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매거진 <프리즘오브> 22호에 실렸던 글을 요약·수정한 것입니다. 영화 '헤드윅'(2001)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필자 주
1. 헤드윅의 신

토미와 헤드윅은 신이 인간의 자유를 빼앗고 억압한다는 믿음을 함께 공유하지만, 둘의 믿음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토미에게 신의 이름은 곧 상징계의 기원에 있는 억압적인 아버지의 이름과 같습니다. 토미가 헤드윅과 키스를 나누며 아담과 이브에 관해 말할 때, 토미는 아버지에 대한 강한 분노를 보인 직후였습니다. 토미는 예수를 신봉하는 소년인데, 그의 신앙은 조금 독특합니다. 그는 예수가 독재자적이고 억압적인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믿습니다. 반면, 헤드윅에게 신의 이름은 억압적인 상징계가 아니라 상상계에 속한 것입니다. '태초에 신이 인간을 갈라놓았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야 한다'는 동기를 제공해 주는 신의 이름은, 인간이 자유를 추구해야 할 이유를 알려 주고 꿈을 꾸도록 하는 이름입니다.

두 사람이 지닌 믿음의 차이는 이들이 각각 맞닥뜨릴 수 있는 파국의 차이를 만듭니다. 토미에게 더할 나위 없이 비극적인 상황은 억압적인 신의 강력한 임재 혹은 현현일 것입니다. 토미에게 신의 강력한 임재는 인간이 가진 자유와 사랑을 빼앗기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는 '신의 부재'야말로 인간이 자유와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에서 추방했지만, 토미는 아담이 이브와 사랑을 나눌 때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천국은 신의 부재 속에서도 인간이 자유와 사랑을 얻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헤드윅에게 가장 비극적인 상황은 반대로, 바로 그 억압적인 신이 세계 속에 부재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사랑과 자유를 향한 동기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헤드윅에게 필요한 구원은 신이 자신을 시궁창 같은 삶의 조건에서 안온한 삶으로 옮겨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궁창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도록 신이 자신을 적대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존재가 오롯이 정당화되고, 사랑의 동기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헤드윅은 신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거나 없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릅니다. 예수를 믿는 토미의 이마에 록커로서 그의 상징이 될 십자성호를 그려 주고, 영적 지식을 뜻하는 '그노시스'라는 활동명을 지어 주는 것은 토미 자신이 아니라 헤드윅입니다.

첫 시퀀스에서 헤드윅은 "나를 부숴 볼 테면 부숴 보라"고 노래합니다. '사랑의 기원' 트랙에서 신이 "나를 부정하면 파멸하리라"라고 말하는 점으로 미뤄 보아, 이 첫 번째 음악에서 "나를 부숴 보라"는 말은 바로 신을 향한 요청입니다. 나와 적대함으로써 나의 존재를 긍정해 달라고, 자유와 사랑을 향한 나의 동기를 계속 긍정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원' 음악 속, 신에 의해 갈라지게 된 인간들. '헤드윅' 스틸컷
'사랑의 기원' 음악 속, 신에 의해 갈라지게 된 인간들. '헤드윅' 스틸컷
2. 타자로서의 신과 신의 부재

'사랑의 기원'에는 여러 신들이 나오는데, 이 신들은 모두 인간과 자신을 구분 짓는 신입니다. 제우스는 번개로 원래 한 몸이었던 인간을 반으로 나눴고, 인디언 신은 인간의 몸을 꿰매 배꼽을 만들어 죄를 상기시켰고, 나일강의 신은 폭풍을 일으켜 인간이 헤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신들은 인간이 자신들과 존재론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과시합니다. 이 신들은 도저히 인간과 동일시될 수 없는 머나먼 타자적 대상입니다.

헤드윅이 신과 적대하면서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존재를 강하게 요청하는 이유는, 그가 세계에 대한 표상에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동일자로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 진영이었던 동베를린 출신의 미국 이민자 헤드윅은, 공산주의 진영의 '우리와 그들' 혹은 서방 자유주의 진영의 '우리와 그들' 중 어디에도 속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전환 수술에 실패해 여자도 남자도 아닌 헤드윅은 각 성별의 '우리와 그들' 중 어디에도 속할 수 없습니다.

남성은 여성을, 나치는 유대인을,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를 자신과 동일시할 수 없는 타자로 엮으며 자신을 주체로 여기는 세계 속에서, 이곳에서든 저곳에서든 동일시·적대시할 수 없는 헤드윅은 오직 신을 타자 삼아 자신을 주체로 여길 수 있습니다. 헤드윅은 자신에게 복을 내려 주는 기복적인 신이 아니라, 자신을 자유의 주체로 만들어 주는 타자로서의 신을 믿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느냐"는 토미의 질문에 헤드윅은 "그건 아니지만 신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자신을 분리된 피조물들과 동일시하고 신은 이 모든 구분을 만든 억압의 당사자로 상정한다면, 헤드윅은 피조물들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적 관계들은 실제 현실과 말끔히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신은 노래 가사처럼 번개 가위를 들고 인간 역사에 개입해서 인간을 갈라놓거나 화합의 역사에 제동을 걸지 않습니다. 헤드윅은 베를린장벽이 상징하는 동독·서독의 분리나 젠더의 분리 같은 것을 신이 만든 억압으로 믿어 왔는데, 그가 자유와 사랑을 찾아 동베를린을 떠나 미군 장교와 결혼해 미국에 왔다가 이혼당한 날, 아이러니하게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동독과 서독이 화합하는 시대가 열립니다.

뉴스릴(news reel)을 사용한 해당 씬은 뉴스 앵커의 "독일 국민은 참을성이 대단합니다. 고생 끝에 낙이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음성 뒤로 헤드윅의 슬픈 감정을 드러내는 클로즈업 쇼트로 전환됩니다. 헤드윅은 신이 나눠 놓은 구획으로부터 사랑을 찾아 도망쳐 나왔는데, 도망쳐 나온 그곳이 억압과 폭력이 계속 지탱되는 신화적인 장소가 아니라 인간끼리 화합이 가능한 장소로 변한 것입니다. 타자로서 신의 성격은 인간이 믿었던 희망을 배신할 뿐만 아니라 확신해 마지않던 절망까지도 배반합니다. "나를 부숴 볼 테면 부숴 보라"며 신을 향해 악을 썼던 헤드윅은, 그가 신이 주는 파멸보다 더 두려워했던 신의 침묵 혹은 신의 부재를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영화 '헤드윅'(2001) 포스터.
영화 '헤드윅'(2001) 포스터.
3. 은폐된 적대를 발견하는 헤드윅

갈라진 두 사람의 운명적인 합일이라는 사랑-기표는 작중 내내 헤드윅을 추동시키지만, 헤드윅이 자신을 마침내 자유케 할 것이라고 바라고 기대했던 사랑-기의는 기표에 닿지 못하고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집니다. 그것은 실제 역사 속에 자유를 제한하는 다양한 모순과 위계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드윅이 믿었던 신화에 따르면, 신에 의해 갈라진 사람들은 본래 한 몸이었으니 사람과 사람은 똑같은 가치가 있어야 하며, 사람 간의 사랑은 등가적인 형태를 띠어야 합니다. 그러나 작중 내내 나타나는 사랑은 부등가교환의 형태를 띱니다. 헤드윅을 사랑해서 미국으로 데려가겠다는 미군 장교는, 사랑을 위해 성전환 수술을 하자고 한 뒤 헤드윅을 버렸습니다. 헤드윅은 인종 청소를 피하기 위해 미국에 가려는 유대인 이츠학과 결혼을 하고, 미국에 데려가는 조건으로 자신이 더 주목받기 위해 그에게 여장을 못 하도록 합니다. 토미는 헤드윅을 떠난 채, 헤드윅이 작곡했던 노래를 먼저 발매해 유명 록 스타가 됩니다.

헤드윅이 신의 부재를 경험한 베를린장벽 붕괴 이전에 이미 그가 그토록 믿었던 신화가 작동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종·출신지·성별에 따른 위계적 모순은 '인간 합일체'와 '절대적 타자', 즉 '인간'과 악으로 상정된 '신' 사이의 적대적 구분이라는 신화에 틈입해 들어와 그것을 깨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적·적대적 구분선을 드러냅니다. 만약 신이 번개 가위를 든 절대적 타자이자 극복해야 할 악으로서 작품 내에 개입했다면, 헤드윅이 믿었던 신화는 현실이 되면서 인간들은 모두 동지이자 같은 편이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에 은폐된 위계적 적대는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세상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종·출신지·성별 등 인간 사이에 해결돼야 할 위계적 모순과 적대가 드러납니다.

신에 대한 믿음 혹은 신화에 대한 믿음은 모순의 역사성을 소거하고 본래부터 그러했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며 문제적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신의 이름들은 모순이 가득한 사회의 실제 조건을 감추기 위해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거나, 사회적 적대를 은폐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세력으로 꼽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존의 억압적 질서를 보존하는 데 이데올로기로 동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동적인 신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함으로써,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부재함으로써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반하고 그 속에 은폐된 모순이 드러나게 할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신은 '인간을 억압하는 질서를 만든 존재가 바로 신'이라는 헤드윅과 토미의 공통된 믿음에 부재로 응답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배반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부재를 통해서 말을 건네는 존재입니다. 다양한 존재가 하나 되어 살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절대적 타자를 상정해 그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계급·인종·출신지·성별 등 수많은 위계와 적대가 가득한 실제 현실에서 적과 동지를 구성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헤드윅'은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영화입니다.

헤드윅의 어머니는 자유를 얻으려면 책임이 필요하다면서 헤드윅을 미국에 보내기 위해 성전환시키고, 헤드윅은 자유를 위해서는 책임이 필요하다면서 이츠학이 드래그 퀸(Drag Queen) 분장을 못 하도록 합니다. '자유'라는 수평적 등가물에 어느새 책임의 내용을 규정할 수 있는 수직적 권력이 개입합니다. 그것은 신화에 대한 믿음 이전부터 은폐돼 있었던 인종적·계급적·젠더적 적대의 탓입니다.

은폐된 권력관계를 발견하고 새로운 구성을 해내기 위해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헤드윅이 적대하던 신은 침묵과 부재를 통해 현실에 은폐된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헤드윅이 신화와의 상상적 동일시를 넘어 모순이 있는 현실에서 동일자와 타자를 재구성하도록 이끕니다. 헤드윅이 토미의 노래를 들은 후 이츠학에게 금지했던 의상을 건네주는 마지막 씬은, 그동안 은폐됐던 수평적 관계 속의 위계를 깨닫고 전에는 동지가 아니었던 대상과 새롭게 동지를 이룰 수 있게 되는 장면입니다. 헤드윅은 신화적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상상계에서 적대와 억압이 있는 상징계로 걸어 나옵니다. 이는 '신화적 상상을 쫒아 선택된 대상'이 아닌, '정치적 동지'로서의 '우리'를 구성하는 데 헤드윅이 성공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금지했던 드래그 퀸 가발을 이츠학에게 건네주는 헤드윅. '헤드윅' 스틸컷
자신이 금지했던 드래그 퀸 가발을 이츠학에게 건네주는 헤드윅. '헤드윅' 스틸컷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