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홍 전도사님께.

전도사님, 여러 고민이 있는 줄로 압니다. 어느 날 문득 강단의 설교가 와닿지 않는다고, 여러 고민을 했지만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책을 읽으면서 신학에 입문하게 됐다고 말씀하셨죠. 저도 그랬습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기독교 교리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었어요. 대속이 무엇인지, 천국이 무엇인지, 성령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했거든요. 그렇게 이 책 저 책을 탐독하다 보니 역사 비평을 접하게 됐죠. 전도사님이 던졌던 질문은 제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출애굽은 정말 일어난 일이었을까요?'
'고고학에 따르면 여리고성 붕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던데요?'

고민과 방황 끝에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이르게 된 전도사님의 여정은, 저를 비롯한 많은 신학생이 거치게 되는 여정처럼 보여요. 250년의 기나긴 역사를 가진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신학으로 덧칠된 교회의 그리스도로부터 실제 예수,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살아 숨 쉬었던 예수를 구출하자는 몸부림이죠. 특별히 전도사님께서 근래에 재밌게 읽고 있다고 말씀하신 로버트 펑크, 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은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회원들입니다.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현실보다 내세에 관심이 많고 세상에서 한 일이라고는 영혼 구원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신학적 그리스도'보다, 예수 세미나가 재구성한 1세기 유대 사회의 '역사적 예수'가 전도사님께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갈 거라 짐작합니다. 예수가 육신이 된 말씀이라는 낯선 선언,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는 난해하고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 교회의 교리보다는, 그가 지혜의 교사였으며 로마제국 혹은 유대 기득권 세력에 맞선 혁명가라는 예수 세미나 회원들의 주장이 오늘 우리에게는 훨씬 더 그럴싸해 보이죠.

어찌 됐든 예수에 대해 진심을 갖는다는 차원에서 전도사님이 역사적 예수 탐구물들을 열독한다는 사실은 무척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3년 후에도, 5년 후에도, 또 9년 후에도 역사적 예수 탐구에만 머물러 계신다면 저는 무척 실망할 것 같습니다. 교리에 갇힌 답답한 그리스도 너머의 생생한 예수를 찾아 나선 전도사님의 여정이,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그려 낸 (현시대에 갇힌) 역사적 예수에 머문다면 그 또한 비극이니까요. 저는 전도사님의 신학 여정이 역사적 예수 연구, 특히 역사적 예수 탐구의 '일부' 결과물에 만족하지 않고, 기어코 더 나아가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이 지점에서 좋은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는 책 한 권을 전도사님께 추천하고 싶습니다. 데일 C. 앨리슨이라는 학자가 쓴 <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비아)입니다.

<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 -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성찰> / 데일 C. 앨리슨 지음 / 김선용 옮김 / 비아 펴냄 / 288쪽 / 1만 4000원
<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 -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성찰> / 데일 C. 앨리슨 지음 / 김선용 옮김 / 비아 펴냄 / 288쪽 / 1만 4000원

제가 예수 세미나 회원들의 책을 넌지시 비판적으로 보고 이 책을 추천하니, 전도사님은 '뭐, 뻔한 복음주의 신약학자의 글이거나 교리를 수호하려는 관념적인 조직신학자의 글이겠지'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앨리슨은 조직신학자도 아니고 복음주의 신약학자도 아닌, 엄연한 역사적 예수 연구가입니다. 비교적 보수적인 신약학자 스캇 맥나이트가 지난 125년 동안 예수 연구의 방향을 바꾼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학자로 마르틴 켈러, 알베르트 슈바이처, 루돌프 불트만, 에른스트 케제만에 이어 앨리슨을 꼽았고, 이제는 불가지론자가 된 바트 어만 역시 역사적 예수와 관련해 가장 탁월한 학자로 (존 마이어, E. P. 샌더스와 더불어) 앨리슨을 꼽았으니,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는 그런 대가가 평생의 연구를 회고하며 쓴 솔직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제가 신학을 시작했을 때 품었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을 비교하면 많이 다릅니다. 앨리슨 또한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는 평생 신학적 그리스도라는 옷을 벗어던진 진짜 역사적 예수를 찾겠다는 신념을 품고 수고해 왔지만, 생각보다 얻은 것이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을 때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풍성한 신앙적 유익을 발견했다고 고백하죠. 논리적으로 치밀한 학자가 지적인 정직함을 갖고서 자신의 연구를 회고한 후, 신앙적 고백을 노래함으로 끝나는 이 책은 전도사님께 무척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신학적 역량을 갈고 닦아서 '보수적인 교회들의 신념'에 길들여진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역사적 예수를 설교하는 것이 전도사님의 꿈이라고 말씀하셨죠? 저는 문득 전도사님의 열정 넘치는 외침 속에서 로버트 펑크의 잔상을 발견했답니다. 그는 자신의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를 통해, 그리스도교인들이 잘못된 종교에 포로로 잡혀 있음을 깨닫고 거기서 '해방'돼야만 더 나은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으니까요. 하지만 흥미롭게도, 앨리슨은 학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에 대해 무척 회의적인 것 같습니다. 루돌프 불트만은 학자들의 합의에 따르면 예수가 종말론적 인물이라 주장했지만, 이후 등장한 마커스 보그는 대다수 학자가 예수를 종말론적 인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죠. 우리는 과연 공통의 합의를 통과한 '역사적 예수'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앨리슨은 다른 학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풀어놓습니다. 그는 상호 본문성(intertextuality) 연구의 대가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Q(Quelle)'에 대한 저서를 출간하며 역사적 예수의 연구 결과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앨리슨은 현시점에서 반추해 볼 때, 자신이 그린 역사적 예수가 "상호 본문성에 해박한 학식 있고 존경할 만한 주해가"인 자신과 꼭 닮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 대다수에게 해당하는 일입니다. 로버트 펑크가 그려 낸 '종말론·그리스도론·구원론이 없는 예수', 아일랜드 사람 존 도미닉 크로산이 그려 낸 '영국 제국의 불의에 저항한 19세기 아일랜드 소농을 닮은 예수'는 연구자 본인을 꼭 닮았거나 본인의 신념을 정당화합니다. 이쯤 되면 '신학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이상이지 않을까요?

면밀히 따져 보면, 이는 역사와 신학의 상관관계 설정 문제입니다. 예컨대 전도사님이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당시의 살아 있는 '역사'를 담은 기록과 그 역사에 대한 저자의 '신학'을 담은 기록을 정확하게 분리해 낼 수 있을까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독서, 혹은 탐구는 오히려 우리가 가진 신학, 이른바 '세계관'에 영향을 받습니다. 과연 역사가가 자신의 신학, 즉 '의미'를 투영하지 않고 순수한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일이 가능할까요? 만일 '의미'가 없는 역사라면 애초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이니, 역사가가 기록하며 남긴 '의미' 또한 역사의 중요한 일부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해 메타 비평을 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연 복음서의 신학을 벗겨낸 순수한 역사적 예수에 이르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요? 사실상 복음서의 신학(더 나아가서 이 신학을 밀고 간 기독교 전통)이 역사적 예수 그 자체만큼 중요한 자산은 아닐까요?

왠지 '아,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말씀입니까?'라고 따지실 것만 같습니다. 앨리슨의 이야기를 더욱 곱씹어 보십시오. 역사 비평에는 능력의 한계가 있고, 증거는 늘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에 기록된 특정 어록 혹은 이야기가 실제 예수에게서 온 것인지 가늠하는 연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진정성 판별 기준'을 통해 '신학'을 걸러 내고 순수한 '역사'에 이르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예수에 관한 모든 전승이 남긴 '전반적인 예수의 인상'을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애초에 인간의 기억이란 디테일에는 약하지만 전반적인 인상에는 강한 편이니, 복음서가 남긴 예수의 전반적인 인상이야말로 역사적 예수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요? 물론 앨리슨의 제안이 무척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저는 전도사님이 진보·보수라는 잣대에 너무 연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나중에 이렇게 둘 중 하나로 재단하고픈 유혹은 더욱 커질 겁니다).

앨리슨은 복음서가 남긴 전반적인 인상에 따라 역사적 예수는 '임박한 종말을 기대한 묵시적 예수'라고 말합니다. C. H. 다드나 톰 라이트는 예수가 남긴 종말 메시지가 실질적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지만, 앨리슨은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정적으로 역사적 예수는 종말에 관한 한 틀렸다고 선을 긋습니다. 따라서 '종말'에 대해서만큼은,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적 예수가 믿었던 종말의 의미'를 넘어서 우리 스스로가 종말이 의미하는 바를 직접 신학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껏 온건하고 보수적으로 보였던 학자의 메시지 치고는 무척 파격적이죠? 앨리슨은 슈바이처의 말을 인용하며, "예수란 존재는 지금껏 '여전한 이방인이자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예수가 매번 새로운 통찰과 도전의 원천이 돼 왔음을 암시하면서 말이죠.

전도사님이 마지막 장을 유심히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앨리슨도 전도사님처럼, 아니 전도사님 보다 훨씬 더 집요하게, 오랜 기간 복음서에서 역사적 예수를 찾기 위해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말 그대로 모호했습니다. 정확하게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치 베드로가 깊은 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물고기를 낚았던 것처럼, 앨리슨 또한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신앙적 유익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찾은 역사적 예수는 세상의 불행과 악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동시에 "하나님을 '지극히 친절하시고 자비로운 아버지'라 고백"하며 가르친 존재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정점에서 앨리슨은 부활 신앙을 만난 듯이 노래합니다.

"예수는 악마의 존재를 믿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믿었다. (중략) 부활과 '십자가와 무덤'은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 부활이 모든 것을 이긴다." (281쪽)

앞으로도 전도사님의 신학 여정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넘어야 할 산은 무척이나 많고, 또한 여정은 험난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지식'이 담긴 책들을 만나게 되겠죠. <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가 그런 신학적 지식만을 전달하는 책이었다면 전도사님에게 애써 추천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라, 앨리슨이 자신의 성찰을 담아 독자에게도 성찰을 촉구하는, 그가 평생의 연구를 통해 얻은 신앙의 고백을 담고 있는 멋진 회고록입니다. 전도사님이 앞으로 굳게 걸어가야 할 신학 여정에 든든한 이정표가 돼 줄 것입니다. 여정의 어떤 단계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마다 이 책을 다시 집어 들고 이 문제를 생각하며 책 내용을 곱씹어 보세요. 말 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대가의 지식과 성찰과 고백이 담긴 책이니까요.

아마도 전도사님은 한국교회를 갱신하겠다는 굳센 마음으로 치열하게 이 책 저 책을 뒤지며 대안을 궁구하시겠죠. 신학이라는 드높은 산을 한번 정복해 보겠다는 야심과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학의 여정을 걸으며 어느 순간 알게 됐습니다. 신학이라는 드높은 산은 정복하기 위해 오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식상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산에 오르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기 이전에 그 과정을 충분히 몸에 익히고 산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을 향유하는 데 있습니다. 역사 비평이라는 도구도 신학이라는 산을 정복하고 그 정상에서 우쭐한 마음으로 정상에 오르지 못한 이들을 재단하고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상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도록 여정을 돕는 도구입니다. 그 과정을 충분히 향유한다면, 정상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맛본다면 전도사님은 자연스레 이를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어질 겁니다. 역사 비평과 역사적 예수 연구는 그 나눔에 자연스레 녹아들겠죠.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도사님의 열정이 많은 이에게 도전과 귀감이 된다는 말씀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전도사님이 경험한 세계보다 더 넓은 세계가 전도사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려 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우리의 여정은 단거리경주가 아닙니다. 평생을 다해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마라톤과 같죠. 저의 조언이 주제넘었다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제 말이 좀 더 와닿게 될 겁니다. 저는 전도사님의 9년 후의 모습이니 말입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천천히 따라오십시오.

2022. 10. 24.
전도사님이 뿌린 씨앗의 결실,
홍 목사 드림.

홍동우 / 설교도 잘하고 싶고 책도 잘 읽고 싶은 욕심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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