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신군부의 핵심이자 제6 공화국을 이끌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지난 10월 3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국가장으로 진행됐다. 그의 국가장은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장례가 끝난 후에도 논란은 가시지 않고 있다. 논의를 좀 더 진행하기 전에 다음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이번 국가장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바 있지만, 고인의 아들 노재헌 씨가 지금까지 보여 준 광주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한 사죄 행동을 평가절하할 생각은 없다. 노재헌 씨의 행동은 친일이나 군사독재와 같은 역사적 과오를 저지른 이들의 후손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노력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사독재가 남긴 폐단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성숙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죄의 노력이 신군부의 독재와 억압 통치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상쇄할 수는 없다는 것이 보다 분명해진다. 얼마 전 야권 경선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윤석열 후보의 전두환 옹호 발언은 각계각층의 수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이는 한국 사회가 신군부에 의해 발생한 정치적 왜곡 현상을 여전히 용납할 수 없는 역사적 과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노태우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해 장례 예식을 집례한 목사들. SBS 중계 영상 갈무리
노태우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해 장례 예식을 집례한 목사들. SBS 중계 영상 갈무리

그런데도 일부 교계 지도자들은 이번 국가장에서 장례 예배를 집전하거나 기도·축도로 참여해 역사의식이 결여된 발언들을 쏟아 냈다. 이들 중 설교를 맡았던 소강석 목사(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와 이철신 목사(영락교회 원로)는 유족들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5·18 광주 무력 진압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듯한 말들을 내뱉었다. 개인을 향한 위로의 말과 잘못된 역사적 행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선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러한 모습은 이들의 역사의식뿐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 체계가 왜곡돼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사실 한국의 보수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을 각각 대표하는 목사로서 이들의 설교와 기도는 지금까지 보여 준 대사회적 언행에 비춰 볼 때 대단히 모순적이다. 이들이 장례 예배를 통해 유족을 위로하기 원했다면 예배만큼은 가족 차원에서 진행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역사적 왜곡의 문제와 관계없이 장례식 본래 취지를 살려 유족들을 마음껏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말대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말로 '개신교인'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영결식에서 불교·개신교·가톨릭·원불교 순으로 4대 종단 의식이 거행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해야 했다. 하지만 두 보수 교단 목사들에게 이번 장례 예배는 일종의 '정치적 이벤트'였을 뿐이다.

보수 교단을 대표하는 목사들뿐 아니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총무 자격으로 국가장에 참석한 이홍정 목사에 대한 비판도 무시할 수 없다. 그에 대한 비판은 개인의 잘못된 판단에 국한한 문제가 아니라, 교회협 전체의 역사의식에 대한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이는 당연한 결과다. 과거 근본주의 성향의 보수 교단들이 군사독재 세력과 결탁해 이권을 챙기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장할 때, 교회협이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기독교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비록 이홍정 목사가 다른 보수 교단 목사들과 달리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과오를 언급했다 하더라도, 결국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용서와 화해를 일방적으로 선포했다는 점에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영결식에서 기도 순서를 맡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이홍정 목사. SBS 중계 영상 갈무리
영결식에서 기도 순서를 맡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이홍정 목사. SBS 중계 영상 갈무리

하지만 이번 논란을 단순히 일부 보수적인 목사들의 일탈이나 교회협 내부 문제로 제한할 경우, '한국교회의 왜곡된 권력 욕망'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놓치게 된다. 이번 국가장과 관련된 사회적 논란이 어떤 식으로 정리되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권력과 결탁해 이권을 챙기고 종교적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려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왜곡된 권력 욕망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보수 교단 지도자들은 '정교분리'라는 미명하에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나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의 선지자적 역할을 부정하면서도, 군사독재와 같은 억압 권력과 결탁하거나 권위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는 자신의 종교적 영향력을 사회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왜곡된 권력 욕망이 표출된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1)라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명제처럼,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왜곡된 권력 욕망은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영적 권력을 가진 집단인 교회는 세속 권력을 대표하는 국가·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영적 권력과 세속 권력의 상관관계에 관한 신학 담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사실 양자는 구분될지언정 분리돼 있지 않기에, 어느 한쪽의 왜곡된 욕망은 다른 한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돼 있다.

근대적 의미의 정교분리도 결국 교회의 종교적 영향력이 공적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에 발전한 것이다. 더구나 20세기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교회가 민주주의 사회에 적합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할 때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거나 스스로 권력화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줬다. 헬무트 골비처(Helmut Gollwitzer)의 비판처럼, 종교와 정치의 혼합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루터의 '두 왕국 이론'은 원래 의도와는 달리 나치 시대에 독일교회가 독재에 침묵하거나 결탁하는 데 종교적 정당성을 제공했다.2)

한국교회도 이와 같은 역사적 과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국가권력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해방 이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로 대표되는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깔려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한국 사회 주류 종교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군이 해방군의 이미지로 국내에 진주하면서 기독교는 미국을 대표하는 종교로 인식됐다.

냉전 시대의 대립적 상황에서 미군정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교계 지도자들에게 유리한 정책들을 펼쳤고, 미군정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이승만 정권도 미국 유학 경험이 있거나 미국 교회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이러한 친 기독교 정책은 한국전쟁과 박정희 정권 이후 미국의 원조와 경제 지원이 절실해지면서 보다 심화했다. 이 과정에서 독재 권력과 결탁해 기득권을 유지했던 이들은 한국교회의 주류로 자리 잡았고, 왜곡된 정치권력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며 저항했던 개신교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보수 교단에서는 근본주의가 주류로 자리 잡아 가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왜곡된 권력 욕망이 종교적으로 정당화됐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소비의 사회>(문예출판사)에서 현대인의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적 문화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우리들은 사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중략) 물론 그것들이 호사스럽고 풍부하여도 그것들은 인간 활동의 산물이며, 또 자연의 생태학적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환가치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3) 현대인은 스스로를 필요해서 뭔가를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성찰해 보면 대자본이 투입된 광고나 인플루언서(Influencer)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외재적 영향력은 단순히 상업·경제 분야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한국교회의 왜곡된 정치권력 욕망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기 전에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정치 참여에 관한 논의는 불가능해진다.

한국교회의 대다수의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하거나 공적 행위를 하는 것이 곧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미성숙한 정치의식이다.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책임이자 의무이지만, 정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에 대한 평가는 어떤 이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다. 둘째, 그 의도가 결과를 상쇄한다. 예를 들어, 차별금지법(평등법) 반대 운동처럼 외적으로 사랑의 마음을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낳았다면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 아나라 차별과 혐오의 행위로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그 '의도'만을 강조한다.​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왜곡된 인식은 사회 속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제거해 버린다.4)

예수는 스스로 '랍비'라 불리길 바라면서도 자신들이 말하고 가르치는 대로 행하지 않는 당대 서기관·바리새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마 23:1~7). 종교인의 사회적 영향력은 자신의 말과 가르침이 삶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관계없이 사회적 존경과 영향력을 추구할 때, 강제력을 지닌 정치권력에 의존하려는 왜곡된 권력 욕망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21세기 그리스도인은 한국교회의 회복이 과거의 역사적 과오를 회개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왜곡된 권력 욕망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박성철 / 교회와사회연구소 소장

1) 이와 관련하여 자크 라캉/권택영, 이미선, 민승기 옮김, <욕망 이론>(서울: 문예출판사, 1994)를 참조하라.
2) Gollwitzer, "Die christliche Gemeinde in der politischen Welt," in Forderung der Freiheit. Aufsätze und Reden zur politischen Ethik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62), 5-7.
3) 쟝 보드리야르/이상률 옮김, <소비의 사회 - 그 신화와 구조>(서울: 문예출판사, 1992), 13.
4) 이와 관련하여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6), 31, 294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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