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위의 시간, 믿음과 영화' 연재를 종료합니다. 애독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주
이 글에는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필자 주
마음의 고향을 찾는 2030 청년들

올해 초, 무려 16년 만에 부활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포켓몬 빵' 열풍을 기억하시나요? 편의점 입구마다 '포켓몬 빵 재고 없음' 문구가 붙고, 중고 거래 마켓에서 다섯 배 넘는 웃돈과 함께 거래되고, 마트마다 포켓몬 빵을 사려는 사람들이 새벽에 줄을 지어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맛으로 보자면 특별할 것도 없는 포켓몬 빵에 대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열광한 걸까요? 2030 청년들이 어릴 적 먹었던 빵을 다시 사려고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구직난과 가열된 경쟁에 지친 2030 청년들은 포켓몬 빵 하나에 아무 걱정 없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경험을 합니다. 어릴 적 주머니를 털어 샀던 빵을 성인이 된 지금은 가격 부담 없이 살 수 있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된 행복을 상상할 수 없는 오늘날 청년들에게 확실한 성취감을 얻게 해 준 것이죠.

독립 다큐멘터리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는 이렇게 마음의 고향을 찾는 청년들의 모습을 포착합니다. 게임 회사 넥슨(NEXON)이 1999년 출시했으나 망한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는 제작자·운영진마저 아무 관리 없이 방치해 놓은 게임입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이 게임을 찾는 2030 청년들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내언니전지현'을 아이디로 쓰는 일랜시아 유저 - 편집자 주)은 이 망한 게임의 유저들을 찾아가 "일랜시아 왜 하세요?"라고 질문합니다. 요즘 나오는 화려한 그래픽의 고사양 게임에 비하면 이제는 낡아서 최신 컴퓨터로는 작동도 되지 않는 일랜시아. 앳된 디자인의 아기자기한 그래픽에 고즈넉한 배경, 따뜻한 오르골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게임 화면이 교차되면서 유저들은 대답합니다.

"이곳으로 오면 안심이 되고 행복해져요. 재미는 없지만 언제고 다시 돌아오고 싶은 게임이에요."

그들이 '망겜' 일랜시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언니전지현과 나' 스틸컷
그들이 '망겜' 일랜시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언니전지현과 나' 스틸컷
IMF 키즈의 대체 현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청년 세대의 오락거리인 게임을 역사 속에 기입합니다. 1997년 외환 위기 사태 2년 후 일랜시아가 출시됩니다. 당시의 뉴스릴(news reel) 화면은 물가 급등 소식과 청년들이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일랜시아가 다른 게임에 비해 매력적인 '장소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애당초 게임 기획 의도가 현실에서 이루기 어려운 일을 정해진 루트 없이 마음껏 실현해 보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랜시아가 '자유도' 높은 게임이었다는 것은 영화 내내 강조됩니다. 일랜시아는 시간에 맞춰 무언가가 되거나 어떤 목표를 반드시 이뤄 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이나 경쟁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게임 회사가 만드는 대다수 게임은 돈을 쓰지 않는 유저는 결코 고스펙 유저가 될 수 없는 구조지만, 일랜시아는 게임에 돈을 쓰지 않고도 유저 간 빈부 격차 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일랜시아는 IMF 키즈에게 치열한 자본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장소를 보장하는 '대체 현실'이었던 셈입니다.

과거의 뉴스릴 아카이브에서 이어지는 현재 일랜시아 유저들의 인터뷰에는, 각자의 꿈을 현실에 옮겨 보고자 애썼으나 공무원 시험, 취업, 결혼 등과 같은 현실적인 선택지를 마주해야 하는 청년들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일랜시아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게임에서 위로 받는 이유, 즉 과금과 경쟁 시스템 기반이 아니라는 것이 곧 일랜시아가 게임 회사로부터 버려지는 이유가 됩니다.

초창기 일랜시아를 기획한 게임 개발자와의 인터뷰 내용 속에서는, 1990년대 후반의 상황보다 자본주의가 훨씬 가속화한 게임 시장의 현재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일랜시아를 개발할 당시에는 상품성이나 시장성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게임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20년 전 온갖 시간과 정성을 쏟아 일랜시아를 만들었던 그는, 일랜시아 캐릭터와 스토리를 조목조목 읽어 주는 유저들 앞에서 이제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방치돼 버린 게임의 모습처럼 시장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망각돼 버립니다. 개발자와 유저 사이의 세대적 간극은, 기억의 간극으로, 그리고 자유가 있는 세상에 대한 열망의 간극으로 벌어집니다.

다큐멘터리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 포스터.
다큐멘터리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 포스터.
자유에 대한 청년들의 기억 투쟁

다큐멘터리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떠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자유에 대한 청년 세대의 기억 투쟁을 담아낸 기록물입니다. 비록 그 자유는 현실에서는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가상 세계에서의 경험이지만, 이 가상 장소를 지키려는 청년들의 현실적인 분투기를 담음으로써 영화는 이들의 경험을 역사화합니다.

일랜시아는 게임 회사로부터 버려지고 방치된 게임이기 때문에, 게임 속에서는 다양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본래 게임의 개발 의도는 경쟁과 압박 없이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즐기는 데 있었지만, 때에 맞춰 대학에 진학하고 성취를 이뤄 내야만 하는 청년 세대의 현실과 맞물려, 게임 속에서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캐릭터를 키우기 위해 '루트'라는 획일적 방식이 크게 유행합니다. 또한 관리자의 제재가 없으니 게임의 단계들을 무시하고 플레이할 수 있는 각종 매크로 프로그램이 퍼지고, 이것에 적응한 유저들은 오히려 관리자가 없는 상태를 편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타인을 사칭해 사기를 쳐서 이득을 보는 유저들이 생겨 나고, 피해자가 신고를 해도 관리자의 대처가 없어 하나둘씩 게임을 떠나기도 합니다.

운영진의 부재라는 '궐위'의 시간에 놓여 있는 일랜시아의 모습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한 이후 안정적으로 꿈을 꾸며 미래를 전망할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남들이 하는 대로 효율성을 좇아야 하는 청년의 모습, 정치를 요구하지만 아무런 응답을 듣지 못하는 청년의 현실과 공명합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정치가 부재한 현실 속에서 오래전 자유의 경험을 기억하는 2030 청년들이 의기투합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가는 과정을 담아냅니다. 고급 매크로를 개발해 사적으로 이용하는 이들과 악성 버그를 생성해 타 유저들이 게임을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이들이 생겨나자, '내언니전지현'과 길드원들은 직접 게임 회사를 찾아가 악성 유저에 대한 제재를 이끌어 내고, 다른 유저들의 게임 내 자유를 지켜 냅니다. 또한 묵묵부답이던 운영진으로부터 이 '망겜'의 서비스를 종료시키지 않고 게임을 지속해 나갈 자유도 지켜 냅니다.

이 영화는 2030 청년들이 경험한 게임에 대한 아카이브일 뿐만 아니라, 정치가 부재한 신자유주의의 현실에서 '게임이라는 가상 공간 속 공동체성'이 이끈 정치적 승리의 경험을 역사화합니다. 코로나19로 현실 공간과 가상 장소의 위계가 사라진 지금, 이 영화의 의미는 더욱 뜻깊게 와닿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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