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연말이 되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속도가 더 빨라진다고 하던데 제 속도는 50km/h 정도 되는 것 같네요. 이 정도면 시내 제한속도인데 말이죠….

올해 저는 재수생 엄마로 살았어요. 일 년 내내 아침마다 아이를 학원에 실어 날라야 했습니다. 예민한 아이 눈치 보느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았네요. 그래서인지 시험이 끝나는 날 수험생 못지않게 행복하더라고요. 비록 아이가 시험을 잘 보지는 못했지만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2022년에도 저는 수험생 엄마가 됩니다. 둘째가 고3이 되거든요.ㅎㅎㅎ 인생은 참… 산 넘어 산인 것 같아요. 그렇죠? 하지만 2년을 했는데 1년 정도야 뭐… 힘내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뉴스앤조이>도 항상 산 넘어 산입니다. 소송을 하나 끝내면 또 다시 소송이 찾아오고, 여유 부릴 새 없이 재정난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아요. 2022년에는 또 어떤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칠까요? ^^ 

저희가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었던 건, 독자 님을 포함해 많은 분이 지지를 아끼지 않아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내년에도 계속 동행해 주실 거죠? 아무쪼록 한 해 잘 마감하고 새롭고 희망찬 2022년을 맞으시길 기도합니다.

사역기획국 승연

처치독 리포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목사

한국 민주주의와 노동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조지 오글 목사(1923~2020, 한국명 오명걸) 이야기를 전해 드리려고 해요. 

2020년 11월 세상을 떠난 오글 목사를 추모하며, 최근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고난함께)이 온라인 전시와 학술제를 열고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추모식을 열었는데요. 

한국 노동운동의 큰산으로 불리는 조화순 목사를 비롯해 최영희 전 의원(탁틴내일 이사장), 안재웅 이사장(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하종강 교수(성공회대 노동대학장) 등 그의 가르침을 받고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오글 목사를 추모했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을 깨우다

오글 목사는 1960년 미국 연합감리교회 파송 인천 지역 선교사로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 1961년 인천 동구 화수동에 '도시산업선교회'(도산·인천산업선교회의 전신)를 세우고, 공장노동자들에게 주목했습니다. 

- 도산에서 활동하려는 대학생·신학생은 6개월에서 1년 이상 공장에서 직접 일해야만 했죠.

그는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일깨우는교육을 끊임없이 했어요.‍♀️‍ 그 결과 인천 동일방직에서 전국 최초의 여성 노조위원장이 탄생했습니다. 노동자 1300명 중 1200명이 여성이었지만, 24대에 이르기까지 노조위원장은 전부 남성이던 시절이죠. 

화수동 도산 건물은 탄압당하는 공장노동자의 쉼터였고, 교육의 산실✍️이었다고 당시 활동가들은 증언합니다.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도산(도시산업선교회)이 들어오면 기업이 도산한다"는 마타도어(흑색선전)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하네요.

박정희 정권 공개 비판하다 강제 출국

오글 목사는 한국 민주주의사에도 족적을 남겼어요. 1974년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입니다.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8명이 고문 끝에 '인혁당 재건위'에서 활동하는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죠. 사형수 가족들의 호소를 들은 오글 목사는 직접 나섰습니다. 1974년 10월 10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강당에서 열린 목요 기도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해요.

"예수님은 종종 우리들의 형제자매 중 가장 보잘것없고 약한 자를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혹독한 형을 받은 여덟 사람이 있습니다.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우리들 중 가장 가난한 자로서 예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생명과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사형을 받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피의자를 숨겨 주는 것만으로도 잡혀가던 시절, 오글 목사는 공개적으로 인혁당 사건이 부당하다고 외치며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습니다. 이 일로 그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12월 14일 급작스럽게 강제 출국당했습니다. 그는 비행기에 오르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하나님과 함께!"

박정희 정권은 1975년 4월 대법원 판결 다음 날 8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어요. 이 사실을 안 오글 목사는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고, 여러 공개 활동과 인터뷰 등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을 폭로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한국을 향한 끝없는 사랑

민주화 이후에도 오글 목사는 한국을 향한 관심을 끊지 않았어요. 평화통일을 위해 수차례 한국을 찾고, 1995년에는 북한을 방문하는 등 끊임없이 활동했죠. 오글 목사는 1994년 고난함께에 보낸 기고문에서, 과거에 안주하지 말고 '통일'이라는 미래를 위해 계속 운동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고 걱정했는지 드러나는 대목이죠.

"지난 수십 년을 통해서 우리가 목격해 온 인권 유린은 국가 안보라는 명분 아래 자행했던 것입니다. 민족 분단이 계속되는 한 그 사고방식은 변하지 않습니다. 최근 인권 상황의 진전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 인권이 아직도 유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지 잃어버리지 맙시다. 이제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를 향할 때에 우리 형제자매들의 고난을 잊지 맙시다. 기억하고 기억함을 통해 고문과 억압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는 세상을 건설합시다."

Our lives in Korea and Korea in our lives

오글 목사의 마지막 방한은 2002년이었어요. 그는 1974년 추방당할 때 인혁당 사건 사형수 우홍선 씨의 아내 강순희 씨가 여비로 쓰라며 건네준 금반지를 차고 한국에 왔다고 해요. 수십 년간 이 반지를 간직하다가 훗날 딸에게 이를 물려줬다고도 하죠.

90년 가까운 삶에서 15년 남짓 한국에서 사역했지만, 그의 자서전 제목은 <Our lives in Korea and Korea in our lives>일 정도로 한국은 그에게 특별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오글 목사를 추모합니다.

편집국 승현

※오글 목사 추모 1주기를 맞아 고난함께 및 유관 단체들이 공동 출간한 <한국 민주주의의 친구 조지 오글>(신앙과지성사)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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