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엄태빈 기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임현주 집사는 이 성경 구절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의진'이라 지어 주고, 항상 정의롭고 진실된 사람이 돼라고 기도했다. 

김의진 씨(29)는 엄마에게 살가운 맏아들이었다. 아침저녁으로 껴안고 사랑 표현도 자주 했다. 아들만 둘인 임현주 집사가 지나가는 말로 "딸들은 엄마한테 한강 가서 라면 먹는 것도 이야기한다더라"고 하자, 의진 씨는 곧바로 엄마를 데리고 한강에 가서 라면을 먹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 주일예배가 끝나면 가족끼리 시간을 보냈다. 등산·라이딩을 하고 워터파크도 갔다. 의진 씨가 결혼하면 부모님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할 것 같아서 일부러 마련한 시간이었다. 주변에서는 다 큰 아들이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부러워했다.

의진 씨는 한 달에 한 번, 주일예배 후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사진 제공 임현주
의진 씨는 한 달에 한 번, 주일예배 후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사진 제공 임현주

지난해 10월 29일 의진 씨는 친구들과 이태원에 놀러 갔다 참사를 당했다. 사람들은 "그러게 거기 왜 갔느냐"면서 희생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아들을 잃은 엄마는 그날 이후 투사가 됐다. 임현주 집사는 지난 1년간 생업을 병행하며 10·29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에 모인 가족들 약 100명과 진상 규명 활동에 나서고 있다. 10월 3일,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도회에서 임현주 집사는 아들의 사진을 목에 걸고 증언하기도 했다. <뉴스앤조이>는 10월 13일 임 집사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 이태원 참사 이후 약 1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 오셨나요. 

저는 공인중개사예요. 담당하고 있는 고객들이 있으니 업무는 계속하면서, 10·29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 활동도 하고 있어요. 참사 직후 떠밀리듯이 장례를 치르고 이태원에 가 봤습니다. 도대체 이 공간에서 왜 참사가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더라고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와 슬픔이 가득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생각해 봤어요. 우리 별들의 억울한 희생의 진실을 규명하고 그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열정적으로 살았는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저희의 역할이더라고요. 국가에서는 찾아 주지 않는 피해자의 권리를 직접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활동에 임하고 있어요. 

6개월 동안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추모 공원에 갔어요. 의진이가 혼자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요. 지금은 일주일에 네 번 정도 가고 있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의진이가 지금 하나님 품에 평안히 있기를 기도하지만, 엄마는 아들을 보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의진이를 여전히 가슴에 품고 살아가요. 매일의 시작과 끝을 의진이와 함께해요. 집 안 곳곳에는 의진이의 흔적이 그대로예요. (의진이) 방에는 항상 불이 켜져 있고, 잘 때는 의진이 사진을 저희 부부 사이에 두고 자요. 

- 의진 씨는 어떤 아들이었나요. 

하루는 의진이가 꽃을 사왔어요. 지하철에서 꽃이 안 팔려서 무료로 나눠 줬는데, 미안해서 그냥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돈을 조금 드렸는데 오히려 한 다발 더 얹어 주셨다"면서, 엄마에게 꽃을 건네던 아들이었어요. 

의진이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의진이는 가끔 일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출장 가곤 했어요. 그때마다 주변 환경을 보고 "지방 경제가 너무 낙후돼 있는 것 같아 참 안타깝다"며 가슴 아파했어요. 광주로 출장 갔을 때는 남는 시간에 광주 민주화 항쟁 유적지에 갔다며 전화를 하더라고요. 저는 "의진아, 청년들이 자유와 진리를 외치다가 희생을 당했어"라며 지금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죠. 그때는 의진이가 이렇게 될 줄 전혀 몰랐는데….

- 그날 의진 씨는 무슨 일로 이태원에 가게 됐나요.

의진이는 용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우리 세대가 크리스마스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 처럼, 그동안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서 친구들과 추억들을 남겨 왔던 것 같아요.

의진이는 그날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저녁에 이태원에서 친구들을 만났어요. 사진을 찍고, 9시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10시 2분에 결제를 하고 나왔더라고요. 식당에 들어가기 전부터 인파가 밀집했다는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 식사하는 동안 더 많은 인파가 몰렸죠. 의진이와 함께 있던 친구 중 한 명은 해밀톤호텔과 다른 방향으로 휩쓸려 다행히 생존했는데, 그 친구조차도 "몸이 구겨지는 줄 알았다"고 해요. 건장한 청년들이 그런 일을 겪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의진 씨의 어머니 임현주 집사. 뉴스앤조이 나수진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의진 씨의 어머니 임현주 집사. 뉴스앤조이 나수진

-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소식을 접하셨나요. 

저와 남편은 의진이 친할머니 생신이라 대전에 가 있었어요. 그런 상황을 알지 못한 채 하룻밤을 자고, 주일예배에 참석했어요. 목사님이 설교 중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우리 믿는 자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하셔서 그제야 알게 됐어요. 수많은 청년이 희생당했다는데, 그때까지도 우리 의진이가 거기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서울로 올라가면서 가족 단톡방에 "우리 아들들 잘 있지?" 물었어요. 작은아들이 "엄마 나는 잘 있어. 근데 형이 전화를 안 받아"라고 해서 마음이 조급해졌어요. 

실종자 센터에 전화를 여러 번 시도했어요. 의진이가 희생자 명단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정부는 희생자들을 뿔뿔히 흩어 놓고 참사 후 12시간이 지나서야 연락했죠. 그전까지는 우리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여기저기 찾아다녔어요. 오후 4~5시쯤 병원에 도착했는데 의진이가 눈을 감고 평안하게 누워 있었어요. 간밤에 가족도 없이 혼자 있었을 의진이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눈만 뜨면 되는데, 숨만 쉬면 되겠는데….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의진이를 품에 안고 기도하면 살아나지 않을까 했어요. 의진이를 그 차가운 영안실에 두고 나올 수 없겠더라고요. 그런데 병원에서는 더 이상 영안실에 들어갈 수 없게 하고 바로 장례를 진행해야 한다고 재촉했어요. 

부모는 상주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의진이 동생이 상주를 맡았어요. 의진이 친구들은 결혼식에 초대하는데, 우리는 장례식에 초대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가족들이 의진이가 친구들을 그리워할 거라고, 가는 길 외롭지 않도록 연락해야 한다고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알렸어요. 

임 집사는 가족 단톡방에서 의진 씨의 안부를 물었지만 답이 없었다. 사진 제공 임현주 

- 참사 1년이 다가오지만 진상 규명은 더딥니다. 유가족들은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계신데요.

사람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이) 이태원 골목에 간 게 잘못인 것처럼 이야기해요. 저는 이게 정부가 씌운 부정적인 프레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는 동안 희생자들의 삶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어요. 저는 1년 동안 분향소에서 지내면서 159개 별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었어요. 정말 열정적으로 살았던 청년들이더라고요. 두 아들을 위해 미래까지 설계해 둔 아빠부터, 본인이 원하던 회사에 갓 취업한 청년도 있어요. 그 청년은 결국 장례식장에서 취업 통지서를 받았죠.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사람들은 7명이나 돼요. 사촌 동생이 취직한 기념으로 이태원을 구경시켜 준 사람도 있고요. 이렇게 아름답게 살아온 청년들의 역사가 한순간에 끝난 거예요.

자식을 잃어 삶이 파탄났지만 그건 우리가 감당할 몫이고, 희생자들은 편안히 눈감을 수 있도록 해야 하잖아요. 희생자들에게 어떤 억울함이 있는지 밝혀서, 강제 종료 당한 그들의 삶이 가족과 남겨진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실현되게 해야죠. 의진이 친구들이 "내가 네 몫까지 열심히 살게"라고 말하는데, 너무 가슴 아팠어요. 내 아들의 삶을 누구 보고 대신 살아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참사가 있기 전 원래 이태원에 함께 가기로 했던 친구와 의진이가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의진이가) 너무 재밌다고 내일 또 오고 싶다고 했대요. 못 온 친구는 안 간게 후회된다고 했고요. 이런 걸 보면, 참사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국가는 책임지지 않았고, 그날의 진실을 밝히지 않았어요. 경찰과 소방대원분들이 애쓰고 수고한 건 잘 알죠. 최선을 다해 응급조치하고 구조 활동을 해 주셨어요.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러나 국가는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게 했어야 해요. 특별수사본부는 '군중 유체화'가 있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어요. 그럼 그 현상이 생긴 원인이 있을 거잖아요. 그 원인을 밝혀내야죠. 기동대를 투입해 폴리스 라인을 치고, 일방통행시키고, 한 차선이라도 내서 그쪽으로 지날 수 있게 하고, 지하철을 무정차시키는 등 인파를 관리했다면, 그 좁은 5평에 청년들이 갇히는 일은 없었을 거에요. 그리고 골목에 무질서하게 불법 주차돼 있는 차량들 때문에 바로 구조 활동이 이뤄지지 못했어요. 소방대원들은 응급차를 두고 걸어왔고, 골든 타임을 놓쳤어요. 참사 이후 1시간이 지나도록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죠. 구조와 체계, 모든 것에서 무능하고 무책임했어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게 국가의 역할 아닌가요. 국가는 삶이 힘들고 버거워 스스로 포기하고 싶어 하는 청년까지도 살려야 하는데, 국가의 잘못으로 수많은 청년이 희생됐어요. 그날의 진실과 책임을 묻지 않으면 이런 일은 반복됩니다. 희생의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또 다른 희생이 생겨요. 책임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처벌해야 참사를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임현주 집사는 김의진 씨를 여전히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임현주 집사는 김의진 씨를 여전히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이태원 참사를 겪으며, 신앙에도 영향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싶어요. 의진이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분명히 기도했을 거에요. 하나님께 간절히 도와 달라고 했을 거에요. 의진이는 기도의 힘을 믿었거든요. 가끔 기도가 필요할 때 저한테 기도해 달라고 했어요. 그런 의진이의 기도는 어디로 갔을까요? 모태신앙으로, 평생 사랑하는 가족과 자녀를 위해 했던 제 기도는 어디로 간 거죠? 

기도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지만, 아직까지 저는 기도하고 있어요. 아침마다 의진이 방에 가서 사진을 끌어안고 "의진아, 오늘도 열심히 같이 살아 보자"고 기도해요. "하나님, 의진이와 아름다운 삶 살게 해 주시고, 희생의 진실이 규명되고, 의진이가 꿈꾸던 아름다운 삶이 남겨진 가족들의 삶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상처받은 (의진이의) 동생이 낙심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해요. 

하지만 찬송가는 못 부르겠어요. 위로가 되던 찬송이 다 원망으로만 느껴지거든요. 의진이가 하늘나라를 꿈꾸기는 했지만,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떠나고 싶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어떻게 의진이가 하나님 품 안에서 평안하다고 찬송할 수 있겠어요. 

- 지난 1년간 한국교회의 대응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교회의 역할은 같이 아파하는 것도 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에요. 기독교는 정의의 종교잖아요. 의의 하나님이 젊은이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일에 눈을 감으실까요? 절대 그렇지 않으실 거라 믿어요. 그 일을 교회가 해야 해요.

그런데 교회가 너무 조용해요. 화가 나요. 교회는 왜 조용한지, 왜 아무 말도 없는지, 교회는 이 불의를 왜 모른 척하는지… 교회가 나서서 정의를 찾아야 합니다. 유가족들이 알지 못하게 도와준 교회들도 있었어요. 그동안 교회가 유가족 쉼터에 식사를 제공해 왔더라고요. 그러나 우리와 함께 소리 높여 정의를 말하고 국가의 책임을 묻는 일이 더 절실히 필요해요. 억울한 희생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해 희생자들의 아름다운 역사가 바르게 기록될 수 있도록 교회가 함께해 줬으면 좋겠어요. 

-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저는 참사 이후 주변에 의진이 소식을 알리지 않았어요. 의진이와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하고 평화로웠거든요. 우리의 사랑과 행복은 계속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의지가 아닌 외부 세력에게 (그 행복을) 빼앗겼고, 의진이뿐만 아니라 의진이를 사랑한 모든 사람의 삶이 산산조각 났어요. 그런데 그걸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동정해요. 제가 바라는 건 '참 안됐다'는 동정이 아니라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느냐'며 같이 공분하는 건데, '산 자는 살아야지'라는 반응이더라고요. 우리 의진이가 가십거리가 되어서 두 번 희생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교회에는 더욱 알릴 수 없었어요. 참사 다음 날 "믿는 자들이 기도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라는 설교를 하신 목사님도 핼러윈을 귀신을 섬기는 풍습이라고 알고 있고 신앙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접하지 않았을 때는, 청년들이 거기에 휩쓸리는 것을 원치 않았을 거고 그래서 그런 설교를 할 수밖에 없던 것 같아요.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내 아이들이 그런 곳에 가지 않도록 지켜야겠다고 생각했겠죠. 

그 목사님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런데 (이태원 참사는) 그저 하나의 설교 테마로 쓰라고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기도가 부족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기도하고 있나요? 핼러윈 축제는 귀신을 섬기는 행사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문화 중 하나예요. 청년들이 재밌는 추억을 만들기 위해 간 것을, 더 이상 왜곡하고 비난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잘못해서, 애들을 그런 곳에 보내 이런 일이 생겼다고 비난하는 분들이 여전히 있어요.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2차, 3차 가해는 계속 일어나요. 교회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약자 편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태원 유가족들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연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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