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탈교회 현상이 나타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에 더 이상 아우라(aura)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 더 이상 아우리가 없게 되었는가? 교회가 잘못해서? 목회자들의 일탈 때문에? 이 말도 맞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교회는 급격히 쇠락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과 교회의 쇠락은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교회의 쇠락을 이끌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이 교회의 아우라를 상실시켰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아우라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서 예술 작품에 있던 아우라가 어떻게 상실되는지 추적한 것이다. 1936년 책이니까, 그때의 기술이란 사진과 영상 정도다. 하지만 사진과 영상은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를 상실시키기 충분했다. 사진과 영상은 원본의 아우라를 감소시켰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 무한 복제될 수 있는 원본 작품은 원본만 존재하던 때와는 달리 더 이상 고유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모든 일상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가벼워지는 이유는 모든 것의 일상(사생활)이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신비와 카리스마가 걷히니, 대상이 가진 아우라가 걷힌 것이다. 공영방송을 통해서만 접하던 정치인이나 사회적 지도층 인사들의 삶이 이제는 통제되지 않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가감 없이 노출된다. 그들의 근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그들의 추잡한 사생활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발생한 사회현상이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가톨릭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아동 성추행 문제가 반복되고 있었지만, 인터넷·SNS의 발달과 더불어 대중에게 까발려졌다.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시절, 불과 20년 전만 해도 몇몇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일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가톨릭에서 있었던 아동 성추문 문제를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개신교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추문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를 일컬어 '개독교'라고 부르고, 목사를 일컬어 '먹사'라고 부른다. 통제할 수 없는 언론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술의 발달은 굳이 교회를 가지 않더라도 종교적 욕구를 얼마든지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우리가 팬데믹을 통해서 경험한 것처럼, 인터넷을 통한 예배가 가능하게 된 것은 순전히 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없던 신조어들이 생겨났다. '대면 예배', '비대면 예배' 같은 것들이다. 예배는 그냥 예배였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예배를 구별한다. '대면'인지, 아니면 '비대면'인지.

거기다 인터넷, 특별히 유튜브의 발달로 인하여 담임목사의 설교가 갖는 아우라는 없어진 지 오래다. 손안에서 내가 듣고 싶은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 있는 기술이 보급됐기 때문이다. 설교를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상품을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것과 같아졌다. 설교가 상품처럼 골라서 들을 수 있는 것이 된 이상, 설교가 갖는 고유의 아우라는 상실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제대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중요하고, 목회자가 지성과 영성, 그리고 도덕성을 두루두루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러한 것이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탈교회 현상을 당분간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고유의 아우라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아우라를 갖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상품을 파는 회사에서는 상품의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톱스타를 내세워 광고하기도 하고, 상품의 가격을 범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올리기도 하고, 한정판을 만들어 희귀성을 높여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도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간파된다.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교회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손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상품을 파는 회사들처럼 마케팅을 하는 것이다. 요즘 교회들은 대개 그러한 방식을 취한다. 한마디로, 어떻게 해서든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빚을 내서라도 교회 건물을 블링블링하게 짓거나 리모델링을 하고, 팬시한 프로그램을 돌려서 사람들의 환심을 산다. 좀 심한 곳은 목회자를 우상화하기도 한다.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파괴된 아우라를 어떻게서든 다시 회복하여 교회 성장을 이루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의 아우라는 복구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시대에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이 까발려진 '투명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미 의심과 불신의 에너지에 둘려 있다. 의심과 불신의 에너지는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거나 붙들리게 하지 않는다. 의심과 불신은 분열을 불러온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은 모두 '분열의 일'뿐이다.

기술의 변화는 인간에게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기술은 인간의 의식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제 AI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미 그 시대가 어떠한 시대가 될 지, 챗GPT의 론칭을 통해서 조금씩 맛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종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은 변화를 거부하며 비의 또는 컬트의 집단으로 퇴화하는 것이다. 사실, 요즘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이단 교회들은 모두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 종교 집단일 뿐이다.

정통 교회라고 자부하는 교회들이 기술의 변화에 발맞추어 신앙과 교회를 재구성하는 데 게으르다면, 즉 활발한 대화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단 교회들처럼 퇴행적 행동을 하는 곳으로 나아간다면, 머지 않아 이단과 정통 교회는 한통속이 되고 말 것이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나는 신이다'에서 보인 이단들의 퇴행적 행동은 그 강도만 다를 뿐이지, 이미 정통 교회 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술이 무섭게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사는 길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통과 공부밖에 없다. 무섭게 변하는 사회와 소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이는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격려의 말씀과 같다),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어떻게 해야 급격히 발전을 이루는 기술 사회에서 교회가 지닌 고유의 아우라를 지켜 내거나 또는 창조해 나가야 하는지 치열하게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탈교회 현상을 너무 교회 자체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책하거나 쉽게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교회의 잘못과 목회자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아무리 교회와 목회자가 잘해도 탈교회 현상은 막을 수 없는 쓰나미와 같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좋겠다.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아우라를 만들어 나가며, 인간성(humanity)이 한없이 무너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아파하는 '인간(human being)'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고,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기술 사회를 올바로 이끌어 주는, 진리와 사랑의 교회를 세워 나가면 좋겠다.

장준식 / 미국 실리콘밸리 세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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