 목회를, 박 목사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기관 사역을 하고 있다. 목원대학교 81학번인 두 사람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다.

동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밀고하라고 강요받았던 잔혹한 역사. 밝히기 쉽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또다시 이런 역사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국가기관에 구제 신청을 했다. 이에 더해 국가의 책임을 촉구하며 지난 5월 진화위 앞에서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고, 녹화 공작 피해자에 대한 특별법 제정 등 실효성 있는 후속 조치를 요구했다.

이종명 목사(사진 왼쪽)와 박만규 목사(사진 오른쪽)가 6월 9일 서울 중구 필동 카페바인에서 40년 전 신군부의 '녹화 공작' 피해 사실을 회상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이종명 목사(사진 왼쪽)와 박만규 목사(사진 오른쪽)가 6월 9일 서울 중구 필동 카페바인에서 40년 전 신군부의 '녹화 공작' 피해 사실을 회상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이종명·박만규 목사는 1981년 대학 입학 후 사회문제에 눈을 떴다. 폭동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광주 사태'의 실상이 무엇인지 대학에 들어와 알게 됐다. 부흥 강사가 꿈이었던 이종명 목사는 대학 입학 후 계엄군이 시민을 총으로 쐈다는 사실을 듣고 절망에 빠졌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이 목사는 몇몇 동기와 함께 탈춤반 활동을 하며 의식을 키웠다.

대전 보문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박만규 목사는 "목원대에 가면 유영완을 찾으라"는 말에 대학 탈춤반에 들어갔다가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 탈춤반은 당시 각 대학마다 운동권의 핵심 동아리 중 하나였다. 목원대 78학번인 유영완 목사(하늘중앙교회)는 훗날 충청연회 감독을 거쳐 대형 교회 목회를 하며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지만, 당시 지역 운동권에서는 알아주는 거물이였다. 

두 목사는 주로 감리교전국청년연합회(감청)나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 등 에큐메니컬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이들이 활동한 대전 지역 단체들은 함석헌·백기완·김동길 등을 강사로 불러, 젊은이들의 사회의식을 깨우는 모임을 수시로 열었다. 당시 목원대 81학번 중에서는 이종명·박만규 목사를 비롯해 중앙연회 감독을 지낸 최종호 목사(광주감리교회) 등이 '운동권'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군사정권은 이들의 활동이 못마땅했던지 이종명·박만규 두 사람을 '녹화 사업' 대상으로 삼았다. 1983년 5월 경북 영덕 해안초 소에 입대한 박만규 목사와, 대학 입학과 동시에 ROTC 후보생에 지원했던 이종명 목사가 비슷한 시기 보안사령부로 끌려갔다.

진화위는 보안사 존안 자료 등을 근거로 이종명 목사와 박만규 목사가 구타와 고문 등을 당하면서 녹화 사업을 당했다고 밝혔다. 사진 제공 박만규
진화위는 보안사 존안 자료 등을 근거로 이종명 목사와 박만규 목사가 구타와 고문 등을 당하면서 녹화 사업을 당했다고 밝혔다. 사진 제공 박만규

1983년 9월, 학교에 있던 이종명 목사를 갑자기 ROTC 장교가 불렀다. 학교 정문으로 가 보라고 했다. 정문에 남성 두 명이 차를 대고 이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 목사를 차에 태우고 고개를 숙이게 한 후 어디론가 출발했다. 도착한 곳은 어느 건물 지하. 나중에 그 건물이 대전 507보안부대라는 걸 알게 됐다. 건물은 '충남기업사'라는 간판을 달고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아무런 낌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끌려간 것이었다.

이종명 목사는 1983년 9월 5일부터 9일까지 대전 507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지금까지 해 온 학생운동 이력을 다 적으라"는 말에 며칠 간 진술서를 써야 했다. 며칠이나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의 시간 동안, 이 목사는 군인들에게 쉴 새 없이 맞았다.

"1학년 때부터 있었던 일을 일기 식으로 전부 다 쓰라고 했다.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행사에 참여했는지를 다 쓰라더라. 읽은 책들도 썼다. 그런데 쓰다 보면 감춰야 할 것 같은 내용이 있지 않나. 그래서 안 쓰면 어떻게 알았는지 '너 이 내용은 왜 안 썼느냐'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렸다. 어떨 때는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맞기도 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더라. (그들은) 말 그대로 전지전능했다. 있는 대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훗날 동기들과 유추해 보니, 전에 이미 여러 명이 끌려와서 고문과 구타를 당하며 진술을 했다. 여러 진술을 대조해서 이 목사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아냈던 것이었다.

"정말 고통스럽고 두려웠던 건 그들이 '너 여기 온 거 아무도 몰라. 여기서 죽으면 바닷속이든 어디든 갖다 버려도 아무도 몰라'라고 말할 때였다. 군사정권이니까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사람들은 얼마든지 진실을 감출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100장이 넘는 진술서를 쓰고 나니, 보안대 군인들은 커다란 조직도를 그렸다. 영화에서나 나오는 '간첩단 조직도'가 이 목사 눈앞에 있었다. 군인들은 이 목사에게 "이것만 가지고도 지금 너는 감옥에 간다. ROTC는 당연히 제적되고 학교 생활도 끝난다. 받았던 장학금도 다 물어내야 한다"고 위협했다.

"다만, 구원받는 길이 있다"는 말이 이어졌다. "우리 말을 잘 들으면 된다. 너 장교되는 거 신원보증도 다 해 줄 거고, 앞길도 아무 문제없이 지켜 줄 거다. 우리 말을 듣겠느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 목사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보안대 군인들은 하루 한 번, 매일 저녁 6시에 부대로 전화해서 학교 동향을 보고하라고 했다. 누가 어떤 모임을 하는지, 학교에 어떤 조직이 있는지, 시위 계획 같은 게 있는지 전달하는 '프락치' 업무였다.

이종명 목사는 애초에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ROTC에 지원했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읜 데다가 동생이 넷이나 있었다. ROTC를 하면 등록금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사회의식이 생긴 후에는 '내가 군사정권의 하수인이 되는 게 맞나' 하는 자조와 갈등도 있었지만, 여지껏 받은 장학금을 도로 물어낼 형편은 안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종명 목사는 프락치 강요를 거절할 수 없었다.

박만규 목사는 WCC와 교회협, 도시산업선교회가 '용공 단체'라는 내용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는 등 사상 교육도 강요당했다. 사진 제공 박만규
박만규 목사는 WCC와 교회협, 도시산업선교회가 '용공 단체'라는 내용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는 등 사상 교육도 강요당했다. 사진 제공 박만규

비슷한 시기, 군에 입대해 경북 영덕 해안 초소에서 근무하고 있던 박만규 목사에게도 보안사령부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박 목사를 영덕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울고속터미널로, 고속터미널에서 다시 과천에 있는 보안분실로 끌고 갔다. 아파트 공간이었다.

박만규 목사 역시 끌려가자마자 그간의 활동 내역을 다 써 내라는 요구를 받았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종명 목사가 끌려간 날은 1983년 9월 5~9일, 박만규 목사가 끌려간 날은 9월 12~22일이었다. 추정하자면 한 명씩 순차적으로 끌고와 진술서를 받은 후, 서로의 진술을 대조해 퍼즐을 맞춘 것이었다. 박만규 목사의 진술서를 본 군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나오면 "이 새끼야, 이게 아니잖아" 하면서 구타했고, 다시 쓰게 했다.

박 목사 역시 프락치 역할을 하라고 강요를 받았다. 휴가를 나가면 매일 보안대로 전화해 선후배와 동료들의 동향을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다만 박 목사는 당시 입대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휴가를 나갈 수는 없었다. 이등병이 너무 빨리 휴가를 나가면 분명 누군가 의심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박만규 목사는 두 달 만에 다시 보안사령부에 끌려왔다. 이번에는 이종명 목사가 조사받았던 대전 507보안부대였다. 조사실 옆 방에서는 목원대 동문이었던 탈춤반 선배 정봉현(미술과)이 고문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안대 군인들은 박 목사가 1982년 서울 강동구에서 EYCK 모임에 참석한 이유와 경위를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대전에도 EYCK 지부를 만들자는 논의를 했던 건데, 국가안전기획부가 이 정황을 포착하고 보안사령부에 수사를 의뢰한 거였다.

보안대 군인들은 "너희들이 문화 운동을 빌미로 이 나라를 뒤집으려는 것 아니냐"고 박 목사를 윽박질렀다. 뿐만 아니라 평소 박 목사가 했던 민중 야학 등의 활동도 전부 의심의 대상이 됐다. 박 목사의 모교회 보문교회 청년부 독서 모임은 '조직도화'되어 국가 체제 전복을 꾀하는 모임으로 바뀌어 있었다.

박 목사 가족이 겪은 고통도 엄청났다. 박 목사가 끌려간 사실을 모르는 작은형은, 동생을 면회하러 영덕 부대를 찾았으나 부대원 모두 행방을 알지 못해 온 가족이 근심에 잠겨야 했다. 이후 군인들은 박 목사 집을 두 차례나 수색했고, 뒤늦게 사정을 안 박 목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보안대에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일 아침 '충남기업사'로 나와 눈물로 사죄해야 했다.

조사를 받고 풀려난 박 목사는 1983년 12월 30일 첫 휴가를 나왔다. 보안사는 박 목사에게 휴가를 나가 목원대 등 주변 동료들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과천에서 조사받을 때는 나름대로 잘 방어했다고 생각했는데, 대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미 진술서가 맞춰져 있으니, 내가 부인을 하면 폭력이 따라오는 거다. 곤봉을 무릎 사이에 끼고 다리를 발로 밟았다. 조사받을 때는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5월 16일 진화위 앞에서 두 목사가 30년 전 당시 받은 피해를 회상하며 국가의 책임 있는 후속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5월 16일 진화위 앞에서 두 목사가 30년 전 당시 받은 피해를 회상하며 국가의 책임 있는 후속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폭행 사건이 '프락치'에서 벗어나게 해

불행 중 다행으로 두 목사가 프락치 업무를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선 두 사람은 보안사에 협조하겠다고 했으면서도, 주변 동료들에게 몰래 이 사실을 알리고 중요하지 않은 정보만 보고하는 식으로 자구책을 마련했다. 1983년 말 첫 휴가를 나온 박 목사는 "전국 감청 대회가 대전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을 보안대에 보고했다. 보고는 해야겠는데 중요한 내용은 누설할 수 없으니, 비교적 알려진 정보를 부대에 보고한 것이었다.

이종명 목사도 1983년 9~10월 약 1달간 주변인들의 동향을 보고했다. 그는 "물론 스스로 검열해서 정말 위험한 집회나 모임은 보고하지 않고 감췄다. 어느 정도 알려진 사건, 드러난다 하더라도 누구도 피해 입지 않을 사건 정도만 보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양심의 문제일 뿐, 동료들을 밀고하는 행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나 부대에 징집된 박만규 목사와 달리 대학 생활을 계속해 온 이종명 목사는 매일 보고하는 행위 때문에 더욱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이 목사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어서 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매일 취해서 살았다. 취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프락치 활동이 빨리 끝난 것은 11월 말 벌어진 '폭행 사건' 때문이었다. 한 주점에서 목원대 동기와 술을 마시며 프락치 활동에 대해 한탄하던 이종명 목사는, 옆 테이블 청년들이 자신에게 비아냥거리는 것 같다는 이유로 이들을 '보안사령부 직원'으로 의심했다.

"너 보안사에서 보낸 놈이지." 안 그래도 울분에 차 있던 이종명 목사는 일행과 시비가 붙어 주먹이 오갔고, 결국 경찰이 출동하고서야 사태가 진정됐다. 이 목사는 폭행 혐의로 구속돼 대전교도소에 수감됐고, 형사재판을 받았다. ROTC 후보생 자격을 박탈당하고 학교에서 제적되는 건 당연했다. 인생의 위기였지만, 그것이 이 목사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두 달 재판받고 벌금 30만 원을 선고받았다. 처음에는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았다. ROTC도 잘리고, 학교도 제적되고, 감옥도 다녀왔으니까. 한 50일 정도 수감됐던 것 같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오고 보니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라 자유를 얻은 거였다. 더 이상 보안사와 얽힐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해방시키신 것 같기도 하다."

거리낄 게 없었던 이종명 목사는 그때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올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종의 복수심도 있었다"는 이 목사는 거의 직업적인 활동가로 투신했다. 박만규 목사도 이종명 목사 사건 때문에 두 사람이 프락치 활동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다. 보안사가 두 사람이 양심선언이라도 하면 일이 커질 까 우려했다는 것이다.

"11월 말 이 목사 사건이 터진 건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첫 휴가 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보고했고, 두 번째 휴가부터는 아예 보고하지 않아 보기로 했다. 그래도 별다른 반응이 없더라. (보안사가) 나에게 프락치를 강요하지 않은 건 오로지 이종명 때문이다.(웃음)"

"WCC 용공 단체라고 진술하라"

한편, 녹화 공작 사업 당시 보안사령부 군인들이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를 용공 단체라고 고백하라"고 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박만규 목사가 과천 보안분실로 끌려갔을 때의 일이다.

"과천에서 책을 두 권 주더라. 하나는 WCC는 용공이라는 내용, 또 하나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용공이라는 책이었다. 조그마한 문고판 같은 거였는데, 책을 주고 독후감을 빙자한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시기적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만들어질 때였다. (한기총을) WCC·교회협의 대항마로 만들 때다 보니 그걸 주입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같다.
 

당시 WCC에 공산권 국가 교회들이 가입돼 있다는 이유로 용공으로 몰아갔지만, WCC는 그야말로 전 세계 기독교가 연합·협의하는 단체다. 전 지구적인 문제를 교회가 같이 풀어 보자는 진지하고 신학적인 고민을 하는 단체일 뿐이다."

이종명 목사도 박 목사 의견에 동의했다.

"나도 조사받는 과정에서 그들이 EYCK 활동을 계속 문제 삼았다. EYCK는 결국 교회협이지 않나. (군인들은) 교회협은 WCC에 가입돼 있고, WCC는 빨갱이 조직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결국 너희는 다 용공 조직의 하수인이고 이 일을 같이 꾸몄다는 거였다. 박 목사 말대로 WCC는 친교하는 단체일 뿐인데 이걸 남북 문제라는 편협한 틀에서 기득권이 자꾸 활용하고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거다."

이후에도 군사정권은 두 사람을 포함한 1000여 명을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쿠데타 등 유사시 이들을 신속하게 제압할 수 있도록 사찰하고 가택 구조와 예상 도주로까지 작성해 관리했다. 사진은 1991년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알려진 '청명 계획' 문건 중 박만규 목사에 대한 자료. 사진 제공 박만규
이후에도 군사정권은 두 사람을 포함한 1000여 명을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쿠데타 등 유사시 이들을 신속하게 제압할 수 있도록 사찰하고 가택 구조와 예상 도주로까지 작성해 관리했다. 사진은 1991년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알려진 '청명 계획' 문건 중 박만규 목사에 대한 자료. 사진 제공 박만규

프락치 강요 활동이 끝난 이후에도 두 사람은 학생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왔다. 때문에 이들은 지속적으로 국가기관의 감시를 받아 왔다. 1991년 보안사령부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민간인 사찰 계획 문건'의 대상자 1000여 명 중에도 두 사람의 이름이 있다. '청명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문건은 유사시 요주의 인물을 신속히 제압하기 위해 프로필, 가족 관계, 집 주소, 집 구조도, 예상 도주로, 체포 전담조 등을 정리해 놓은 문서다.

국가기관의 감시와 인권유린이 지속돼 왔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조치가 이뤄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진화위는 지난해 12월 두 사람을 녹화 공작의 피해자로 결정하고, 결정문을 통해 아래와 같이 국가에 권고했다.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공작 사건은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대학생을 불법적으로 징집하여 사회와 격리시키고, 이들에게 위협, 폭력, 가혹 행위를 통해 전향 및 사찰을 강요하고 국가와 국방에 대한 관념을 훼손함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본질적으로 침해하고 신체의자유, 자기 결정권, 사상과 양심의자유 등 인권을 총체적으로 유린한 사건이다.

 

국가와 이러한 불법적인 공작에 관여한 국방부, 행정안전부, 경찰청, 교육부, 병무청, 각 대학 등은 '국방의 의무'를 악용하여 중대한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5월 16일 이종명 목사와 박만규 목사는 퇴계로 진화위 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별법 제정 등 국가의 책임 있는 후속 조치를 요구했다. 이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도 제기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진화위의 결정은 권고 사항일 뿐 구속력은 없다. 이후 지금까지 국가 차원의 후속 조치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두 사람은 국가를 상대로 3억 원의 국가배상을 청구했다. 또한 진화위 발표 당시 기자회견에서 '특별법 제정 권고'가 포함돼 있었는데, 정식 결정문에는 이 내용이 누락됐다. 두 사람은 진화위 조사 및 결정 발표 단계에서 진화위원장이 바뀌면서 벌어진 일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해 지난해 12월 취임한 김광동 진화위원장은 5·18 헬기 사격 부정, 4·3 폭동 규정 등의 왜곡된 역사관으로 임명 당시부터 논란이 일었던 인사다.

두 사람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아직도 남아 있는 수천 명의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 그리고 녹화 공작 사업 과정에서의 의문사 등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회복이 이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종명 목사의 말이다.

"당시에는 생존을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런 끔찍한 일에 괴롭지만 일정 부분 협력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어긋난 행동으로 군사정권에 협력해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불의한 일이라는 것을 늘 알고 있었다.

 

우리들의 경험은 정말 끔찍했지만 이런 것들이 다시는 반복되면 안 되기에 소송에 나섰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과정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까 생각해 보면, 조속히 진실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 프락치 논란을 일으킨 김순호 경찰대학장처럼 덕을 보고 출세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진상을 규명해야 하고, 자기 신념을 지키다 희생당하고 의문사당한 사람들에 대한 진상도 규명해야 한다. 그런 기회가 찾아와서 바로잡기 위해 나섰다. 이번 기회가 다시 묻히거나 지지부진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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