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나는 '역사적 평화 교회'라 일컫는 메노나이트교회 교인이다. 한국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독교 전통 중 역사도 짧고 교인도 교회도 얼마 되지 않는 평화 교회 교인이다. 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조차 낯선 역사적 평화교회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폭력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해 온 3개 교단 즉 메노나이트, 형제들의교회, 퀘이커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역사적 평화 교회 전통은 제1차세계대전(1914. 7 - 1918. 11)을 겪으면서, 몇몇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질문하며 시작한 일련의 모임을 통해 출현했다. 소수의 목소리지만 평화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의 현실 속에서라도 적극적인 평화교육과 평화 행동을 하기 위해 연합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역사적 평화 교회'가 태동한 배경이다. 

인류는 19세기 근대 문명을 지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과학 문명의 서광과 희망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1·2차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모든 것이 일순간 잿빛과 절망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1945년 최초의 원자폭탄의 사용과 더불어 지금 문제가 되는 핵폭탄, 핵 오염수, 방사능의 폐해 등 비극의 서막이 열렸다. "20세기는 폭력의 세기"로 기록되었고, 한 세기 동안 유례없이 많은 대규모 전쟁을 겪으면서 "인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다"라는 평가를 받아들였다. 굳이 홉스, 루소, 칸트, 클라우제비츠, 잭 레비, 퀸시 라이트와 같은 철학자·역사가·정치가들의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인간의 폭력성을 역사적으로 짚어 본 스티븐 핑커나, 이에 또 다른 목소리를 더한 리처드 랭엄의 책을 다 살펴보지 않더라도, 21세기의 1/4을 지나는 지금 세계는 문자 그대로 전쟁의 광풍에 휘말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 사진 출처 UN
폭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 사진 출처 UN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소식에 귀를 의심하던 유럽과 세계는, 지난 2023년 10월 7일부터 지금까지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공을 시작으로 발생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5차 전쟁 소식에 깜짝 놀랐다. '이스라엘의 9·11'이라 표현할 정도로 이스라엘에 충격을 안겨 준 하마스의 공격은 전 세계의 이목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으로 이끌고 있다. 안방에서 급습당한 이스라엘의 충격은 전쟁 선포와 반격으로 이어지고, 다시 관심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관계를 넘어 배후의 지지 세력과 국제 관계로 확대되고 있다. 그렇게 '21세기의 화약고'라 일컬어지는 중동의 뇌관이 터지고야 말았다.

전쟁이 발발하면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뒤따른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이유,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 치러진 네 차례의 이-팔 전쟁(1948, 1956, 1967, 1973년)과 1·2차 인티파다(1987~1993, 2000~2007년에 치러진 유혈 충돌)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과 배경이 언급된다. 그리고 이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쏟아 내는 뉴스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중동의 이슬람 국가와 이스라엘의 불법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뒤섞이며 양극화의 길을 걷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는 다시금 목소리를 잃고 슬퍼하는 희생자가 된다. 날마다 평화, 오늘도 평화를 외치며 하루하루를 사는 평화인들은 말 그대로 '정신적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외치는 평화가 더 공허해지고, 무기력감이 바닥 없는 심연으로 추락한다. 이번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을 듣는 순간 내게 엄습해 온 감정이기도 하다. 동시에 연일 발표되는 사상자, 사망자, 인질을 나타내는 디지털화한 통계 수치에 이내 무감각해지고 만다. 숫자 뒤에 가려진 생명의 스러짐과 인간의 존엄과 존재의 상실에 어쩔 줄 모르고 있다. "평화를 외친다고 평화가 이뤄지나?", "전쟁 앞에서 평화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평화는 원래 없는 거야!"라는 냉소가 여기저기 봇물 터지듯 밀려오는 듯하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 지구. 사진 출처 UN
폭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 사진 출처 UN
이-팔 관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5가지

현상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정보의 업데이트는 필요하겠지만, 뉴스를 옳고 그름으로 재단하고 한편만을 지지하는 일은 우리를 평화와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기에 이 글은 이스라엘이 맞고 팔레스타인이 틀렸다거나, 팔레스타인이 맞고 이스라엘이 틀렸다는 옳고 그름의 관점을 거부한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쟁과 평화를 이분법적인 사고로 바라보는 틀을 벗어나, 전쟁과 평화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존엄을 어떻게 지켜 낼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자 한다.

또한,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하도록 요청한다. 그 시도로 이 글에서는 이미 미디어에서 언급하는 여러 가지 상황 보고를 반복하거나 정보를 나열하기보다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기본적인 사안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그 후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내게 문득 떠올랐던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의 'PIN(Palestine-Israel Network) Resolution'이라는 문서를 소개하면서 평화 교회의 시선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기본 사안으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다. 인류의 모든 문제가 관계의 문제이듯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분쟁·전쟁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쫓아내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관계는 중동전쟁이라 부르는 과거 네 차례의 전쟁을 통해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이집트와 접해 있는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난민을 수용하면서 빚어진 75년간의 역사와 그 실마리를 먼저 언급해야 한다. 즉 갈등의 불씨가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시작에 있으며, 이때부터 발생한 56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의 처참한 일상에 기초함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이 이러한 태생적 갈등과 분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난민으로 몰아 억압 통치를 했다는 데 있다. 점진적인 토지 점령, 인명 살상, 분리 장벽 설치는 단순한 결과물이 아닌 의도적이고 치밀하게 진행된 이스라엘의 정책 기조였다. 여기에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주권은 국제적 위상을 점하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은 국가로서 태동하지 못한 저항 그룹으로 존재하는 차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국제적 회의장에서 대표자가 없어서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팔레스타인의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미국과 여러 나라의 지지를 받는 이스라엘의 상황 차이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이슬람 국가와 반이슬람국가라는 대립 양상을 넘어 종교적인 이슈로까지 발전하였다. 거기에 예루살렘이라는 역사적·종교적 중심 도시를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견해차로 연결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아울러 이번 하마스가 시작한 전쟁은 최근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 변화라는 맥락 속에서 살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변화, 즉 2020년의 '아브라함 협정'을 통한 아랍 국가들과의 정치·경제 협력 및 교류 확대와 같은 반이란 정서 조성, 2022년 12월 역사상 최초로 구성된 극우 성향의 연립정부 등장, 2023년 1월 3일 벤 그비르 국가안보장관의 예루살렘 성전산 방문으로 인한 긴장 촉발, 네타냐후 총리의 유대인 정체성 강화, 정착촌 확대, 대 팔레스타인 강경 정책 등의 맥락 속에서 취해진 하마스의 의도적 선택이라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UN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가 제공한 피난처에 피신해 있는 가자지구 어린이들. 사진 출처 UNRWA
UN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가 제공한 피난처에 피신해 있는 가자지구 어린이들. 사진 출처 UNRWA

셋째, 대부분 전쟁 발발의 원인이 그렇듯이 모든 전쟁은 생존권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대리전을 치르게 하려는 강대국 국민은 경제를 걱정하고 정치적 권력의 우위를 염려하지만, 대리전의 최전선에서 희생당하는 국가의 국민에게는 모든 것이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 국가의 태동과 더불어 빚어진 강제 추방과 약탈은 전쟁의 실체이자 이스라엘이 피하고 싶어 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승전국·패전국의 분류는 승자의 논리일 뿐, 인권을 짓밟는 행위를 눈가림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이 지난 75년간 어떻게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였고, 군사적으로 억압하였고,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아 왔는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75년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라기보다는 거의 일방적인 학살과 학대의 역사라는 것이 그나마 국제사회가 지키고자 했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본질이자, 평화의 핵심이다.

넷째,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난 팔레스타인 무장 저항 단체가 하마스(HAMAS)이며 이번 제5차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원래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을 지키는 이슬람교 운동의 머리글자를 합성한 것으로 제1차 인티파다(1987~1993년) 기간에 태동하였다. 전직 교사 출신인 셰이크 아메드 야신이 조직하였으며 팔레스타인 땅에 이슬람 국가를 세운다는 분명한 목표 아래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유혈 사태 대부분은 하마스 없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하마스는 정치적·군사적 저항 단체로 위상이 분명하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자살 폭탄 테러는 이스라엘 군에 대한 그들의 고육지책으로 읽히지만, 그들에게는 거룩한 순교 행위이자 저항 방식이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디어나 뉴스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유념해서 살필 필요가 있으며, 비록 하마스가 무장 저항 단체이지만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보다 더 많은 신뢰를 얻고 있는 단체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분쟁과 전쟁 속에서도 무기와 원조 물품으로 장사하는 기업과 사람은 늘 존재한다. 그러나 하마스는 부패한 자치 정부와는 달리 국제 구호 물품을 중간에서 빼돌리거나 착취하지 않고, 정직하게 배분하는 등 국제 구호 기관의 신용을 얻어 온 면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는 어떤 단체나 국가의 편을 들고자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가, 폭력을 행사하는가 평화를 행사하는가 정확히 판단하고 분별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하마스가 전쟁을 일으킨 것은 분명 잘못된 행위이고, 잘못된 선택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들의 선행과 국제사회에서 받았던 신용까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묻어서는 안 된다. 전쟁이라는 폭력 행위는 잘못되었지만,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히 물어야 한다. 하마스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번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묻는다면, 그들은 전쟁밖에 선택 사항이 없었다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 인질로 잡혀 죽어 가는 안타까운 장면에만 시선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절망의 땅에서 이길 수 없더라도 선제공격으로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정직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 다섯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전쟁이라는 폭력 행위와 이에 따라 발생하는 현상, 즉 내 편-네 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옳고-그름, 평화-전쟁이라는 이분법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잘못과 잘한 일, 팔레스타인의 잘못과 잘한 일을 별도로 구분하여 살필 필요가 있음을 언급하고 싶다. 이스라엘 내에 존재하는 양심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소수지만 평화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들려주고자 애써 온 평화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들어 봐야 한다. 거꾸로 국제법상으로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 불법임을 끊임없이 외쳐 왔던 세계의 양심과 평화운동가들의 목소리도 함께 들을 필요가 있다. 끝으로 나치 시절에 600만의 목숨을 잃었던 그 유대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에게 그토록 아팠던 과거를 잊고, 당한 모습과 거의 똑같은 방법과 모습 그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고, 게토로 몰아넣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슬픈 현실이지만, 전쟁의 광풍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국제 평화, 국제법, 국제 협약조차 무색해진다. 이럴 때, 한 개인의 목소리는 광풍에 흡수되어 전혀 들리지 않거나 헛소리가 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발단부터 시종일관 불법적 팔레스타인 점령이 핵심이므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정의의 문제이고 인간 존엄의 문제이며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평화의 문제이다. 하마스의 선제공격에 대해 이스라엘이 전쟁을 선포한 데 이어, 한 사람의 팔레스타인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으며, 인류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더 진지하고 준엄하게 정의·존엄·평화에 관해 질문해야 한다. '해도 해도 너무한 이스라엘의 강압 조치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전쟁을 시작했다'라는 폭력 행위를 두둔할 수는 없으나, 팔레스타인에도 정의·존엄·평화는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거둘 수 없다.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하라"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을 바라볼 때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 놓치지 말아야 할 시선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마지막 부분에서 강조한 것처럼 전쟁을 바라볼 때, '내 편 네 편'이라는 흑백논리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과 존엄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질문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은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짧은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려 한다. 

이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접하면서 나는 폭력을 경험하면 반드시 나타난다는 '3F (fight-flight-freeze)' 반응을 마주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편을 들고 싶고, 이왕이면 강자의 편에 서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약자 편을 들고 싶은 양가감정이 찾아왔다. 갈등이 발생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첫 번째 반응이다. 싸워서 이기든지, 뭔가 문제를 극복하든지, 어떻게든 이겨 먹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전쟁과 같이 국가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안이라면 사실 싸움보다는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솟아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쟁 관련 뉴스를 일부러 보지 않거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궁금증을 외면하거나 억지로 누르는 모습이 목격된다. 문득 누군가로부터 전쟁 상황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거나 답변하기 어려워 아무 말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졸지에 얼어 버리는 것이다. 이때 동반되는 무기력감·좌절감·자괴감은 국제적인 전쟁이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는 척도이자 감정적 반응이기도 하다. 

2016년 7월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결의안을 채택하는 모습. 사진 출처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 홈페이지
2016년 7월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결의안을 채택하는 모습. 사진 출처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 홈페이지

이번 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작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처럼 평화에 대한 보다 더 큰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라가 나라인 만큼 2016년 캐나다 서스캐처원(Saskatchewan)의 새스커툰(Saskatoon)에서 열린 캐나다 메노나이트 총회가 불현듯 떠올랐다.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에 속해 있는 나는 지난 2016년 새스커툰에서 개최된 총회에 참석하였다. 당시 총회에서는 여러 가지 의제가 논의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PIN(Palestine-Israel Network) resolution'이었다. 이는 평화 교회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가 가져 왔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의지를 간략하게 정리한 문서로, 그리스도인이 전쟁 중 할 수 있는 가능한 선택지를 함께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PIN 문서를 소개하려 한다. (원문은 https://www.mennonitechurch.ca/pin을 참고.)

2016년 7월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 총회에 제출한 결의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관한 결의안

북미의 메노나이트들은 거의 70년 동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살면서 연구하고, 사역하고, 봉사해 왔다. 특히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Mennonite Central Committee)와 여러 교단 선교위원회, 기독교평화건설팀(2022년 1월 종교의 다양성을 반영하여 'Christian Peacemaker Teams'를 'Community Peacemaker Teams'로 명칭을 바꿈 - 필자 주)을 통해 지난 수년 동안 다양한 파트너십을 형성해 왔다. 캐나다와 미국에서 수천 명의 메노나이트가 교육기관, 봉사 및 선교 기관, 현지 답사 및 방문 프로그램을 통해 배움의 기회와 교류에 참여하였다. 가장 최근에는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가 베들레헴성경대학(Bathlehem Bible College)과 나사렛 봉사 프로그램(Serve Nazareth)을 통해 일꾼들을 파송하였다.

이 결의안은 이스라엘이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가자지구 등 팔레스타인 땅을 49년(2016년 문서임을 감안할 것 - 필자 주) 동안 군사적으로 점령함에 따라 고통을 받아 온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세계 교회에 동참을 요청하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탄원에 대한 응답이다. 이들의 우려는 2009년 이 지역의 교회들이 카이로스 팔레스타인(Kairos Palestine)이라는 협력 단체를 통해 발표한 '진실의 순간: 팔레스타인 고통의 중심에서 전하는 믿음, 소망, 사랑의 말씀'이라는 제목의 문서에 잘 드러나 있다.

고려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정의를 행하며, 화해를 추구하며, 무저항을 실천하는 평화의 방식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다(메노나이트 신앙고백, 22조).
- 우리는 불의가 발생하는 곳에서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행동을 취하는 가운데 정부·기관·기업을 촉구하며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믿는다.
- 우리는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로부터 이스라엘 점령 아래 있는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의 고통에 주목해 달라는 호소를 지속해서 듣고 있으며, 이스라엘 시민 또한 고통받고 있음을 인식하며 애도한다.
- 우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평화·정의·자유·안전 속에서 서로 더불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 우리는 팔레스타인인 사람의 이동권과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을 포함한 국제법을 위반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군사 점령과 정착이 지속되고 고착하는 모습을 개탄한다. 
- 우리는 메노나이트교회와 전 세계의 동료 신자들에게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보이콧, 투자 철회, 제재 등 몇 안 되는 선택 방식을 통해 이스라엘에 경제적 압력을 가할 것을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촉구한다.
- 우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이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상황을 다루면서 캐나다 원주민에 대한 식민 지배와 억압,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태도와 행동의 역사에 우리 스스로가 공모했음을 고백한다.

결의안

-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상황에 대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인도하심과 은혜를 구한다.
-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정의로운 평화에 대한 요청을 무시하거나 조장하고, 방해하거나 촉진하는 방식에 있어 회중, 지역사회, 교회 구성원으로서 지속해서 기도하고, 간구하고, 분별할 것을 약속한다.
- 우리는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지역의 불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의 노력을 지지하며, 이들과 캐나다의 유대인 및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함께 일하고 협력할 것을 약속한다.
- 우리는 메노나이트 회원 교회들이 이 주제와 관련한 교육 자료를 연구하고 이 지역을 방문하여 배우는 여행에 참여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관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것을 촉구한다.
- 우리는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 총회, 지방회, 개교회 및 교회 회원들에게 이스라엘 정착촌 및 이스라엘 방위군과 거래하는 기업,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 등으로 이익을 얻는 기업에 투자하거나 지원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 우리는 캐나다 정부가 국제법에 따라 이스라엘이 점령을 종식하고 정의로운 평화를 위해 노력하도록 경제 제재를 포함해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하도록 촉구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쟁을 대할 때 취할 수 있는 선택지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지역의 고유한 특수성과 전쟁의 급박성에 따라 공동체적 분별과 이해가 필요하다. 위의 문서는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의 결의안이지만, 참고할 뿐 각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개인적으로 한두 가지 내용을 덧붙이자면, 자신이 매일 얼마나 평화에 대해 묵상하는지 성찰하고, 자기 삶 속에 깃들어 있는 평화 영성 혹은 평화/폭력 감수성을 점검해 보도록 추천하고 싶다. 아울러 가족 구성원들과 한 번쯤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소식을 듣고 마음이 어떤지 질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상황이 허락하는 가운데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를 중심으로 기도 모임, 독서 모임 등을 구상해 보는 것과, 당장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난민들을 돕기 위한 구호기금을 미리 마련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그동안 한국아나뱁티스트(KAC)에서 개최했던 평화 컨퍼런스에서의 발표문, 미국 장로교 한국선교회가 주최했던 5년간의 '화평 세미나', 평화 저널 <플랜P>에 실었던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기사 등 여기저기서 들어 보고자 했던 평화의 목소리들을 다시 찾아보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분쟁 지역 못지않게 남중국해와 한반도의 위기 상황도 분쟁 지역 중 하나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전쟁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관심을 끄거나 다른 곳으로 돌리기보다는, 여전히 매일 우리 삶의 순간순간이 평화가 간절히 필요한 평화의 현장이자 전장임을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난 1700여 년 동안 속아 왔던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지우고, 모든 사람의 기억에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하라"는 말을 심어 주고 싶다. 예언자 이사야와 미가가 이야기했듯이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2:4, 미가 4:3)"라는 비전이 단지 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실현되는 세상이 오길, 여전히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기도드린다.

김복기 / 캐나다 메노나이트교회 위트니스(선교부) 목사, 평화 저널 <플랜P>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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