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교육연구소를 운영하며 하울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임정혁 목사(42)가 암 투병기 '창 너머 풍경'을 연재합니다. 누구보다 정력적인 삶을 살아온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질병을 통해 하나님과 삶을 신앙적·실존적으로 돌아보게 됐다고 고백합니다. <뉴스앤조이>는 인생 전반전을 마무리하고 후반전을 시작하는 임 목사의 이야기를 6회에 걸쳐 격주로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암 수술 이후 거의 매일 1만 보 걷기를 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쉼 없이 쭉 걸어서 목표를 달성했을 텐데, 지금은 한참을 걷다 멈추어 서곤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나 바람결에 몸을 맡긴 나비를 본다. 때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그 소리를 들으며 내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명 세계의 일원임을 깨닫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걷다 보면 1만 보 걷기의 소요 시간이 훨씬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물리적인 시간의 제약이 이 감동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암 투병 이전의 바쁜 삶을 돌아보면, 의무적으로 매일 1만 보 걷기를 성취하려던 내 모습과 오버랩된다. 세 아이를 키우며 계속 대학원을 다니고, 평일에는 매일 일을 했으며, 주말에는 늘 교회 사역을 해 왔다. 욕심이 많았던 나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잠을 줄여 하루 4시간만 수면을 취하며 모든 분야에서 성과를 내려 했다. 그렇다고 대단한 일을 하거나 큰돈을 번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의무감 때문에, 또 달리 보면 자기만족과 욕심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빠른 속도로 살아왔던 것 같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나의 삶은 암 투병을 계기로 멈춰 섰다.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강제적인 멈춤이었다. 처음에는 이 멈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모든 정신과 시선이 우울한 내면에 집중되어 스스로 고립되기도 했다. 마치 끝없는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회복의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병상에 누워 가장 먼저 본 것은 아이들 사진첩이었다. 나는 세 아이를 키우는 동안 늘 아이들과 함께해 왔다고 생각했다. 일례로 나는 지난 십수 년간 매일 아이들 아침 식사를 챙겨 주고 등교를 시키는 등 일상의 작고 소중한 순간을 함께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사진첩을 보니,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없던 때가 꽤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강연에 가야 해서, 상담이 예정돼 있어서, 성고충 위원회에 참석해야 해서, 교회에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며 정작 아이들 곁에 서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일이 들어오고 또 해야만 하는 상황이지만, 나는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무엇에 두느냐, 어떤 원칙에 따라 시간 조절을 하느냐의 차이였을 뿐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내가 지금 하는 사역들은 참으로 귀한 일이고, 늘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 입장에서는 아빠의 빈자리가 그리웠을 수도, 혼자 세 아이를 건사했던 아내 입장에서는 많이 서운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때론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고용량 동위원소 치료 후 다양한 후유증을 경험했다. 미각세포가 파괴돼 음식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 침샘염 때문에 턱이 붓고 음식을 씹기조차 매우 힘들었던 것, 숨 쉴 때마다 방사성 요오드 약 냄새가 올라와 속이 메스껍고, 음식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은 극단적인 입덧이 24시간 지속된 것, 장내 모든 유산균이 죽어 버린 듯 변을 보는 데 상당한 고통이 따른 것,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현기증이 난 것 등. 이렇게 다양한 어려움을 겪다 보니 평소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던 것이다.

예컨대, 그동안 나는 식사를 잘 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억지로라도 식사를 해야 한다고 당부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밥을 잘 못 먹는 입장에 처하게 되니 이게 얼마나 공허한 '잔소리'에 불과했는지 느끼게 됐다. 또한 어르신들께서 왜 부드러운 유동식을 선호하시는지, 왜 가볍게 국수 한 그릇 말아 먹자고 말씀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음식 씹는 일 자체가 힘들다 보니, 그냥 맹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마시고 말았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입덧의 경우 정말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성장한 '40대 남성'인 나는 여성의 임신과 입덧을 내 경험처럼 공감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에 극단적인 입덧을 직접 경험하면서 왜 임신부들이 그렇게 힘들어 하는지, 이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례로 당시 거의 유일하게 입에 맞는 과일이 한라봉·천혜향이었는데, 지친 몸을 일으켜 마트를 찾을 때마다 임신 기간에 복숭아를 먹고 싶다고 했던 아내 생각이 나면서 '아, 그때 그래서 복숭아를 사 오라고 했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깊은 고독을 느꼈던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동위원소 치료를 위해 복용하는 방사성 동위원소 약은 말 그대로 '방사능'을 일정 기간 내뿜는다.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나로서는 퇴원 후에도 약 4주간 셀프 격리를 해야만 했다. 당연히 아이들을 볼 수도 없고, 봐서도 안 됐으며, 공중화장실 이용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도 엄격하게 자제해야 했다. 또한 코로나19 고위험군에 속하다 보니, 식당·카페는 물론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은 스스로 피해 다녀야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홀로 길을 걷는 것 정도였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언저리에서 보고 느낀 것을 다른 분들과 공유하기 어렵다는 점도 고독을 유발하는 요인이었다. 일단 내 마음이 약해진 상태여서 상대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쉽게 상처를 받았다. 그러다 보니 지인들이 말을 조심하는 게 눈에 보였고, 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쉽게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또한 '암'이니 '죽음'이니 하는 주제 자체가 대화하기 좋은 이야깃거리도 아니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울하고 어두운 기운이 전달되는 듯 힘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기에, 가급적 밝은 얘기만 하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내 감정이 점점 변화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사'의 단계에 도달하게 됐다. 본의 아니게 맞닥뜨린 고통의 경험을 통해, 다양한 사람의 형편을 살피고 그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노인, 임신부, 중환자 등을 만날 때마다 이전과는 다른 눈빛과 태도를 갖게 됐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동질감·연대감 같은 것이 마음 깊이 느껴졌는데, 이는 성별이나 나이, 나 자신을 넘어서 타인과 하나 되는 매우 귀한 경험이었다.

특별히 동위원소 치료 이후 제주에서 혼자 지내던 때는 사순절 기간이었다. 나는 한 달이 넘는 기간을 홀로 보내며 광야에서 외롭게 지내시던 예수의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생명이 경각에 달린 여러 환우를 만나고, 내가 그곳에 함께 있었던 경험을 통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던 예수의 마음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지금 이 순간 고난을 겪고 있는 수많은 이의 아픔과 나의 고난, 그리고 예수의 마음의 결이 다르지 않음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어, 깊은 영성의 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암 투병이 일단락된 지금, 나의 삶에는 늘 '멈춤'이 있다. 자료 연구를 하거나 일을 할 때도, 교회 사역을 할 때도 자연스레 멈춤을 누리고 있다. 때론 일부러 '멈춤의 시간'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멈춤을 통해 비어 있는 시공간이 생기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다른 이의 형편을 자세히 살피며 공감할 수 있게 됐다. 내게 '멈춤'은 삶이나 사역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멈춤은 '비움'의 시공간을 만들어 냈고, 그 안에서 생명 세계의 여러 이웃들 그리고 예수와 동행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을 돌아보자. 우리는 끊임없이 전진하고 또 전진하며, 참으로 바쁘고 빠른 인생을 살고 있지 않나. 이렇게 숨 가쁜 인생 가운데 과연 '멈춤'과 '비움'의 시공간이 있을까. 멈춤과 비움이 있어야 비로소 삶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다. 기도의 소리를 잠시 멈춰야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쉼 없이 돌아가는 '종교 생활'을 멈춰야 내면의 신앙이 충분히 성숙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와 영성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충만함, 강건함, 성장 등의 덕목이 아니라 '멈춤'과 '비움'의 영성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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