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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나무로 의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윈저체어'라고 불리는 식탁 의자인데요. 주말마다 서울 모처의 목공방에서 서너 시간씩 공을 들이고 있어요. 다리·시트·등받이 등을 대부분 손으로 깎아 만들거든요. 아직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완성되면 바닥 시트가 닳을 때까지 100년 동안 아껴 사용할 생각입니다. 

목공을 시작한 지 어언 1년이 됐어요. 처음에는 손바닥만한 접시나 숟가락 같은 소품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제법 그럴 듯한 것들이 제 손에서도 나오더군요. '칭찬 폭격기'인 스승님은 때때로 "직업을 바꿔도 되겠다"며 믿기 어려운 말을 하곤 하는데요.‍ 다행히 기사 쓰고 취재하는 본업이 충분히 즐거워 넘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가끔 <뉴스앤조이> 기자로 일하면 힘들지 않은지,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계신데요. 목공의 덕이 큽니다. 디자인 감각도 부족하고, 빨래도 삐뚤빼뚤 개는 '똥손'인 제가 목공에 푹 빠진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무가 주는 위안 덕분인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나무를 깎다 보면 저도 모르게 몸의 긴장이 풀리고, 묵묵히 본업을 이어 나갈 용기 같은 것을 얻거든요.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갈수록 집이 좁아진다는 겁니다. 안 그래도 고양이 집에 얹혀살고 있는데 말이죠. 나무 협탁에, 스툴에, 이제는 의자까지 가져가려니 벌써부터 저희 고양이의 한숨 소리가 들립니다. "인간…집에 의자가 벌써 다섯 개야..." 이번에도 새로운 캣 타워라고 잘 설득해 봐야겠습니다.

편집국 수진

친절한 뉴스B

상처만 남긴 '노태우 국가장 기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이홍정 총무가 10월 30일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에서 기도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정치적 행사에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비치려 하는 보수 진영 목사들이야 원래부터 그랬으니 그렇다 쳐도, 5·18 진상을 규명하고 그 정신을 계승·보존하기 위해 앞장서 온 교회협의 수장이 그 자리에 갈 수 있느냐는 거죠.

교회협 안팎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홍정 총무는 공적 행사에서 보수 교계의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점을 우려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가서 노태우의 과오를 언급하고 시대정신이 담긴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실제 기도문에도 이러한 인식이 보입니다. "12·12 군사 반란", "집단살해의 주범", "군부 세력의 폭정", "주권재민의 가치를 유린하는 불의한 권력" 같은 표현이 쓰였으니까요.

보수 교단 목사들은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는 단어들을 가감 없이 털어놓고 왔는데도 비판이 이어지자, 이홍정 총무는 억울해했다는 후문입니다. <뉴스앤조이>는 짧게나마 이 총무의 심경을 듣긴 했는데요. 이 총무는 11월 1일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지금은 비난을 감수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는 사람으로 있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 왔습니다. '비판' 대신 '비난'이라고 표현한 점이 눈에 띕니다. 

에큐메니컬 단체들의 문제 제기와 사과 요구가 이어지자, 결국 이홍정 총무는 국가장 참석 5일 만인 11월 4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과했습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광주 희생자와 유가족, 민주화 운동을 함께해 온 교계 단체들과 2030 에큐메니컬 활동가들에게 사과하면서 충분한 의견 수렴 없이 기도회에 참석한 점도 개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를 지켜본 에큐메니컬 활동가들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습니다. 진보 교계에 상처만 남긴 노태우 국가장 기도회는 이렇게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편집국 승현


새 술은 새 부대가 필요해

새로운 교회 연대체가 출범했어요. '한국예수교회연대'인데요. 기성 교단의 구태와 폐단을 비판해 온 목회자·단체·교회들이 하나의 지붕 아래 모인 거예요. "차별과 배제를 반대하고 다양성 속에 일치를 추구하겠다''는 기치를 내 걸었어요.

이들이 출범식을 위해 선택한 장소는 '동자동 쪽방촌'이에요. 서울역 옆에 위치한 동자동 쪽방촌은 최근 민간·공공 개발을 둘러싸고 건물주와 주거민들이 갈등을 겪고 있는데요. 한국예수교회연대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가난해지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고 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 주류 교단은 교리적 배타성으로 끊임없이 분열을 거듭해 왔는데요. 교회가 차별·배제해 온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겠다는 한국예수교회연대의 출범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집단'을 만드는 것이 아닌지 우려가 되기도 해요. 이들의 발걸음이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편집국 수진


누구나 공감하는 평신도 이야기

외부 기고를 따와 지면을 채우는 편집기자 일을 하면서 항상 고민이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기독교계에서 소위 '오피니언 리더'라 불리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 '중년·남성·목사'라는 것인데요.‍ '목회지·목회자'라는 비슷한 정황·정체성에서 나오는 글들이 켜켜이 중첩하다 보니, 때로는 기시감과 피로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내고 싶지만, 제 역량 부족인지 청년·여성·평신도 필자를 찾는 일이 쉽지만은 않네요.

그런 와중에 기쁜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안녕, 기독교>(토기장이) 저자 김정주 전도사가 3년 째 진행해 온 평신도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에서참석자들이 쓴 글을 보내 온 것이지요! 김 전도사는 "목회자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면서, 교회 내에 유통되는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납작해지고 협소해졌다"고 평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들의 글에 담긴 서사는 내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줬다. (중략) '쓰고뱉다'를 진행하며 어떤 책에서도 얻지 못했던 지식들을 '사람 책'에서 얻게 됐다"고 했습니다.

참석자들 역시 자기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며 치유·회복·자유함을 느꼈고, 서로 마음을 열고 연대하게 되면서 이 모임이 '교회' 같다고 입을 모았다고 해요. 그 누구도 의도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뉴스앤조이>는 '쓰고뱉다 완성반' 과정을 수료한 분들이 '한 권의 책 쓰기'를 진행하며 쓴 글 중 몇 개를 뽑아 차례로 게재할 예정입니다. 어디서도 쉽게 들어본 적 없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이야기. 기대해 주세요. 

편집국 운송


그리스도인을 위한 경제 이야기(6)
제국주의와 나

얼마 전 <뉴스앤조이> 후원회원들과 함께 5회에 걸쳐 자본주의 경제사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애덤 스미스를 시작으로 토마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르도, 로버트 오언, 존 스튜어트 밀, 칼 마르크스, 헨리 조지, 칼 멩거, 알프레드 마샬, 레옹 왈라스, 빌프레도 파레토, 존 엣킨스 홉슨, 아서 세실 피구, 소스타인 베블런, 존 메이너드 케인즈, 조셉 슘페터, 밀턴 프리드먼까지 경제학의 뼈대를 이루는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았습니다. 

1951년 초판이 발간된 <세속의 철학자들>을 교재로 사용하다 보니 근대 이후 등장한 주요 경제학자를 다루는 데 한계가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주요한 주장이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는 데에는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5주 만에 끝내기에는 너무 많은 학자를 다루었습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구성했다면 2학기 분량은 족히 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참여하신 분이 얼마나 진지하게 공부를 하셨던지 준비하는 저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제 마음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학자는 애덤 스미스나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아닌 존 엣킨스 홉슨이었습니다. 저의 전공은 재무이기 때문에 전통 경제학을 공부한 것은 아닙니다만, 재무라는 학문이 경제학에서 나왔고 제 개인적인 관심사도 주로 경제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보니 경제 공부를 상당히 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저에게 홉슨을 공부하라고 권해 준 선생님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홉슨이 자본주의 경제학의 주요 흐름과 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홉슨의 이론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되어 시스템화되는 20세기 초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기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와는 무관한 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홉슨의 주장이 마르크스에 기반하고 있다는 인식 또한 원인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홉슨의 제국주의 시스템 비판이 크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홉슨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지속된 서구 열강의 식민지 구축 현상을 진단하면서 그전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분석했습니다. 20세기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과잉생산 문제와 자본 독점 경향,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분배의 왜곡을 해결하기 위해 구축된 일종의 시스템으로 보았습니다. 홉슨의 제국주의 비판은 제국 식민지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나라는 불과 80년 전까지 제국주의의 피해자였습니다. 일제의 폭압적 식민지 정책과 반 인륜적 만행의 피해자가 생존해 계시고 사회적으로도 그 영향이 남아있습니다. 홉슨의 제국주의 비판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일본이라는 나라가 악해서 포악한 제국이 된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지금까지 잘 하지 못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구조는 제국주의 시스템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제국이 식민지의 정치, 경제, 문화를 통제하면서 자국민들의 경제적 효용을 극대화하려 했던 통치 시스템이 현대에 들어서 강대국 위주의 국제기구들을 통해 연장되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이 많습니다.

홉슨을 읽으며 마치 홉슨이 팔짱을 끼고 선진국 대열에 새롭게 진입하려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불과 80년 전 제국의 식민지였던 한반도가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섰을 때 세상은 어떤 기대를 할 것인가?제국의 리그인 G7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일인가? 그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제국처럼 군림할 것인가 아니면 제국의 피해자들의 대표로서 아직도 억압당하는 이들의 편에 설 것인가? 

앞서 열거했던 경제학자들은 거의 모두 제국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몇몇은 제국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겠지만 대체로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겠지요. 더 큰 문제는 지금 경제를 공부한다는 저 같은 이들이 미국과 영국에서 주로 다듬어진 경제 담론을 경전으로 붙잡고 이 땅, 그리고 제국주의 시스템의 피해자였던 아시아의 체제를 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홉슨을 읽으며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반성했습니다. 저도 솔직히 이 땅의 역사와 뿌리에 기반한 경제학적 지식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이론들을 공부했고 지금도 그렇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공부를, 어떤 활동을, 나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다움을 충분히 구현하는 세상이 되도록 이 땅의 역사와 현실에 기반한 연구와 활동을 해야겠다는 성찰을 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서 정말로 많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 변화의 엔진은 신앙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자기희생적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면 다시 한번 교회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처치독 독자분들과 함께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뉴스앤조이 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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