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1980년 오월의 광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을 잔혹하게 짓밟았던 일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이 되었고, 여기에 대한 시민군의 등장과 저항은 사회적 기억의 구심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오월의 광주는 진상 규명을 밝히기 위한 기억 투쟁이 가장 먼저, 그리고 아주 격렬하게 일어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사회운동에서 등장하는 핵심 가치와 상징은 오월의 광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 이후의 한국 사회를 이해할 때 오월의 광주는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작년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복있는사람)이라는 책을 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불의에 맞서 싸웠던 그리스도인들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크게 여섯 가지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중에 하나가 '5·18과 기독교'였다. 광주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네 번째로 선교 기지를 세운 곳이다. 1980년 오월의 광주에서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있었을 텐데, 이들은 고난의 현장에서 어떠한 행보를 취했는지 궁금했다. '남동성당파'라는 수습위원에 참여했던 재야의 기독교인들, 목숨을 걸고 시민군에 참여했던 신학생들, 5·18 항쟁을 '시민혁명'으로 규정했던 목포의 신앙고백문, 진상 규명을 외치며 자신의 몸을 내어 준 이들의 행적을 불완전하게나마 복원해 봤다. 이로써 우리는 5·18과 기독교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5·18 40주년을 맞아 그리스도인은 이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가장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5·18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갈림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5·18 이후 한국교회는 매우 상반된 두 가지 풍경을 보여 주었다. 하나는 한국교회 원로들이 대거 참여한 국가조찬기도회였다. 1980년 8~9월에 두 번이나 열린 국가조찬기도회를 통해 한국교회는 불의한 권력의 손을 들어 주었다. 반면, 광주에서는 5·18 때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도회가 열렸지만, 번번이 탄압을 받아야 했다. '기도회'로 모인 자리였지만 성격이 너무 달랐다. 이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한국교회가 갈라진 것이다.

사실 1960년 4·19 때만 해도 한국교회는 매우 친권력적이었다. 4·19의 여파와 충격 속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이 등장하면서 권력과의 거리 두기가 가능해졌다. 이후 한국교회는 삼선 개헌(1969)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정교분리에 대한 입장 차이가 발생했다. 이는 1970년대 유신정권을 둘러싸고 어떠한 성서를 따를 것인지에 대한 노선 차이로 이어졌다. 즉, 권력에 대한 절대복종을 명시한(그렇게 여기는) '로마서 13장'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누가복음 4장'으로 말이다. 이러한 노선 차이가 1980년 5·18 이후 국가조찬기도회와 5·18 추모 예배로 나타났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 로마서 13장의 길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로 이어졌다. 반면, 누가복음 4장의 길은 87년형 복음주의라든가 민중 교회 등의 형태로 뿌리를 내렸다.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언어'가 없다는 데 있다. 타자의 고통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언어가 없다. 그러다 보니 모든 문제를 신앙의 언어로 환원하고 만다. 문제는 이 신앙의 언어라는 게 매우 정형적이고 실체가 없다는 데 있다. 때때로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이슈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 보니 음모론에 빠지기도 한다. 음모론을 신봉하는 이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상당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지금 보면 매우 투박하고 거친 글이지만 1970~1980년대에는 특정 사건을 신학적 언어로 재해석한 문건들이 종종 있었다. 예컨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가 작성한 <광주 민중 항쟁의 성서신학적 이해>는 5·18을 신학적 언어로 재해석한 대표적인 문건이다. 기독교인들은 5·18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작성된 글이다. 대미는 5·18을 부활로 해석한 부분이다. 5·18은 외형적으로 실패한 역사지만, 예수의 죽음이 실패가 아니듯 5·18도 실패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민족의 십자가인 광주는 민주주의 부활을 예고하는 하나의 상징이라는 게 이 문건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분들이 보면 매우 불편할 수 있는 글이다. 예수의 부활은 매우 예외적인 사건인데, 5·18을 어떻게 예수의 부활로 비유할 수 있는가. 중요한 점은 타자의 고통과 역사의 고난을 신학적 언어로 재사유했다는 사실이다. 지금 보면 KSCF 문건도 매우 정형적이지만, 이때는 여론의 자유가 매우 낮았던 시기임을 상기해 보자.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요컨대, 5·18의 신학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때의 글들이 매우 투박하기는 했어도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든 고민했다. 지금 한국교회에 매우 필요한 태도라 생각한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을 쓰면서 들었던 의문이 있다. 불의에 저항했던 이들은 어떠한 연유로 목숨을 걸고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걸까. 이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던 걸까. 나는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메타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교회에서 자주 들었던 이야기다.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에 뿌리를 두었다는 이야기. 교회에 다닌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핵심은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권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었다는 점이다.

1970~1980년대는 고문의 시대였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순간 국가권력의 잔혹한 고문이 펼쳐졌다. 이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외치며 생명의 가치를 역설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신이 부여한 권리라는 논리로 국가폭력을 비판한 셈이다. 이는 1980년 5월 25일 목포에서 작성된 <광주시민 혁명에 대한 목포 지역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에 잘 나타난다. 이 선언문은 하나님의 형상을 거론하며 군부 세력을 비판했다. 5·18 추모 예배에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에 대한 고문을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논리는 기독교가 인권 운동의 중심축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오늘날 극우 기독교가 인권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과 상반된다.

정리하자면, 5·18은 그리스도인에게 적어도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고 본다.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다른 하나는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마지막으로는 인권이 정말 기독교와 무관한가. 이 세 가지 질문은 그리스도인이 5·18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5·18 40주년을 맞이하는 가운데 이 세 가지 질문들을 유념하면서 광주의 희생자들을 애도했으면 좋겠다. 5·18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5·18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아니면 귀를 닫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이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5·18의 진실을 외면하면서부터 나락에 빠진 건지도 모르겠다. 부디 한국교회가 누군가를 증오하기보다 애도하는 마음을 품고 타자의 곁을 지키는 모습으로 성숙했으면 한다.

강성호 / 일반 역사학의 관점으로 한국 기독교 역사를 재조명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 결과물로 <한국 기독교 흑역사>(짓다)와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복있는사람)이라는 책을 썼다. 현재는 시사市史를 편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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