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을지로 '노가리골목'에 자리를 잡았던 을지OB베어. 뉴스앤조이 나수진
서울 중구 을지로 '노가리골목'에 자리를 잡았던 을지OB베어. 뉴스앤조이 나수진

1.

사울 왕가를 무너뜨리고 차지한 왕좌, 상대하기 버거운 적들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치른 방어전, 종교 권력의 안정적 지원…. 성서 사무엘하 초반의 다윗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정략적 목적을 위해 진행된 결혼으로 부인도 벌써 여러 명이었죠. 어느덧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될 만큼 커진 상비군 덕분에 전쟁 중에도 궁에 머물 수 있었던 다윗은 우연히 보게 된 밧세바를 빼앗기 위해 그의 배우자이며 자신의 충성스런 장군인 우리야를 전장의 한 중간에 버려 둔 채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자신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한 가정을 파괴하고, 살인을 저질렀으며, 성폭력을 행사한 다윗…. 하지만 지존인 그에게 이같이 작은(?) 일은 그리 대단한 문제도 아닐뿐더러, 적어도 외형상 현저한 탈법도 아니었을 겁니다. 본인이 직접 죽인 것도 아닌데다가 많은 아내는 왕의 덕목이기도 했을 테니 말입니다.    

2.

지난 2022년 4월 21일 새벽 3시, 42년간 골목 인쇄소와 지하철 노동자들의 쉼터였던 을지OB베어가 기습적인 야간 강제집행으로 쫓겨났습니다. 어느 한 가게, 소중하지 않은 삶의 터전은 없겠지만, 을지OB베어는 특별한 점이 많습니다. 처음 가게를 열 때부터 일하는 사람들,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을 위해 작고 볼품없는 노가리를 두들겨 편 안주 하나와 땅콩을 준비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매우 저렴하게 정했던 가격을 수십 년 동안 올리지 않았죠. 또 한창 술장사가 잘되는 시간이 되면 오히려 문을 닫으며 손님들에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술집에 걸맞지 않게 이른 아침 문을 열곤 인쇄소 골목 전체를 쓸고 닦길 수십 년, 그 덕에 밤샘 노동 후 교대한 지하철 3호선 노동자들이 잠시 피로를 풀고 갈 수 있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유명 상권 어디에나 있을 법한 크래프트 비어 펍은 고사하고, 생맥줏집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지 않았던 1980년대, 을지OB베어는 생맥주의 신선한 맛을 지키기 위해 맥주 따르는 장비를 매일 분해 청소하는 것도 모자라, 작고하신 1대 사장님은 아예 가게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주무시며 밤과 새벽, 맥주의 숙성 온도를 매 순간 확인하곤 했습니다. 5평 남짓한 가게는 비록 작고 허름했지만, 이 같은 시간과 이야기가 쌓이면서 점차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되었죠. 어느덧 골목에는 노가리와 맥주를 파는 동종 가게가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원조'라는 이름을 들이밀며 텃세를 부릴 법도 했지만, 1대 사장님은 오히려 새로 시작하는 가게 사장님들의 손을 잡고 "함께 장사하면 얼마나 좋겠냐"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힙한 을지로 노가리골목, '힙지로'는 그렇게 40년 동안 을지OB베어와 그 몹시도 조그만 가게를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을지OB베어는 결국 강제집행을 당했다. 강제집행을 저지하던 이들은 수많은 벌금과 손해배상에 직면해야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을지OB베어는 결국 강제집행을 당했다. 강제집행을 저지하던 이들은 수많은 벌금과 손해배상에 직면해야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3.

그 골목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골목 한쪽에 있던 만선호프의 주인이 바뀌면서부터였습니다. 무교동 어딘가에서 여러 개의 룸살롱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새 주인은 곧바로 주변의 가게들을 잠식하며 가게를 늘려 나갔고, 삽시간에 노가리 골목에는 온통 만선 몇 호점이라는 간판으로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돈 불리는 수완이 몹시도 좋았던 그는 만선호프를 수년 만에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로 성장시키며, 일약 TV 드라마마다 한 분씩은 계신 일명 '회장님'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회장님의 심성은 쌓이는 자본과 반비례했습니다. 웃돈을 통해 수십 년간 장사하던 가게들을 잠식하는 것도 모자라, 원조라 불리는 을지OB베어가 몹시도 거슬렸던 그는 마침내 같은 방식을 들이대기 시작했고, 급기야 을지OB베어가 장사하는 건물을 아예 사 버렸습니다. 보증금과 월세를 원하는 만큼 내겠다고, 그곳에서 함께 장사할 수 있게만 해 달라고, 이를 위해 같이 대화하자고 간곡히 사정했던 2대 사장님들을 외면한 그는 결국 어느 날 새벽 용역 깡패들을 통해 가게를 지키고 있던 이들과 수십 년 된 맥주잔들과 집기들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계속되는 강제집행과 형사 고소에도 많은 사람이 OB베어를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계속되는 강제집행과 형사 고소에도 많은 사람이 OB베어를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4.

자신의 완벽한 음모에 즐거워하던 성서 속 다윗 앞에 나단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임금님, 수많은 가축을 가진 부자가 한 마리 양을 애지중지 키우던 이로부터 그 양을 빼앗아 가 버렸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이런 일이! 그 같은 일을 행한 자는 마땅히 죽여야 한다!"

마침내 나단은 자신의 범죄를 깨닫지 못하는 왕에게 일갈합니다.

"그가 바로 당신이오!"(사무엘하 12:2-7)

그 나라의 모든 것을 가진 왕, 심지어 부인도 여럿인 왕이 또 다른 사람을 강제로 취하기 위해 벌인 추악한 짓들. 수십 개의 매장과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끝내 작은 가게를 빼앗고 그곳을 지키던 이들을 몰아낸 만선 자본. 어떠신지요? 여러분은 오래전 성서 속 사건이 21세기 대한민국 을지로에서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음을 느끼고 계신가요?

사무엘서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만, 을지OB베어의 아픔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강제 침탈 후 노가리골목 상생의 마음을 알리기 위해 진행한 예배·문화제 등에 대해 '영업 방해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만선의 편을 들어준 법원에 의해, 을지OB베어 사장님 가족들과 활동가들이 자그마치 7400만 원에 이르는 배상금을 물게 되었으니까요. 이 중 대책위원회에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종건 전도사(옥바라지선교센터)는 1800만 원의 배상금 납부를 청구받았고, 현재 통장이 압류되어 있기도 합니다. 수십 년을 한결같이 장사한 것이, 또 그 소중한 터전을 빼앗긴 것을 알린 것이 죄가 되는 것일까요? 집시법이 정한 시위 운영과 소음 규정 준수에 대해 관할 경찰서도 인정했을 만큼 질서 있게 진행되었던 집회는, 이제 강제 침탈 후 1년 동안 장사를 하지 못하고 거리에서 투쟁한 한 가족과 연대한 활동가의 삶을 옥죄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비단 을지OB베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코로나19의 광풍이 매섭던 지난 3년 동안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의 노포 수십 개가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지난 2017년, 서울 서촌의 궁중족발에서는 갑자기 세 배 이상의 보증금과 월세를 요구하며 퇴거를 종용한 건물주의 살인적인 강제집행 중 세입자의 손가락이 절단되기까지 했지만, 법원의 결정은 궁중족발 사장과 연대인들에게 부과된 '벌금 2000만 원'이었습니다.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은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손해배상액과 벌금액 후원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은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손해배상액과 벌금액 후원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5.

지금은 주님의 고난과 그 의미를 기억하는 사순의 절기입니다. 이 땅의 가장 아프고 소외된 곳에서 이웃들과 함께하셨던 주님께서 지금의 대한민국에 오신다면 거대 자본에 의해 쫓겨난 을지OB베어의 부서진 간판과 용역의 폭력에 잘려 나간 궁중족발 사장님의 손가락을 끌어안고 계시진 않을까요?

이 같은 마음으로 현 상황에 대한 인식과 아픔을 공감하는 범종교계 및 시민사회 단위들과 함께 올해 전반기 동안 모금 활동 '벌금의 꼬리표를 연대의 깃발로: 싸우는 상가 세입자들을 위한 벌금 모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특히 뜻을 같이하는 교회 및 단체, 신앙인들과 더불어 '고난받는 상가 세입자들과 함께하는 연합 예배' 개최를 준비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임하길 기도하는 신앙인이 쫓겨나는 세입자들과 같은 사회적 이웃들을 위해 기도와 마음을 나누는 일은 사회적 책임과 같이 부담스러운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동의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 이 순간 사랑했던 어린양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슬픔과 고통에 잠겨 있는 이들과 함께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1. 고난받는 상가 세입자들과 함께하는 연합 예배
- 일시: 2023년 5월 29일(월) 저녁 7시
- 장소: 향린교회 예배당(예정)

2. 예배 공동조직위원회에 참여해 주세요.
- 문의: 010-9411-5815, 고상균 을지OB베어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3. 헌금에 동참해 주세요. (모금 계좌: 우체국 010033-01-005062, 고난함께)

4. 함께 기도해 주시고, 이 상황을 널리 알려 주세요.

고상균 / 목사, 을지OB베어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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