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공신학이 널리 회자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데, 그중 하나는 지나치게 '엘리트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공적 영역에 적극 참여하고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사회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힘을 써야 할 테고, 제도를 제안하고 바꾸는 일 역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이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공신학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거창한 담론이 많다. 단지 교회가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거나 지역사회에서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기독교가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하면, 당장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신학의 '주체' 문제, 즉 '누가 신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비판을 하기 시작하면 다른 신학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치신학·여성신학·해방신학은 '누가' 하는가. 담론을 만들고 실행하는 주체는 주로 엘리트들이다. 이걸 비난할 수는 없다. 가난한 이들, 주변화된 이들, 삶의 자리를 박탈당한 이들이 신학의 주체가 되는 건 현실적으로 쉬워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교리를 전유해서 현재 상황에 맞게 풀어내는 작업은 신학자들의 몫이다. 오히려 그걸 제대로 안 해서 문제지.

하지만 신학의 목표, 지향점,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기존 신학은 신학의 생산자가 그들의 기득권과 삶의 자리를 변호하기 바빴다. 보통 서구 신학은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고 하는 비판이 여기에 해당한다. 해방신학이나 여성신학이 나오기 전까지 모든 신학은 소위 백인 남성 중심의 신학이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공공신학을 향한 '부르주아들이 하는 해방신학'이라는 비판은 까칠하기는 해도 경청할 만하다. 공공신학은 주로 '공론장', '공공성', '공적 이성'과 같은 키워드를 사용한다. 언뜻 보면 모두를 이롭게 하는 신학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차별과 폭력성이 감춰져 있다. 공공신학은 합리적 인간들이 공통의 사안을 함께 숙고하고 토론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도출해야 한다는 지극히 '근대적인' 사회상을 상정하고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뤄지고, 시민이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회에서나 가능한 신학이다.

<아시아 공공신학> / 펠릭스 윌프레드 외 지음 / 황경훈 옮김 / 분도출판사 펴냄 / 232쪽 / 1만 9000원
<아시아 공공신학> / 펠릭스 윌프레드 외 지음 / 황경훈 옮김 / 분도출판사 펴냄 / 232쪽 / 1만 9000원

<아시아 공공신학>(분도출판사)이라는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바로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적 공론장을 기독교 신학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다종교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공적 목소리를 발화할 수 있을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세계화나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해방신학과 다르게 만들 수 있을지, 마찬가지로 '아시아'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어떻게 기존 토착화신학과 다르게 구성할 수 있을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최신 신학이라 하더라도 한순간에 뚝딱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 공공신학에 큰 기대를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공공신학이 어떤 점에서 해방신학과 다른지, 또 기존 신학이 다룬 주제와 어떻게 차별화하는지 궁금했다.

이 책은 2011년 인도의 '아시아문화연구센터(ACCS)'에서 열린 토론회 자료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신학뿐 아니라 사회학·법학 등 다른 분야 전문가 9명이 저자로 참여해 각자 '아시아 공공신학'이라는 주제를 다뤘다. 그동안 국내에는 주로 미국·유럽 공공신학이 소개됐는데, 아시아 신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한 것은 최초인 것 같고,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학·사회학에서도 '공공성'에 대한 개념은 다양하다. 이에 따라 공공신학에서 말하는 공공성의 의미도 저마다 다르고, 이를 사용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보통 "공공신학은 한 사회나 그 사회의 특정한 측면을 옹호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조언하는 역할"을 하므로,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시민단체 혹은 공적 기관에 협력하고자 한다(33쪽). 이 과정에서 때로는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에 협력하기도 하고, 직접 지원을 받아 업무를 진행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공공서비스, 공공 의료, 공공복지라고 부르는 영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공공신학에서 말하는 공공성은 이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이다. 오늘날 브라질과 호주 그리고 특별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논의하는 공공신학은,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고, 공론장에서 발언권을 갖지 못하는 여성·소수민족·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공공신학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불우한 사람, 또 폭력과 불의에 희생된 이들의 고통을 경청하고 '느끼는' 일을 확실히 할 수 있다. 동시에 공공신학은 헌법상의 여러 제도에 무관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제도를 강화하고 그것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다. 비록 국가를 비판하는 것이 분명 소외된 사람을 편드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 비판은 국가를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려는 게 아니라 더욱 호응적인 국가가 되기를 지향한다." (35~36쪽)

어떤 이들은 오히려 이런 어정쩡한 태도가 애매하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바로 이 지점이 공공신학과 해방신학이 갈리는 지점이다. 공공신학은 국가의 정치 이념인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이자 근거가 되길 바라지, 민주주의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공론장의 외연을 확장해 민주주의를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고, 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해 국가의 보수적인 제도나 정책을 비판할 수는 있으나, 해방신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치적 전복이나 혁명적인 변화를 꿈꾸지는 않는다. 공공신학은 민주주의가 연대와 합의, 비판적 참여를 통해 충분히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고, 기독교도 여기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해방신학은 종교의 사유화를 깨뜨리고 공공 영역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줬다. 또한 경제적 종속 관계가 만든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도록 촉구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화를 통해 전방위적으로 확산한 금융자본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을 양산했다. 이제는 단순히 노동-자본의 투쟁과 관련한 사회적 분석만으로는 복잡한 현대사회의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게 됐다. 여성·환경·소수민족·이민자 등의 문제는 전혀 새로운 관계와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공공신학은 이런 구체적인 이슈와 문제로부터 신학을 다각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귀납적인' 신학이자 '현실 적합적인'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만들어진 신학을 공공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실과 여기서 나오는 질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신앙을 사적 사안으로 보지 않고 타인과 관련하여 자신을 이해하는 신앙으로 그러한 현실의 질문들에 응답하려고 노력한다."(64쪽) 변화하는 사회문제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적절한 응답을 제시하되, 그것을 시민사회에 함께 해결하려고 한다.

문제는 이런 현실 적합성이 때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방식으로 전유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선교로서의 비즈니스(Business as Mission)'나 '하나님나라 비즈니스(Kingdom Business)'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및 친기업적 신학을 노골적으로 선전하는 미국의 일부 공공신학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나라가 이익을 산출하는 사업을 통해 구축된다고 말하고,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를 결합해 기업의 신학을 만들기도 한다. 물론 이 책의 저자들은 자본주의를 등에 업은 선교로서의 세계화에 상당히 비판적이고 적절한 공공신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누군가에게는 선교의 도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을 빼앗는 악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결국 삶의 자리가 신학을 다르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누구의' 공공신학, '무엇을 위한' 공공신학이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다른 입장이 서로 충돌할 때, 오히려 세계화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더욱 치밀하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맞게 복음을 전하고, 기업을 통해 그리스도의 선한 사업에 힘쓰는 것은 그 자체로 칭찬받을 일이다. 거대 기업들이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사회사업도 많이 한다. 비지니스 선교도 좋고, 하나님나라의 기업도 그 취지는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이런 기업 활동이 우리 사회의 주변화한 이들에게 미칠 영향이라든가, 젊은이들의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바꿀지에 대한 진지한 윤리적 성찰이 없다면, 결코 좋은 신학이라 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거대 기업의 횡포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존재하고, 금융자본주의가 만든 빚더미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궁극적으로는 다음 세대와 지구환경에 안 좋은 영향력을 미친다고 한다면, 그것을 그저 '복음 전도의 수단'이라고만 퉁 치고 넘어갈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공공신학은 하위 주체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고 이에 적합한 대항 공론장을 만들어야 한다. 기존 공론장이 기울어졌다면, 아니 다양한 삶의 형식과 주체들을 충분히 포용하지 못한다면, 잠시 진리의 보편성을 접어 두고, 계속 새로운 담론을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구를 위한', '어떤' 공공신학을 추구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저마다 다른 관점과 방식으로 공공성을 말하는데, 결국 신학이 가리키는 방향과 대상이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공공선'과 '공공의 목적'이 실제로 누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며,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많은 경우 '공적'이라고 이름한 것이 특정 소수에게만 이익을 가져다주고, 반대로 사적 삶이 정당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공공신학이 관심을 둬야 하는 이들은 분명하다. "공적 공간에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외치는 주변화된 이들"이며 사회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이다(95쪽).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결국 모두를 위한 선택이고, 신학의 역할이다.

'아시아' 공공신학이 서구 공공신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종교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서구 사회가 이제는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공론장에서 어느 정도의 지분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반면 아시아 국가들에서 기독교는 이방인의 종교이자 자신들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한다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깔렸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자신들의 민족성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공동선을 위한 협력 파트너로 여겨지지 않는다. 아시아 국가에서 기독교는 "국민 전체의 복지를 위해 중요하고도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공공의 삶과 가치와 이상을 어떻게 실천하는가"라는 문제 앞에 놓여 있다(81쪽).

사실 이런 문제의식은 아시아 국가마다 세속화의 정도가 다르고, 기독교가 자리 잡고 있는 맥락이 너무나 달라서 일률적으로 풀어내기가 어렵다. 중국에서는 기독교가 "공동의 전망을 이루기 위해 중국 민족주의의 문화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세속 헌법이 존재하고 국가 종교가 없는 인도에서도 기독교가 인도 민족주의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기억이 암묵적으로 작동한다고 한다(81쪽). 결국 신학이 시민의 삶과 공공 생활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한 신학일 수밖에 없다. 종교가 모든 사람의 복지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 주어야 한다. 아시아 국가라고 해서 공공신학이 특별하게 다른 역할을 할 것은 없다. 기독교가 그저 "공공의 영역에서 어떻게 더불어 사는 삶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또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면 된다(83쪽). 그걸로 충분하다.

책을 읽으면서 살짝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공공신학은 지난 10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많은 양의 연구 문헌이 쏟아지고 있다. 따라서 2011년에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저술된 이 책이 그 내용을 다 담기에는 역부족이다. 아마도 지금 다시 이런 종류의 책이 나온다면 훨씬 더 풍부한 자료와 논의가 담길 것으로 예상한다. 최근에는 한국의 신학자들도 공공신학 담론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더 많이 참고해야 할 자료는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하지만 조금 더 앞서 공공신학 논의를 받아들인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신학자들의 것이다. 우리가 이들의 글을 읽고 배워야 할 지점은 서구 신학을 어떻게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재전유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론과 적용의 단순한 도식을 넘어서 새로운 사유의 틈을 만들어 냈는지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인 적용과 사례를 고민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우리만의 공공신학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서구의 이론적 틀을 배워야 하고, 우리보다 먼저 자기 나라의 상황에 적용한 이들의 연구를 참고해야 한다. 영토를 기준으로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서구 신학과 토착화신학을 구분하는 낡은 이분법은 신학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탈식민주의 이론을 발전시키면 시킬수록 더욱 서구 이론의 식민주의에 포섭될 뿐이라고 했던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날카로운 지적을 새겨들어야 한다. 서구 문명이 만든 세계화가 싫고, 자본주의는 나쁘고, 근대적 합리성은 폭력적이라는 단순한 비판만으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중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여전히 해방신학과 탈식민주의신학의 언저리에서만 저항 담론을 만들고 있어서 다소 아쉽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빈곤이라는 지속적인 공포가 더욱 광범위하게, 더욱 잔인하게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어쩌면 오히려 이런 시대에 '신학적인 것'이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근원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시대를 읽고 분별할 수 있는 혜안과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이 저항하고 투쟁해야 할 순간인지, 아니면 연대하고 협력해야 할 순간인지, 신학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어느 하나만 고집할 필요도 없다. 해방신학이 필요할 때가 있고, 공공신학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진영 논리에 사로잡힌 정치판이 답답한 만큼, 신학계도 이제는 변화하는 시대에 잘 적응해 유연하게 대응해야 할 때다.

최경환 /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출판사와 아카데미에서 일하면서 강연을 기획하고 다양한 세미나를 진행해 왔다. 현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공신학과 정치철학을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공저),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공저)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