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엄태빈 기자] 속칭 '빨갱이'를 전향시킨다는 뜻의 '녹화 공작 사업'으로 군에 강제징집되거나 프락치 역할을 강요받았던 피해자들이 국가 폭력의 희생자였다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이종명·박만규 목사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일부 인용해, 각각 9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11월 22일 선고했다. 

강제징집과 프락치 강요 등으로 '녹화 공작' 피해를 당한 목회자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인정됐다. 법원은 국가 폭력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며 손해배상 9000만 원을 선고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강제징집과 프락치 강요 등으로 '녹화 공작' 피해를 당한 목회자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인정됐다. 법원은 국가 폭력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며 손해배상 9000만 원을 선고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이종명 목사와 박만규 목사는 목원대학교 신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3년, 신군부의 강제징집을 당했다. 이후 학내 민주화 운동 세력의 동향 등을 보고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2022년 11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공작 사건에 대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본질적으로 침해하고 인권을 총체적으로 유린한 사건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두 사람은, 진화위 결정을 근거로 국가가 국방의의무를 정치적으로 악용해 중대한 인권침해를 했다며 손해배상 3억 원을 청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두 사람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고, 소멸시효도 만료돼 책임이 없다며 과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이날 선고에서 "개별적인 불법행위가 아니라 국가가 개입해 조직적으로 이뤄진 특수한 불법행위의 경우에,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존엄과 가치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피해를 회복하겠다는 진실 규명 결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워 책임을 면하려는 것은 용납되기가 어렵다"며 정부 주장을 배척했다. 

선고를 지켜본 박만규 목사는 40년 전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지만 국가의 불법행위가 인정돼 다행이라고 했다. 박 목사는 "지난해 12월, 진화위의 결정을 받고 정부가 국가 폭력을 당한 사람들에게 사과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결국 법원의 판단을 받게 됐다. '이제 숙제를 하나 끝냈다'는 생각이 든다. 인권의 최후 보루인 법원이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해 줘서 참 다행이다. 다시는 우리나라에 이렇게 피해를 입는 사람이 없도록, 법원이 내린 엄정한 판결이 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면 한다. 피해자들이 일일이 법원을 상대로 소송을 할 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진화위의 권고 사항인 배·보상과 치유를 이행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만규 목사는 국가의 불법 행위가 인정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종명 목사는 건강 문제로 재판에 참석하지 못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박만규 목사는 국가의 불법 행위가 인정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종명 목사는 건강 문제로 재판에 참석하지 못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녹화 공작 문제를 알리고 두 사람과 함께해 온 목회자들은 판결을 환영하며 정부가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책임 있는 후속 조치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전남병 목사는 폭력에는 공소시효와 소멸시효가 있을 수 없다며 국가가 피해자들의 무너진 삶과 정신을 회복하는 일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고문, 회유, 협박으로 졸지에 프락치가 된 이들은 평생 끔찍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이 일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의문사한 분들도 6명이나 된다. 1971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 진화위에서 파악한 (국가 폭력 피해자) 숫자만 2921명이다. 성서는 모든 인간의 존엄에 도전하는 것을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기에 기독교인들은 사람을 옥죄고 죽게 만드는 국가 폭력에 끝까지 저항하고 피해자들과 연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화위가 권고한 특별법 제정이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에 대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소장 황인근 목사는 "진화위는 결정 통지문에서 국가에게 피해 회복을 위한 준비와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지만 국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회복의 절차를 밟아갈지, 특별법 제정과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해 국가 폭력 희생자들에게 더 이상 2차 가해가 아닌 회복의 길을 열어 달라"고 당부했다.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박세론 목사는 "진화위가 국가의 녹화 공작을 불법이자 중대한 인권 침해라고 규정했지만 국가는 침묵하고 발뺌했다. 이게 민주주의 국가인가.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겠다는 것인가. 국가의 발뺌은 종교계와 청년 세대 그리고 국민을 향한 도전이다. 국가는 서둘러 공식 사과하고 법적으로 국가가 폭력의 가해자가 되지 않겠다는 약속을 마련하고 조치하기 바란다"고 했다.

두 목사의 소송대리인을 맡은 맡은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항소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선고 후 기자회견에서 "원고 한 명당 3억 원씩 청구했지만 재판부는 9000만 원을 인정했다. 이는 삼청교육대 관련 사건 위자료 액수와 동일하다. 과연 법원에서 인정한 9000만 원이 피해자들의 피해를 회복하고 국가에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면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던질 만큼의 금액인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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