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녕, 기독교>(토기장이) 저자 김정주 전도사가 진행한 평신도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 완성반 참석자가 쓴 글입니다. '한 권의 책 쓰기' 프로젝트에서 저술한 단행본 형식의 미출판 원고 중 일부를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사모행전 - 교회밖에 사모'는 10회에 걸쳐 격주로 연재됩니다. - 편집자 주

아이를 낳고 한동안은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주변에서 듣자 하니, 다른 교회에는 '사모가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2주 혹은 한 달 안에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는 율법(?)이 있단다. 그 이후부터는 매주 예배 출석이 의무라고 했다. 다행히도 우리 교회는 그런 내부 규정이 없었다. 

첫 아이를 출산한 지 한 달 만에 아이를 데리고 예배에 다녀왔다. 그 뒤로는 매주 참석하기가 어려웠다. 2~3주에 한 번 참석하는 정도였다. 누군가는 '고작 아이 하나 데리고 교회 가는 게 뭐 그리 어렵냐'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새벽부터 출근하는 남편 없이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게다가 우리 첫째 아이는 좀 특별했다. 아니, 내가 좀 특별했다. 

병원에서부터 젖병을 맛본 이 녀석은 절대로 내 젖을 직접 물지 않았다. 모유를 유축해서 젖병에 넣어 줘야만 먹었다. 다행히 분유도 잘 먹고 모유도 잘 먹으니, 아이 자체는 외출에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결국 나였다. 나는 모유량이 엄청났다. 유축기로 아무리 짜도 모유량은 줄지 않고 꾸준히 늘어만 갔다. 어떤 날은 하루에 2000ml를 유축해야 할 정도였다.

모유는 엄청나게 잘 돌았지만, 아이는 절대 내 젖을 직접 물지 않았다. 찌르르하게 가슴이 아파지면, 곧바로 유축기 앞에서 모유를 짜내야 했다. 손으로 짜내는 유축기로는 어림도 없었고, 전동 유축기가 필수였다. 그렇다 보니, 나와 아이의 외출 시간은 길어야 1시간 반에서 2시간 남짓이었다. 그 이상이 되면 모유가 줄줄 샜다. 모유량이 많아 모유 수유 패드를 갖다 대도 어느 순간 보면 앞섶이 젖어 있곤 했다.

아이와 예배에 나갈 때면 늘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서 움직이곤 했다. 일어나자마자 유축 30분, 유축기·젖병 씻어 말리고 소독하는 데 1시간, 그 1시간 안에 나도 씻고 아이도 씻기고 외출 준비 마치기. 예배 시작 45분 전 마지막 유축 시작, 30분 전 유축기·젖병 씻어 소독기에 넣어 두고 15분 전 출발, 11시 유아실 도착.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예배드리고 집에 돌아오면 또 바로 유축.

그날은 아마 추수감사절이었던 것 같다. 평소보다 예배 시간이 길었다. 시간이 늘어지니 모유도 점점 많이 도는 것 같고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어느새 숨까지 턱턱 막혀 왔다. 절대 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아이를 데리고 유아실 구석으로 가서, 거의 애원하듯 젖을 물렸다. "제발, 조금이라도 먹어… 엄마 너무 아픈데 제발…." 애원이 무색하게도 아이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유축기 앞에 앉았다. 세상에, 내가 언제 여기에 이런 걸 넣어 뒀나 싶을 정도로 가슴 안에 딱딱한 플라스틱 같은 게 만져졌다. 분명 말랑말랑한 살이어야 하는데, 딱딱하게 굳어 버린 데다가 너무 아파서 도통 만질 수가 없었다. 유축기로 아무리 짜내도 비명만 나올 뿐, 모유는 나오지 않았다. 이내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뒤늦게 오신 시어머님께 아이를 맡겨 두고, 창피함은 던져둔 채 엉엉 울었다. 설상가상으로 열까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로 응급실을 갔어야 했는데, 미련한 나는 전자레인지에 돌린 찜질팩으로 딱딱하게 굳은 젖을 녹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살이 빨개질 정도로 뜨거운 찜질팩을 연신 갖다 대고, 바닥을 뒹굴며 젖을 녹이고 또 녹였다. 조금 녹았다 싶으면 유축기로 젖을 짜냈다. 젖이 아니라 피가 나왔지만, 그렇게라도 굳은 젖을 조금씩 녹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찜질팩을 가져다 댔던 부위는 빨갛게 화상을 입었다. 나중에 그 부위는 시커멓게 착색됐고, 첫 아이뿐 아니라 둘째 아이 모유 수유를 끊을 때까지도 색이 변하지 않았다. 피가 잔뜩 나고, 플라스틱 조각처럼 굳은 모유 덩어리가 나왔던 젖꼭지는 온통 해져 있었다. 그 모든 상처가 아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당연히 회복하는 동안은 다시 예배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예배에 나오라는 이야기를 에둘러서 하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매주 예배에 가게 됐다.

그랬다. 명시적인 규정은 없었어도 결국 사모들의 출산휴가는 암묵적으로 한 달이었다. 길어야 100일이고 말이다. 사람마다 아이마다 처지가 다르지만, 그 '한 달'이라는 기간은 꼭 지켜야 하는 불문율처럼 여겨졌다. 저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을 겪었다고 양해를 구한다고 해도 과연 교회에서 이해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괜스레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는 이들이 있다'고.

예배의 소중함을, 하나님 앞에 나오는 그 시간을 가벼이 여긴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때때로 예배에 나오기 힘든 이들에게 교회가 조금의 여유와 따스한 배려를 베풀어 주길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아마도 지나친 욕심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새로 옮긴 사역지에서는 그런 부분을 배려해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제법 자랐을 즈음, 출산한 지 한 달 정도 된 사모님이 아이와 함께 인사하러 예배에 나오셨다. 예배 후 담임목사님이 그 사모님께 "너무 무리해서 나오지 마시라. 아이와 사모님의 건강이 최우선이니 상황에 맞게 예배에 나오시라"고 말하는 모습을 봤다. 

이후로 그 사모님은 정말 본인의 상황에 따라 아이를 데리고 예배에 참석하기도,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혼자 예배에 나오기도 하셨다. 가끔 남편 전도사님이나 사모님에게 아이가 잘 크는지, 사모님 몸은 좀 어떤지 안부를 묻는 분들이 계시긴 했지만, 그게 예배에 꼭 아이를 데리고 나오라는 강요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정말 사모님과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여전히 '사모들의 출산 휴가는 한 달'이라는 내부 규정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한국교회에서 암묵적·명시적으로 통용되는 이 말이, '명령'이 아닌 각자의 건강과 상황에 따라 조율될 수 있는 아래와 같은 '배려의 말'로 바뀌기를 소망해 본다. 꼭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더라도, 저마다의 이유로 예배에 출석하는 게 어려운 분이 있을 테니 말이다.

"사모님, 출산 후 아이와 함께 예배에 나오는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사모님과 아이의 건강 상태에 따라 자유롭게 예배에 나오시면 됩니다."

민달팽이 / 사모師母가 아닌, 하나님을 사모思慕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매일매일 아등바등 삶을 살아 내고 있는 이 시대의 '불량 사모'. 교회 '밖에'서가 아닌, 교회'밖에' 모르던 삶으로 돌아가려 여전히 애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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