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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2년 2월 주제는 "대선 정국, 외면당하는 낮은 목소리들"입니다. - 편집자 주

오래전 일이다. 강원 지역 세습무 연행을 연구하기 위해 강릉단오제 굿에 참여한 적이 있다. 세습무의 굿 내용, 절차, 사용하는 장단, 선율, 세습무 가계도 등을 기록하는 중, 연행에 대한 그들의 지극한 정성을 보았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이렇게 정성을 기울여 왔던가 반성하게 된 대목이었다. 한참을 뛰면서 굿을 벌이는 중 꽃 하나의 방향이 잘못된 것을 본 그들은 연행을 멈췄다. 냉정했다. 사소한 꽃 하나 때문에.

그리고 다시 시작된 연행. 6시간 넘게 번갈아 가며 굿을 행하던 그들이 서서히 지쳐 갈 때쯤, 뒤에서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치마를 들춰 올리고 그 안에 옷을 또 들춰 올려, 꼬깃꼬깃한 만 원 한 장을 소중히 꺼내셨다. 헌금이다. 무당은 접혀 있던 돈을 한참 쳐다보더니, 이 돈을 어떻게 모았느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소곤소곤, 중얼중얼, 그리고 끄덕임. 세습무는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이 할머니에게는 가장 소중할 만 원 한 장의 가치를 설명했다. 그리고선 굿을 시작하는데, 이전의 굿과는 사뭇 다르게 농축된 땀을 뻘뻘 흘리며 복을 빌었다.

"이 할매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이 할매의 소원이 온 동네 온 마을 온 사회에 거름이 되게 하시고, 만복이 이 할매에게 오게 하시어 할매의 삶이 형통케 하소서."

세습무의 간절함은 연행에 묻어났다. 6시간 동안 방방 뛰는 굿을 하고도 만 원짜리 한 장에 다시 일어나 한 시간여 지극정성을 들인 굿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갖는 그들의 얼굴은 환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생각났다. 오늘날의 교회는 만 원 한 장에 이토록 온 정성을 다해 복을 빌어 주는가. 고등 종교를 자처하는 기독교가 이들의 민간신앙보다 나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기독교는 복을 빌어 주는 종교가 아니니 그들과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만 원 한 장의 정성에도 복을 빌어 주는 그들의 기반은 민중의 삶에 있었다.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며 떠들썩하게 벌이는 동네 어르신들의 '얼씨구' 한판은, 중재자인 무당과 서로를 격려하는 민중의 어울림이었다. 그들은 민중과 함께 두루뭉술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특정한 공간을 공유하지 않아도 그들은 그 자체로 힘이 있는 공동체였다.

최근 정치 세력과 연관이 있다는 의혹을 받은 주술 집단에는 이런 민중의 삶이 배어 있던가. 그들 안에는 민중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의 염원을 기복과 사행심으로 탈바꿈해 복을 빌어 주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주술 집단의 이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민간신앙에 사행심을 부추겨 사적 이익을 취하고, '중재자'로서의 무당이 아닌 '권력자'로서의 무당의 위치를 획득한 그들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이익을 더 확대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정치권과 오랜 밀월 관계를 이어오기도 했다. 이들의 문제는 특정 종교를 넘어서 권력을 탐하는 자들과의 끝없는 밀월 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적 이익 추구에 있다. 

사적 이익을 취하려는 종교는 어떤 종교든 매한가지다. 이를테면, 신천지는 그들이 '이단'이라는 것을 넘어서는 문제, 즉 그들이 종교를 가장해 사적 탐욕을 채우려 한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돈 없는 자들의 주머니를 털면서 황금빛 미래(현세이든 내세이든)를 꿈꾸게 하고, 가정에서 이탈하게 하며, 일터에 나가야 할 사람들을 포교 수단으로 활용하는 등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신도들을 삶에서 분리시키고 종교 논리에 복종하게 만들어 그들의 목소리를 '무음'으로 만든다.

그 안에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 맺힌 목소리를 찾아볼 길이 없다. 신도들의 목소리는 없으며, 오로지 신도들을 복종시킬 명령어만 존재한다. 2020년 대구 코로나 확산 때,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숨죽여야 했던 수많은 신도들을 외면한 신천지 대표자들의 변명은 한결같았다. 신도들의 암담하고도 척박한 삶을 걱정하는 언어는 어디에도 없었고, 오로지 자신들의 존재 근거가 흔들릴까 걱정하는 명령만 존재했다. "신천지임을 숨겨라."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제 먼 길을 돌아 기독교로 와 본다. 기독교는 위의 주술 집단이나 신천지와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는 과연 기복과 사행심을 부추기는 집단, 신도들을 복종시킬 명령어만 존재하는 집단, 사적 이익을 영구히 지속하기 위해 꼼수 부리는 집단과는 전혀 다른 종교로 존재해 왔던가? 정교 유착의 역사 앞에서 기독교 역시 자유롭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한다. 1969년 삼선 개헌 지지, 1972년 유신헌법 지지, 1980년 신군부를 위한 국가 조찬 기도회 등 국가권력과 유착해 얻어 낸 절대 이익집단 안에 민중은 없다. 하루 품삯 한두 푼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으로 바치는 가난한 민중의 푼돈을 모아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금 운용의 지속성을 위해 변칙 세습을 감행하는 집단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 어떤 이단·사이비 집단에도 돌을 던질 수 없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정통성을 시비하며 그토록 부르짖던 이단 정죄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주술 집단과 밀착된 정치인을 지지하는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은, 그동안의 정통·이단 시시비비는 모두 권력과 사적 이익을 향한 탐욕 때문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그들에게는 정통·이단이 문제가 아니었다. 서로의 차이를 혐오와 차별로 갈라 권력을 누리려는 집단적 탐욕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성전에서 장사를 했던 장사치들의 실체다.

이제 우리가 함께 지키기로 다짐해야 할 원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이다. 이 원칙과 진영 사이에 거리가 존재한다면 결과는 매한가지일 뿐이다. 이 원칙과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적 사명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이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 이단의 비정통성을 따질 게 아니라, 그들의 '비민중성'을 엄밀히 꾸짖고, 민중의 삶에 대한 돌봄을 우선시하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 한, 민중에게 그들 자신의 말을 돌려주고 함께 어우러져 삶을 공유하지 않는 한, 주술과 신천지와 기독교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고성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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