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합동이 '성 윤리 예방 대응 지침서'를 채택했다. 교단 역사상 최초의 윤리 강령이지만, '성폭력 예방'을 초안으로 한 이 지침은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모두 '성 윤리'로 바꾸면서 이상한 이름이 됐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예장합동이 '성 윤리 예방 대응 지침서'를 채택했다. 교단 역사상 최초의 윤리 강령이지만, '성폭력 예방'을 초안으로 한 이 지침은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모두 '성 윤리'로 바꾸면서 이상한 이름이 됐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오정호 총회장)이 교단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내 성폭력에 대한 윤리 강령 및 대응 지침을 제정했다. 그러나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성 윤리'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교회 성 윤리 대응 지침서'라는, '성 윤리를 예방한다'는 황당한 이름의 매뉴얼이 나왔다.

예장합동 대사회문제대응위원회(정중헌 위원장)는 9월 19일 108회 총회 저녁 회무 시간, 지난해 수임한 성폭력 대응 매뉴얼 건을 보고했다. 출타 중인 위원장 정중헌 목사를 대신해 서기 이형만 목사(영암삼호교회)가 보고했다. 

대사회문제대응위가 내놓은 보고서는 △성폭력 피해 시 대처 방법 △성폭력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 해소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 및 성 인지 감수성의 중요성 △그루밍 성범죄 설명 등을 담았고, 교단 역사 최초로 '성 윤리 지침 서약서' 초안도 공개했다. 서약서에는 △예방 교육 실시 △성적 비행에 대한 교회법 및 사회 법 결과 조회 허용 등의 내용까지 담았으며, 격년으로 의무 교육을 받고 서약서도 매번 작성할 수 있게 했다. 소송 및 상담 안내까지 A4용지 15장 분량으로, 내용은 상당히 상세했다.

대사회문제위원회의 지침서 내용은 별도의 검토 없이 '보고서 및 청원 사항대로 받기로' 처리됐다. 이로써 예장합동은 교단 역사상 처음으로 일종의 '윤리 강령'을 제정한 셈이 됐다. 일부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자평하며 기뻐했다. 예장합동은 지난 10년간 매년 '목회자 윤리 강령' 제정안이 올라왔는데도 "성경만 잘 지키면 된다"는 논리로 이를 기각시켜 왔다.

매뉴얼 채택은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매뉴얼은 여러 가지 이유로 논란을 낳고 있다. 우선 '성폭력'이라는 용어를 일괄적으로 '성 윤리'로 바꿨다. 이는 위원회 서기 이형만 목사의 의견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는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며 '성폭력'을 모두 '성 윤리'로 바꿨는데, 맥락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바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성폭력처벌법)'은 '성윤리처벌법'으로,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한국성윤리상담소'로, "성폭력은 젊은 여성에게만 일어난다(X)"라는 문장은 "성 윤리는 젊은 여성에게만 일어난다(X)"는 문장으로 바뀌었다. 

19일 보고 이후 기자와 만난 이형만 목사는, 성폭력을 '성 윤리'로 바꾼 이유에 대해 "성폭력 예방만이 아니고 '성 윤리'로 모든 성범죄를 예방하자는 취지다. 폭력이라는 개념 자체는 소극적이다. (형사뿐 아니라) 민사소송도 있는 거 아니냐. 다양한 성의 문제를 같이 다뤄야 하기 때문에 '성 윤리'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윤리를 가려야 폭력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소수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배척한 점도 눈에 띈다. 위원회는 '성 윤리 위반'에 대해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이루어지는 성적 언행으로 상대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며 "단, 양성애나 동성애나 성 전환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제외된다"는 사족을 달았다. 교회 내에서 이들이 성폭력 피해를 입을 시 보호해 주지 않겠다는 의사로도 비친다.

대사회문제대응위 서기 이형만 목사가 19일 위원회 활동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그는 '성 윤리'가 더 포괄적 개념이라며 '성폭력' 단어를 모두 바꿨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대사회문제대응위 서기 이형만 목사가 19일 위원회 활동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그는 '성 윤리'가 더 포괄적 개념이라며 '성폭력' 단어를 모두 바꿨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총회 임원회의 반대로 매뉴얼 자체가 나오지 못할 뻔한 위기도 겪었다. 총회 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1월 5일 열린 제13차 임원회의에서 "부총회장 오정호 목사가 '교회 성 윤리 예방 및 대응 지침서'를 이상원 교수에게 감수받은 결과를 유인물로 보고하니, 위 지침서는 채택하지 않기로 가결"했다. 총신대에서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치다 은퇴한 이상원 교수는 과거 수업 중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총회 임원회가 채택하지 않기로 한 이유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후 대사회문제대응위가 수차례에 걸쳐 매뉴얼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면서 올해 6월이 되어서야 구체적인 안이 확정됐다. 총회장 오정호 목사는 청원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일부 자구를 개정할 수 있는 권한을 임원회에 달라고 말했다.

한편, 일종의 강령 차원의 매뉴얼이다 보니 강제성이 없어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매뉴얼에는 각 노회가 격년마다 목회자 대상 '성 윤리 예방 교육' 및 '서약서 작성'을 하도록 되어 있지만,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이 없다. 청원 내용도 "전국 교회 배포 및 적극 활용'으로, 강행 규정은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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