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무지개색 옷을 입고 채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정학을 당했다.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 색깔 옷 입었다고 징계를 당하다니 말이다. 학교는 '교수 지도 불이행', '수업 방해', '명예훼손', '불법 행사'를 징계 사유로 내세웠으며 "학칙에 동성애에 관한 의사 표현과 관련한 규칙이 없다"고 학생들이 반발하자 학칙을 개정했다.

나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학교가 보여 온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억지로 만든 징계 사유, '눈물 흘리면서 기도로 내린 징계니 받아들이라'는 교수들, 그리고 재판부에 학생들 사찰 보고서를 제출하는 행동 등등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었다. 징계부터 이후 대응까지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상식을 바라면 안 된다. 영의 눈으로 바라보니 알게 됐다. 이것은 시나리오다. 픽션이다.

장신대에서 부당한 징계를 받은 (사진 왼쪽부터) 김지만, 오세찬, 이창기, 서총명 씨. 사진 제공 서총명
장신대에서 부당한 징계를 받은 (사진 왼쪽부터) 김지만, 오세찬, 이창기, 서총명 씨. 사진 제공 서총명
1. 어이 장신대, 너는 첫판부터 장난질이냐?(타짜)

장자 교단을 자처하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의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된 건 2017년 102회 총회였다. 예장통합 총회는 '동성애자와 동성애 지지자는 학교의 입학을 불허한다'고 결의했고, 이 결의는 총회가 학교를 더 이상 교육기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누가 어떤 권한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대학은 다양한 생각을 가진 학생과 교수가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는 '지식 공동체' 아닌가?

입학 불허 결의는 총회가 지금까지 신학교를 어떻게 생각해 왔고 또 어떤 방식으로 운영에 영향을 미쳐 왔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비판적 학문과 민주적 공론의 장으로서의 대학은 사라지고 총회의 결정에 굴복해야 하는가? 나는 학교가 '경건'과 '학문' 중 무엇 하나라도 지키려면 '동성애가 왜 죄인지', '동성애 지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총회의 결정에 대한 학문적 토론과 연구를 학교가 담당해야 하고 또 담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18년 5월 17일 아이다호데이(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채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곳곳에 무지개색 우산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전하겠군….'

신학대학원생과 학부생이 교단 내 성소수자 혐오를 반대하는 마음으로 빨·주·노·초·파·보 옷을 맞춰 입고 채플에 참석했다. 학문적 토론도 안 돼! 연구도 안 돼! 동성애 이야기만 나오면 두려움에 떠는 학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색깔 옷 입는 것뿐이었다. 나에게 대학은 'universitas(공동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공동체였다. 우리는 차이와 다름을 통해 배운다. 그 가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발버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발버둥뿐이었다.

2018년 7월 '샬롬~'으로 시작되는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징계위원회가 열리니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장신대 학칙을 외우기 시작했다. 징계는 학칙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칙을 살펴보니 징계받을 일은 절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학칙을 위반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수들 기분은 나쁠 수 있겠지만, 설마 기분 나쁘다고 징계 사유도 없는 징계를 내리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징계위원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내가 참석한 곳은 징계위원회가 아니었다. 징계위원들은 징계 절차도 무시하고, 학칙도 무시하고 너 때문에 학교가 곤란해졌으니 책임을 지라는 식으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징계위원회인가? 나는 학칙을 보면 내게 징계 내릴 사유는 없고, 이런 식으로 내게 징계를 내린다면 학교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라고 방어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그곳에 앉아 있던 징계위원들은 교수도, 목회자도 아니었다. 학자적 양심도, 주님의 사랑도, 심지어 의리도 없는 건달 같았다. 나는 우리 사안을 신학적 논쟁으로 발전시키거나 공론장에서 마음껏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학교는 이 사안은 건달들의 '나와바리 싸움'으로 만들었다. '교수 지도 불이행', '수업 방해', '명예훼손', '불법 행사'. 우리에게 내려진 징계 사유인데, 묻고 싶다. 학교의 명예는 누가 훼손한 것인가?

"어이 징계위원들, 목사답게 교수답게 행동해!"

영화 '타짜'(2006) 스틸컷.
영화 '타짜'(2006) 스틸컷.
2. 모욕감을 느낀 그들에게(달콤한 인생)

"우리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 봐요. 우리한테 왜 그랬어요?"

"너흰 우리에게 모욕감을 줬어."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 봐요. 저 진짜 생각 많이 해 봤는데, 정말 모르겠거든요? 말해 봐요. 우리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된 거죠? 말해 봐요."

사실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교수들이 우리에게 왜 그랬을까? 학부부터 신학대학원까지 10년 가까이 장신대를 다니면서 관계 맺은 교수들이었다. 존경까지는 아니었지만 학교 선배이자, 목회자 선배인 그들에 대한 신뢰는 있었다.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무지개색 옷을 입고 채플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총회는 혐오와 차별의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적어도 학교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다양한 토론이 이뤄졌고, 교수들은 안정을 추구하지만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었다. 학교에서는 다양한 배움과 친교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학을 받았다. 정학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학교와 교수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다. 처음에는 교수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학교 밖에서 워낙 공격을 많이 하니까 학교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징계를 내린 거구나' 하고 말이다. 그래서 재심을 청구했다. 교수들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서였다. 재심이 거부당했을 땐 '교단 내에 반동성애 광풍이 워낙 심하니 몸을 사리는구나. 그렇다면 더 큰 명분을 만들어 줘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 법정에 소송을 하게 된 것이다. 밥그릇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할지라도 교수들도 이 징계가 잘못됐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고, 적어도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단으로 잘못된 징계를 바로잡게 되면 교수들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징계 무효 소송에서 승소한 후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교수들은 법원이 잘못 판단한 것이라 이야기하며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그 뒤에 이어진 세찬이의 목사 고시 불합격과 손해배상 소송에도 그들은 여전히 모른 척했다. 교수들은 자신들이 이 사안에 아무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학생 4명을 방패막이 삼고 버린 것이 그들에게는 별일도 아닌가? 도대체 누가 내린 징계이고,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학생들에게 이 정도 피해가 갈지는 예상하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찍힌 이 낙인이 얼마나 오래갈지 말이다. 그래서 비겁하다. 징계 이후 한동안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죽으면 끝날까? 하고 말이다. 학교로부터 버려지고, 교수들에게 배신당했다. 우리가 가장 안전하고 믿었던 공간에서 당한 폭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숨 쉴 공간이 없어진 것이다.

교수들은 모욕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신성한 예배당이 모욕당했고, 교수의 권위가 모욕당했고, 100년 넘은 '장자 교단'이 학생들에 의해 모욕당했다는 것이다. 그 모욕 때문에 명성교회 세습도 바로잡지 못했고 학교도 흔들리고 있다며, 교단 내 모든 문제를 우리 때문에 발생한 일로 여기는 듯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 그래야 자신들 책임이 아니니까 말이다. 한국교회가 위기라고들 하는데 그 위기의 책임에서 장신대는, 교수들은 쏙 빠진 것이다. 그들이 느낀 모욕감은 무엇일까? 장신대가 경건과 학문의 장이 아닌 대형 교회들이 벌이는 권력 다툼의 장이며, 자신들은 학자가 아닌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모욕감을 느낀 건 그들이 아니라 징계당한 학생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를 모욕했고, 꿈을 모욕했다. 그들 스스로 학교를 교육기관이 아닌 정쟁의 자리로 만들고, 예배당을 장사판으로 만들어 모욕했다. 나는 교수들에게 계속해서 따지고, 책임을 물을 것이다.

"우리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 봐요. 우리한테 왜 그랬어요?"

'달콤한 인생'(2005) 스틸컷.
'달콤한 인생'(2005) 스틸컷.
3. 우린 모두 살아서 돌아갑니다(암살)

나는 예장통합이 '설국열차'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열차의 꼬리 칸과 맨 앞 칸이 전략적 제휴로 유지되고 있다는 말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측과 문제를 야기한 측이 묘하게 연결돼 있다. 명성교회 세습을 반대했던 학교와 명성교회의 연결을 부정할 수 있는가? 대형 교회의 지원 없이 유지될 수 있는 기관이 예장통합 내에 존재하는가? 우리의 문제 제기는 결국 돌아돌아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교단이 만들어 낸 질서다. 앞 칸과 꼬리 칸은 영원히 존재한다.

열차의 앞 칸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 열차 밖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나온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붕괴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이라 느껴진다. 징계 이후의 삶은 많은 것이 변했다. 늘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살아갈 공간을 열심히 일구고 있다. 그날을 꿈꾸며 말이다.

결국 교수들은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몰랐으니까, 이렇게 세상이 바뀔 줄 몰랐으니까."

영화 '암살'(2015) 스틸컷.
영화 '암살'(2015) 스틸컷.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 염석진(배우 이정재 분)처럼 그들도 밀정이었다. 자본에 굴복해서 얻은 위세가 언제까지 유지될 것인가? 폭력으로 혐오와 배제로 보장받은 그 자리는 과연 안전한가? 계속해서 피해자가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때와 방식으로 무너질 것이다.

그날은 곧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린 모두 살아서 돌아갈 것이다.

서총명 / 장로회신학대학교 학부+신학대학원 12년째 재학 중. 무지개신학교 기획단원.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