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목의 표현은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난다) 24쪽에서 차용했습니다. - 편집자 주 
1. 머리 둘 곳 없는 자들

공적 설교권이 주어지는 강도사로 임직을 받은 주일이었습니다. 첫 설교를 무사히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온 직후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날 성경 본문은 하박국 3장이었고 제 설교의 요지는 "믿음이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물질적인 복과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필요한 미덕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고통과 황폐한 인생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힘"이라는 것이었는데요. 설교 이후 순서를 집례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선 담임목사는 방금 전 그 자리에서 선포된 설교를 정확하게 뒤집어 버렸습니다.

"강도사님이 앞서 이러이러한 주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성경에는 하나님을 잘 믿어 복을 받게 된 사람들의 사례가 아주 많습니다. 강도사님이 아직 미숙해서 그런데,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는 교인들의 '아멘' 소리.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복신앙 일변도로 흘러가던 교회 정서에 조금은 다른 관점의 설교를 전하는 게 공동체 전체에 유익하지 않을까 싶어 준비한 설교였는데, 이러한 의도가 완전히 무시됐을 뿐 아니라 부교역자로서 제 존재감이 철저하게 짓밟히는 경험이었지요. 더 소름 돋는 건 이 이야기를 들은 타 교회 부교역자 몇몇의 반응이었습니다.

"우린 어디까지나 담임목사님 목회를 도와드리기 위한 사람들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새벽 4시 전에 일어나 아침에만 1시간 넘게 차량 운행을 돌고, 관리집사가 없는 경우엔 교회 청소와 전등 교체부터 시작해 온갖 잡무를 도맡아 하며, 각종 행사를 다 챙기면서도 담당 부서 목양에도 힘쓰고, 그런 와중에 담임목사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스를까 매사 노심초사하며 저자세로 살아야 하는 존재가 '부교역자'입니다. 교회에서 누구보다 다양한 일을 하고 그만큼 많은 스트레스를 받지만, 대다수의 부교역자는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렵습니다. 주일에는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잠시 어디 앉아 있을 때조차 눈치를 봐야 합니다. 말 그대로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해서 목회자가 됐지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비정규직으로 취급받고, 교회에 모든 열정을 바쳤지만 4대 보험 혜택도 받아 본 적 없는 사람. 가르마 비율이 담임목사 보기에 못마땅하다는 이유로 교인들 앞에서 공개 망신을 당하는 사람. 그들이 부교역자입니다.

2. 도구화된 인격

앞서 이야기한 일이 있은 지 몇 주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동갑내기 친구 하나가 씩씩대며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이야기인즉슨 친한 동생이 어느 대형 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는데, 사역에 '열매'가 없고 업무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 앞에서 담임목사에게 손찌검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자리에는 뺨을 맞은 그 부목사의 아내도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둘은 충격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집에 가서야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친구가 진짜 화난 지점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다음 주일 담임목사가 뺨을 맞은 부목사를 불러 사과 한마디도 없이 그저 돈 봉투 하나 탁 건네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맷값'이었던 셈이지요.

사실 '조인트 까이는' 정도의 일들은 워낙 보편적이라 교역자들 세계에서는 화젯거리조차 되기 힘듭니다. 오늘날 부교역자들이 직면해 있는 진정한 위기는 단순히 상급자(?)로부터의 폭력이나 비정상적으로 낮은 처우가 아닙니다. 담임목사 한 사람의 리더십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인격이 말살당해도 괜찮은 존재, 가정을 인질로 삼고 사택을 볼모로 잡아 온갖 부당한 일들을 강요하는 교회 앞에서 저항은 꿈도 꿀 수 없는 존재, 그렇게 인간성을 탈취당하고 철저하게 도구화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비참한 자기 정체성'이야말로 진정한 위기입니다. 세속 사회가 인권 보장과 평등과 차별 철폐를 노래할 때 그런 세상을 비웃고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교회들이, 되레 비인간화와 직분에 따른 차별과 종교적 파시즘으로 치닫고 있음을 부교역자들의 삶이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꼴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교역자들은 교회 조직의 일선에서 여러 '구조 악(Structural Evil)'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 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비난을 대신 감당해 줄 총알받이로, 또 가슴을 후벼 파는 거친 언어를 함부로 쏟아 내도 괜찮은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취급받으면서 말입니다. 제가 부교역자 생활을 정리할 때가 되니 비로소 깨닫게 되더군요. 왜 신학교에선 순진하고 착했던 많은 사람이, 부교역자로서 연차가 쌓여 갈수록 히스테릭하고 괴팍한 성격들로 변해 가는지. 가르마 비율까지 정리해 가며 뒤집어 써야 하는 짙은 종교적 가면 뒤에서, 그들의 인간성은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길

최악의 비극은 목회를 위한 수단 내지 기계적 도구로 취급당하는 삶을 억지로 버텨 내고, 건강과 가정과 순수함과 열정마저 팽개쳐 가며 겨우 부교역자 생활을 끝낸 뒤 마침내 '담임목사'로 청빙받은 이들이, 여태껏 자신이 받아 온 인격 모독과 비정상적 처우들을 그대로 되갚아 주는 사람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도 한때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겠지만, 이를 지켜 내기엔 지난 시간이 너무나 길고 혹독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교회의 '덕'과 '질서'와 '은혜'로 가장한 구조적 죄악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긴 세월을 비인간화된 도구로 살아온 자들이 다음 세대 부교역자들을 또다시 비인간화하고 도구화합니다.

분명 과거 자신의 모습과 똑 닮은 사람들인데도, 자신의 편협한 신학이나 목회 방향에 어긋나는 언행을 용납하지 않고, 부교역자들의 몸이 망가지든 말든 온갖 잡무와 격무에 동원해 있는 대로 '뽕'을 뽑아냅니다. 순하고 착하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는 목사의 책상을 치워 버리고, 학문에 조예가 깊지만 중직자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 강도사의 조인트를 까고, 건방지게도 근로계약서 작성을 요구하는 전도사는 해고하면서 다른 교회에도 가지 못하게 앞길을 막아 버립니다. 누구보다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자주 입에 달고 살지만 그들의 세상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들이 존재합니다. 복종, 눈치, 그리고 (사람을 향한) 절대적 충성 같은 것 말입니다.

교회는 돈과 효율과 경쟁 앞에 인간성을 잃어 가는 짐승들의 세상, 즉 가이사의 제국에 복음으로 맞서 싸우기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정작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부교역자들은 가장 비인간적이고, 가장 위선적이며, 가장 폭력적인 처우에 노출돼 있습니다. 그나마 저는 부교역자의 삶을 떠났고 다시 돌아갈 일도 없기에 이토록 날선 글을 쓸 수 있지만, 아직도 그 안에 남아 상처 입고 멸시받는 와중에 한 영혼이라도 더 사랑해 보고자 발버둥치고 있을 많은 부교역자들은 스스로의 현실과 미래를 돌아볼 여유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몸을 축내고 마음을 망가뜨려 가며 죽도록 버티다가 담임목사로 청빙받는 핑크빛 미래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맹목적 삶 속에서 부교역자들은 영혼 없는 기계로 전락합니다. 그들에게 무슨 대기업 임원급 처우를 해 주자는 게 아닙니다. 빚에 쪼들리지 않을 정도의 적정한 급여, 최소한의 인격적 대우를 받으며 성실하게 사역할 수 있는 환경,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동역자로 인정해 주는 담임목사, 조금 부족하고 연약하더라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교인들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대다수의 교회 조직에 중추로 자리하고 있는 부교역자들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위선의 가면을 벗겨 줄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부교역자들이 건강하게 회복된다면,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가 회복되는 일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들도 여러분의 형제·자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교회 성장과 담임목사의 목회를 위해 착취해도 좋은 도구가 아닙니다. 부족하고 모자라더라도, 부교역자 역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입니다.

정우조 / 대안 교회를 꿈꾸는 동료들과 '광야그리스도인공동체'를 일구고 있는 사람. 너, 내 동료가 되라!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