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사면

2021년 12월 24일, 정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1)을 특별사면한다고 발표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 농단, 공천 개입 등 혐의를 인정받아 징역 22년을 선고받고 4년 9개월째 감옥에 있었는데, 이번 특별사면 결정에 따라 2021년 12월 31일 0시에 출소하게 됐다.

특별사면은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니까 이번 결정은 문재인 대통령이 한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초만 해도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 논란에 선을 그으며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은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닙니다. 국민들이 사면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국민 통합을 해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 2021 신년 기자회견(2021. 1. 18.)

문 대통령은 그 사이 국민에게 사면에 공감하냐고 물은 적이 없다. 국민들이 사면을 해야 한다고 아우성친 적도 없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유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건강 상태' 때문이라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감옥에 있는 동안 어깨와 허리가 아파서 구치소와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 왔다. 최근에는 음식물을 씹지 못할 정도로 치아 건강이 나빠져 죽이나 미숫가루 등만 먹었다고 하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해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까지 받게 됐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5년 가까이 복역한 탓에 건강 상태가 많이 나빠진 점도 고려했습니다." - 사면 관련 대변인 브리핑(2021. 12. 24.)

청와대는 지난 12월 24일 박근혜 전 대통령 특별사면을 발표했다. KTV 유튜브 채널 갈무리
청와대는 지난 12월 24일 박근혜 전 대통령 특별사면을 발표했다. KTV 유튜브 채널 갈무리
유감

문재인 대통령으로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건강 상태가 심각해질 경우 정치적 후폭풍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연민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형 집행정지'를 하고 치료를 받도록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박근혜 전 대통령 측에서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결국 특별사면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사면에 반대하는 분들의 넓은 이해와 해량을 부탁드립니다." - 사면 관련 대변인 브리핑(2021. 12. 24.)

지금껏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정치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국민의 공감대도 없이 갑자기 특별사면한 것에 유감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정치 지도자로서 이해와 해량이 보잘것없던 박근혜 전 대통령 아닌가. 그렇지만 나이 많고 아픈 데 많은 한 죄수를 인도적 차원에서 풀어 주는 것에 대해서, 부탁받은 대로 이해와 해량을 베풀고자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진짜로 화나는 것은 특별사면이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21년 12월 31일 0시 부로 사면된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21년 12월 31일 0시 부로 사면된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복고

그해 겨울 내내 추운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그 결과 제왕적 대통령도 잘못하면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새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말했다. 그래! 모든 게 다 좋아질 것 같았다.

"재벌 개혁에도 앞장서겠습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2017. 5. 10.)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벌써 다음 대통령을 뽑으라고 하는데, 거듭 묻는다. 과연 무엇이 평등했고, 공정했고, 또 정의로워졌는가. 재벌 개혁? 국정 농단의 공범인 이재용 씨는 가석방돼 풀려났다. 차별 없는 세상?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숫자가 아니라 마음과 몸으로 겪는 차별·불평등·혐오가 여전하다.

과거의 모양·정치·사상·제도·풍습 따위로 돌아가는 것을 '복고'라고 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왕정복고 시대가 열렸듯이 대한민국은 촛불 혁명 이전으로 돌아갔다. 변한 것이 없다. '박근혜 특별사면'은 그저 복고의 상징일 뿐, 그래서 유감일지언정 화가 나지는 않는다. 진짜로 화가 나는 것은 복고된 시대의 현실이다. 사람들은 외롭고 가난하고 아프고 죽는다, 계속해서.

혁명

촛불 혁명은 실패했다. 애초에 혁명이란 것이 청와대에 들어앉는 사람 하나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류는 실패를 통해 배운다. 우리가 혁명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번 겨울 대림절 초를 켜며 그해 겨울 광장의 촛불을 떠올렸다.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 (중략) 우리가 만들어 가려는 새로운 대한민국은 숱한 좌절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대들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나라입니다. 또 많은 희생과 헌신을 감내하며 우리 젊은이들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 했던 나라입니다." -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2017. 5. 10.) 

숱한 좌절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과 헌신을 감내하며 일관되게 추구했던, 그토록 이루고 싶어 했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는 한 사람의 그럴 듯한 말주변으로 만들 수 없는, 우리가 살고 싶은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러니 변하지 않은 현실만큼 우리 가슴에 따땃한 열정도 그대로이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말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 공동체의 주인인 평범한 시민들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기를. 

박제민 / 그리스도인, 녹색당원, 정치학도, 사람.

1) 박근혜 씨를 '전 대통령'으로 절제해 표현하는 것이 국정 농단이라는 비판의 목적을 더 높일 수 있다는 견해에 따라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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