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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1년 12월 주제는 "대선 정국에서 조동연 교수와 관련하여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 편집자 주
무엇이 폭력인가

2021년 말 대한민국 대선 정국에서 군인 출신의 대학교수 한 사람이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의 공동상임선대위원장으로 위촉됐다가 사생활 관련 의혹으로 사퇴한 사건이 있었다. 위원장 위촉과 자진 사퇴, 그리고 사퇴에 대한 공식 수용이 이뤄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나흘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사회적·상징적 폭력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 사건은 어떤 면에서 폭력적이었을까.

각종 범죄부터 테러·폭동·국제분쟁에 이르는 폭력은 가시적 폭력으로서 우리가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다. 반면 '언어'라는 상징을 통해 특정인을 규정하고 단죄하는 폭력은 비가시적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상징적 폭력'이라 부른다. 필자는 조동연 교수 사건에서 상징적 폭력의 두 가지 측면을 비평적으로 바라봤다. 하나는 이 문제를 심각한 폭력으로 인지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정상적인 의사소통 기능이 교란됐다는 점이다.

첫번째 측면에서 볼 때, 이번 사건은 명백한 상징적 폭력이지만, '사실을 알 권리를 위해 폭로한 것일 뿐'이라고 포장될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사실이며, 알 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상징적 폭력은 이렇게 일어났다. 일단 '혼외자'라는 언어로 한 사람을 재단하자, 개인의 삶의 정황과는 상관없이 한국 사회의 보편 정서에 따른 윤리가 절대 기준이 됐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곧바로 '부적절한' 사람이 됐다. 그 언어가 실제 조동연 교수 개인과 관계없이 '비윤리적 사생활', '부적격'이라는 상징 영역을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이 폭력성이 여과 없이 진행되어 타인들이 개인의 삶을 비난할 당위를 제공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한 아이의 존재를 무자비하게 규정하는 정체성에 대한 폭력도 일어났다. 

"적이란, 당신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처럼, 일반적으로 여론을 통한 비난이 쉽게 형성되는 이유는 대중이 당사자의 개인적 서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추후에 밝혀진 '성폭력에 의한 임신'이라는 참담한 개인사는 양심적인 대중에게 먹먹한 무게를 드리웠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잘못이 아닌 타의에 의한 일이므로, 진작 사실을 밝히고 위원장 자리를 지켰어야 한다"고 말이다.

차라리 그런 조언이 통할 수 있는 현실이라면 조금 더 나았을까. 그런 저항이 과연 한 사람이 버텨 내고 이겨 낼 수 있는 무게의 것이었을까.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정치계 울타리에서 벗어나 단절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성폭력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끝나지 않는 제2의 폭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누구를 위해 저항을 하며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걸까. 차라리 이 사회의 폭력 양상을 개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두번째 측면인 '의사소통의 교란'은 대중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다. 일단 어떤 사람을 규정하는 이미지가 언어를 통해 씌워지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실제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이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조동연 교수를 햔한 폭력과 선정적 비난이 일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맡겨진 직책이 무엇이고 어떤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우선시돼야 하는지 잊었다. 이 일이 이슈가 된 이후에 생산된 의사소통은 대부분 교란된 것이었고 본질에서 멀어진 것이었다.

정치인은 영웅도 아니지만 희생양도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정치를 위해 전문할 대표성을 위임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맡겨진 자리와 임무에 대한 논의는 온갖 황색 언론에 묻혔다. 이 혼돈의 무대 주위에는 구경꾼의 역할을 한 대중이 있었다. 어쨌거나 대중은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목격자의 입장이 아니라 구경꾼의 입장에 선다. 그렇다면 구경꾼의 문제는 무엇인가.

구경꾼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정치사회 칼럼니스트 볼프강 조프스키(Wolfgang Sofsky)는 그의 저서 <폭력 사회>(푸른숲)에서 기독교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고백록>에 나온 '폭력의 유혹'에 관한 일화를 언급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알리피우스는 친구들에 의해 반강제로 검투 시합 구경을 갔다. 독실한 신자였던 알리피우스는 자신의 정신과 눈은 그 폭력성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결국 검투사들이 입은 상처와 흘린 피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처음에는 폭력적인 현장에 대한 역겨움·혐오감에 검투 시합을 거부하던 그가 결국 그 격렬함에 휘말리고 사로잡힌 구경꾼이 되고 만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폭력 현장을 직시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사실 가시적 폭력보다 더 무서운 비가시 폭력이 첨예화·일상화하는 현실에서 자기 정신을 온전히 지켜 내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오늘날의 구경꾼은 알리피우스처럼 단순히 반강제로 끌려가서 현장을 목격하는 경우에 그치지 않는다. 나름의 목적과 입장을 갖고 폭력을 찬성하고 부추기지만, 그 책임에서는 떨어져 있는 다소 능동적 구경꾼이 있다. 그런가 하면 폭력 현장을 혐오하지만, 고개를 돌려 거리 두기를 하는 데 그치는 방관적 구경꾼도 있다. 문제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구경꾼의 존재가 폭력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내 개인들에 대한 존중을 잊지 않는 시민 정신을 지켜 내는 것' 그리고 '폭력을 추동하는 에너지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성찰'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게 현실이고 만사가 다 그렇다. 세상을 냉철하게 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실제로 그래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의 무관심이나 무심코 던지는 냉소가 곧 폭력의 질주에 순풍을 더해 주거나 방치하는 방식으로 맞닿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중과 희생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이 사건에 막연한 동정심을 품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시도하고 안타까움을 표하면서도 여전히 그 고통이 내 고통이 아님을 안다. 그리고 폭력은 그것을 통제할 더 큰 힘을 통해 제어되지 않는다는 점도 안다. 그럼에도 폭력을 적시해서 그 에너지를 빼고, 사회에 만연한 폭력에 대한 암묵적 지지와 동의를 제거하는 작업을 지속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시간과 함께 지나갈 것이다. 사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부담을 안겨 준다. 갈등이 해소된 후 누군가는 그동안 표출된 집단적 폭력 에너지가 '과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이미 많은 것이 고통의 흔적이 된 이후일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은, 조동연 교수와 그와 같은 입장에 섰던 많은 다른 이가 '아무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자신의 삶을 감당하며 용기를 냈던 역사적 경험' 아니겠는가. 폭력의 야만이 춤추는 세상에서, 용기가 우리를 다시 일으키고 성찰이 또 다른 내일을 불러오기를 기대한다.

김민정 / 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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