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녕, 기독교>(토기장이) 저자 김정주 전도사가 진행한 평신도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 완성반 참석자가 쓴 글입니다. '한 권의 책 쓰기' 프로젝트에서 저술한 단행본 형식의 미출판 원고 중 일부를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사모행전 - 교회밖에 사모'는 10회에 걸쳐 격주로 연재됩니다. - 편집자 주

내가 다녔던 모교회 청년부실은 교회 근처 2층 건물 1층에 있었다. 2층에는 투룸 2개와 원룸 3개가 있었는데, 거기가 부목사님들의 사택이었다. 우리 교회 청년부에는 나를 포함해 국어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여자 청년만 4명이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평일 비어 있는 청년부실에 모여서 스터디를 했다.

당시 2층 사택에는 다섯 살 아들 하나, 세 살 쌍둥이 아들, 이렇게 아들 셋을 둔 청년부 목사님 가족이 살고 계셨다. 사모님은 평소 먹거리를 중시하시는 편이라 1층에서 공부하는 우리들의 식사를 늘 걱정하셨다. 점심에는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교회 근처 식당에서 다 같이 밥을 먹었지만, 저녁에는 꼭 우리를 집으로 부르셨다. 저녁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을 봐주면 된다고 하시면서 늘 밥상에 숟가락을 네 개나 더 놓으셨다.

그렇게 1년 넘게 사모님 댁에서 신세를 졌던 것 같다. 가끔 두 분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에 아이들을 보며 두 분만의 시간을 드리고 선물도 드렸지만, 우리가 진 신세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게다가 용순 씨가 집에 불을 지르겠다며 화를 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 주신 분도 목사님이셨고, 결혼을 준비하며 맞은 파혼의 위기 앞에서 누구보다 마음을 다해 상담해 주신 분도 사모님이셨다.

남편과 결혼한 후 새 보금자리가 생겼다. 그 누구보다 먼저 목사님 가정을 초대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좋아하시는 샤브샤브로 한 상을 차려 드렸다. 아토피 때문에 먹는 것에 제약이 많은 아이들을 위해 몸에 좋은 재료로 만든 쿠키와 케이크도 만들었다. 가끔 직접 구운 빵이나 쿠키를 사모님 댁에 가져다드리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내가 받은 은혜를 갚고 싶었다.

결혼한 지 8개월이 됐을 때, 남편이 모교회에서 파트타임 전도사로 일하게 됐다. 신혼집은 교회와 다소 거리가 있었다. 임신까지 해서 몸이 무거웠던 나는, 주일 오전 예배가 끝나고 오후 예배 전까지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수요 예배 때도 비슷했다. 그래서 예전처럼 목사님 댁에서 잠시 신세를 졌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께서 굉장히 곤란한 표정을 지으시며 이야기를 꺼내셨다.

"사모님, 이제 우리 집에 오는 거, 좀 조심하셔야 할 거 같아요. 이런 말 꺼내서 미안해요."

"여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민달팽이 사모님 몸도 무거운데 그럼 어디에 가 있어요?"

옆에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사모님께서 나 대신 목사님께 질문을 던지셨다.

"그러게… 사모님 사정도 아는데, 교회가 좀 어수선해서 그런지 뭐라 하시네."

"이 좁은 골목을 누가 본다고… 사모님,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언제든지 와요."

청년부 시절에는 청년들이 그렇게 자주 드나들어도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는데, 사모가 되자마자 서로의 집에 드나들지 말란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저 당시 교회 상황이 담임목사님 은퇴와 맞물려 매우 혼란스러웠기에, 모든 것을 조심시키려는 의도였을 거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사모님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신 목사님의 표정을 보고 난 후로는 예전처럼 목사님 댁을 드나들 수 없었다. 그 이후 나는 출산으로 당분간 교회를 나가지 못했고, 목사님 가정은 사역지를 옮기게 됐다. 그렇게 목사님 가정과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별하게 됐다.

우리도 담임목사님의 은퇴와 맞물려 사역지를 옮기게 됐다. 새로운 사역지에 오자마자 사모가 지켜야 할 수많은 주의 사항을 들었는데, 거기에도 꼭 빠지지 않는 내용이 바로 그거였다. 사모들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지 말고, 서로의 집에 드나들지 말며, 평신도들과도 어울리지 말라는 것. 그분들이 염려하는 바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말해 주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허물없이 서로의 집을 드나들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문제가 있으니, 그 작은 문제의 씨앗조차 남기지 말라는 얘기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을지라도 그저 그 명령에 최선을 다해 따르며 살아갈 무렵이었다. 토요일 밤 갑자기 배탈이 심하게 났다. 밤새 열이 펄펄 나고 구토를 했다. 탈수가 올 정도로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남편은 주일이라 새벽부터 출근했고, 난 아픈 몸을 이끌고 아이 둘을 데리고 예배에 나갔다. 한 사모님이 나를 보더니 안색이 좋지 않다며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셨다. 대략적인 몸 상태를 설명했더니 당장 응급실에 가야 한다며, 아이들을 봐줄 테니 얼른 응급실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사모님께 아이 둘을 맡기고,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며 생각했다. 사모들끼리 서로의 집에 드나들지도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명령이 '사람'보다 앞설 수는 없는 거라고.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는 내가 사모라 할지라도 상대방이 사모든 평신도든 명령보다 앞서 그 사람을 돕는 게 맞는 거라고. 그날 내가 다른 사모님께 받았던 배려처럼 말이다.

어느 날, 내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모님 가족이 새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도 남편이 먼저 사역을 시작하고, 한참 후에야 사역지 근처로 이사를 한 경우였는데, 그 사모님도 아직 이사를 못했다고 들었다. 게다가 둘째는 갓 백일이 넘은 아기인데, 하필 처음 교회에 인사드리러 오는 날이 주일인 데다가 송구영신 예배까지 겹쳐, 하루 종일 아이들 둘과 있을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하셨다.

나도 처음 송구영신 예배 때, 있어야 할 곳이 마땅치 않아 낯선 교회 한 구석에서 아이 둘과 점심·저녁을 해결하고, 예배가 끝나는 새벽까지 아이들을 돌봤던 기억이 났다. 얼굴도 모르는 사모님께 '명령보다 앞선 사람에 대한 배려'를 떠올리며 연락을 드렸다. 비록 아주 편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 둘과 우리 집에서 그날 하루 계시는 게 어떻겠냐고. 아직 성함도 모르고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그렇게 집을 내어 드리고 식사를 챙기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사모님이 다른 교회를 섬기실 때까지도 우리의 인연은 계속됐다. 사모님도 친정과 시댁이 모두 멀리 있어 급할 때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으셨다. 나 또한 비슷한 처지였기에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아이들을 봐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됐다. 언젠가 또 내가 갑자기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던 날에도, 사모님이 먼저 전화해서 말씀하셨다.

"민달팽이 사모님, 제가 그런 상황이었어도 목사님이나 사모님께 먼저 전화를 드리고 부탁드렸을 거예요. 한밤중에 갑자기 응급실에 가야 할 상황이 왔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사모님이더라고요. 사모님도 그러실 거고요. 그러니 아이들 맡기는 거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사모들끼리 서로의 집에 드나들지 말라는 명제에서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그 명령보다 앞선 것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 그 존재니까 말이다. 명령보다 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노력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모님들 혹은 성도님들이 급할 때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집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민달팽이 / 사모師母가 아닌, 하나님을 사모思慕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매일매일 아등바등 삶을 살아 내고 있는 이 시대의 '불량 사모'. 교회 '밖에'서가 아닌, 교회'밖에' 모르던 삶으로 돌아가려 여전히 애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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