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폭력'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불편함이 있다. 폭력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우리 안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교단 총회에서 성폭력특별법을 만들어 달라는 청원이 번번이 무산되는 이유 중 하나다. "굳이 그런 법을 만들 필요가 있는가", "성폭력이라는 말이 법에 들어가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실제 총회 현장에서 나온 말이다. 애써 이야기하지 않으려 해도 폭력은 어디에나 있다. 교회 안에도.

사실 폭력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민감해야 할 문제다. 역설적이게도 평화를 이루려면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폭력인지 알아야 하고, 이것이 폭력이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평화 감수성이 높다는 말은 폭력 감수성이 높다는 말과 같을 수 있다. 불편하지만 내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폭력적인 문화를 직시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평화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천 페미니즘 운동 단체 '믿는페미'가 9월 진행하는 성 인지 감수성 교육 프로젝트 '성경학교'는 폭력에 대해 다룬다. 믿는페미 활동가이자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폭력 예방 통합 교육 전문강사 도라희년(활동명)이 강의 4개를 준비했다. 폭력 예방 통합 교육 강사는 4대 폭력 – 성폭력, 성희롱, 성매매, 가정 폭력을 모두 가르치는 사람이다. 믿는페미 성경학교에는 기본적으로 이 4대 폭력을 이해하는 시간은 물론, 성경과 신앙을 돌아보기 위한 시간도 마련돼 있다.

이렇게 기독교인에게 '맞춤한' 폭력 감수성 교육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뉴스앤조이>는 8월 31일 서울 중구 희년평화빌딩에서 도라희년을 만나 이번 믿는페미 성경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소 무거운 주제인 폭력을 다뤘지만, 도라희년 특유의 입담으로 이야기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왜 폭력을 직면해야 할까. 무엇을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폭력과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기사로 살짝 맛보기 해 보자.

- 교계에 4대 폭력을 다 다루는 강의는 흔치 않은데요. 어떻게 이런 기획을 하게 되셨어요?

4대 폭력 교육을 교회에서 할 기회가 거의 없어요. 사회에서는 그나마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이 의무 사항이라 강조되는데, 교회는 직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마저도 잘 안 되죠. 가정 폭력 같은 것도 다들 말하기를 꺼리잖아요. 교회에서 가정은 '축복'이니까. 성매매 교육한다고 하면 반응이 "나는 성매매도 안 하는데 그걸 왜 들어야 하냐" 정도예요.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데, 왜 배워야 하는지 전혀 감을 못 잡는 거죠. 국가에서는 성폭력, 성희롱, 성매매, 가정 폭력을 '4대 폭력'으로 규정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교회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아예 들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에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이런 교육을 할 때 요청 사항이 대부분 "30분, 1시간 안에 해 주세요", "재밌게 해 주세요" 수준이에요.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만 1시간 안에는 절대 못 하죠. 그래서 아예 네 번으로 나눠 넉넉하게 잡았어요. 교회에서 여름 성경학교 같은 거 하면 총 4과로 하잖아요. 그것처럼 이번 과정도 일부러 1과, 2과, 이렇게 이름 붙였어요.(웃음)

- 그러고 보니까 전도사로 사역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폭력 예방 통합 교육 강사 자격은 언제 취득하신 거예요?

2019년부터 준비해서 올해부터 강사로 나가게 됐어요. 4~5년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제가 성폭력 예방 교육을 했어요. 하고 나서 한 부장 집사님이 심하게 반발하셨어요. 혐오 집회 나가고 하시던 분인데 제가 '젠더'를 이야기하니 반응이 어땠겠어요. 그분이 가장 뭐라고 하신 게 전문성이었어요. 전문성도 없는 신대원생이 잘 알지도 못하고 이야기한다는 거죠. 그때 정말 호되게 털리고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면 자격증이 있어야겠다 싶었어요. 알아보다가 폭력 예방 통합 교육 강사 공부를 하게 된 거죠.

과정이 꽤 힘들어요. 예전에는 4대 폭력 하나하나 전문강사가 있었는데, 4대 폭력은 사실 다 이어져 있거든요. 그래서 통합 교육 강사 과정을 만든 거예요. 200시간 정도 강의 듣고, 강의안을 직접 만들어 평가받고, 그걸로 시연까지 해야 통과되거든요. 4시간짜리 강의를 거의 외우다시피 해야 해요. 자격도 매년 갱신해야 하고 그러려면 1년에 최소 강의 실적 12개를 채워야 해요.

강사 교육을 받는 분 중에는 여성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경찰, 검사, 변호사 등도 있었는데요. 종교 단체 쪽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더라고요. 제가 신학교 교수, 신학생, 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안을 만들었을 때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이번에 믿는페미 성경학교에서도 이 강의안을 좀 더 가공해서 사용할 예정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폭력을 모른 척한 채 이뤄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폭력을 모른 척한 채 이뤄질 수 없다. 

- 사실 교회 안이라고 해서 폭력이 없는 건 아닌데요. 폭력이라는 말 자체가 불편해서인지, 유독 교회에서는 더 폭력 문제가 다뤄지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는 폭력을 이야기할 때 그 형태나 크기, 강도 같은 것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중요한 건 폭력의 '본질'이에요. 폭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통제'하기 위해서거든요. 사람은 존재 자체가 지닌 힘, 기독교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요. 이건 고유의 영역이라 누가 박탈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폭력은 이 고유 영역에 침범해 그 사람의 권리를 박탈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어그러뜨리는 거죠.

폭력의 본질을 통제라고 보면, 폭력은 꼭 때리지 않아도 발생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가부장적인 집에서 아버지가 갑자기 한숨을 푹 쉬어요. 그러면 다른 가족들은 다들 긴장하는 거예요. '내가 밥을 안 차려 드려서 그런가' 하면서 괜히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게 돼요. 아버지의 한숨이 사람을 통제하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된 것인데, 아무도 이 한숨을 폭력이라고 여기지 않죠. 교회에서도 목사님이 돌려 말하기만 해도 성도들이 알아서 움직이잖아요. 그 자체를 폭력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분명 폭력을 용이하게 하는 환경을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하나도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잖아요. 이 평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해요. 예수님 당시 세상은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를 말하는 시대였어요. 하지만 그 평화는 강력한 군사, 폭력에 기반한 평화였죠. 가난한 자, 눈먼 자, 걸을 수 없는 자, 과부, 아이들, 여성 등은 여전히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이면이 있었고요. '제국의 평화'가 지닌 폭력성·기만성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해요. 그걸 직면해야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거죠.

예수님의 성육신이 의미 있는 이유 중 하나는 3년 공생애 전 30년을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일상을 사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폭력은 이 일상을 짓밟는 행동이죠. 미투 운동을 예로 들면, 피해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일상을 회복하려 하거든요. 피해자가 빼앗길 수 없는 것을 빼앗기고 그걸 되찾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이건 구조 자체가 완전히 뒤틀린 거예요. 저는 성육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을 갉아먹는 폭력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를 근절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 3과 주제가 '성경 속 성폭력'이에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흥미로운데요.

성경 속에서 성폭력은 사실 남성과 남성 사이 갈등이 극대화할 때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 사건에서 여성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어쩌면 말을 했는데 기록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이런 식으로 성경 속에 왜곡된 사람, 지워진 사람,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봐요. 성경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성경을 봐 왔는지 알게 되면 같은 성경이어도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고대 사회에서 여성은 사고팔 수 있는 재산 취급을 받았으니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야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여직 그 해석을 바꾸지 않으면서, 설교할 때 우스갯소리로 성경 속 성폭력을 사용하는 목사님이 많아요. 그런 것들이 지금 시대 여성들에게는 상처가 되고 교회를 떠나게 하는 요소가 되거든요. 그게 잘못됐다고 규탄하자는 게 아니고, 몰랐으니 이제 알아가면 된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어떻게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사례 3개 정도를 이야기하려 해요.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 해석이 가장 큰 위로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상처의 도구가 되기도 하거든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뉴얼은 기독교 단체가 아니더라도 여성·인권 단체가 더 전문적으로 잘 만들어 놨어요.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걸로 부족해요. 우리에게는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으니까.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다른 전문가들이 구축해 놓은 작업들을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앙의 언어로 성폭력을 설명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예전에는 페미니즘의 언어로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 애썼는데요. 지금은 신앙·교회의 언어로 페미니즘을 설명하려 노력해요. 수십 년 교회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건 가부장적, 제국주의적 언어야"라고 하면 설득이 되겠어요? 오히려 자기 삶을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겠죠. 요즘에는 어떤 오염된 단어가 있으면 그 부분만 싹싹 닦아 내고 원래 의미를 복원하거나 새로운 대안 언어를 찾는 방향으로 생각해요.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이런 면이 보이더라고요. 예수님의 평화는 로마의 평화와 대립되는데, 예수님이 '평화'라는 단어를 포기하지는 않더라고요. 로마의 평화가 기만했던, 그 오염된 찌꺼기만 걷어 내서 '그리스도의 평화'로 전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예수님을 '주(퀴리오스)'로 고백하는 것도 그래요. 당시 퀴리오스는 로마 황제였는데, 결국 이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신앙고백으로 가져왔잖아요.

'젠더'라는 단어가 딱 그래요. 이 말이 교회 안에서 심하게 오염돼 있잖아요. 하지만 4대 폭력이 일어나는 구조를 설명할 때는 '젠더 기반 폭력'이라고 말해야 정확하거든요. 젠더라는 말을 버리면 폭력에 대해 반쪽밖에 설명하지 못해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이 언어를 포기하지 않고 오염된 부분을 걷어 내자고 설득하려 해요.

믿는페미는 크리스천 페미니즘 운동을 표방하며 활동해 왔다. 믿는페미 페이스북 페이지 갈무리
믿는페미는 크리스천 페미니즘 운동을 표방하며 활동해 왔다. 믿는페미 페이스북 페이지 갈무리

- 4과 주제도 '여성을 왜곡하는 언어'인데, 언어에 대한 생각이 많으신 것 같네요.

여성을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전에 어떤 부부 찬양 사역자가 하는 부흥회에 참석했는데요. 남편 사역자가 기도 시간에 이러는 거예요. "하나님께 작곡 잘하고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을 보내 달라고 기도했더니 집사람을 보내 주셨다"고. 아내 사역자는 작곡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는 능력자인데, 한 명의 찬양 사역자가 아니라 결국 '집사람', 남편 사역자를 보좌하는 사람으로 표현되는 거죠. 여성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가족의 언어로 숨겨 버린 거예요. 이건 진짜 여성을 위한 게 아니죠. 이런 식으로 일상에 만연한 여성을 왜곡하는 언어들을 살펴볼 예정이에요.

이런 언어들에 누구의 시선이 반영돼 있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경찰에 포위된 강도가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자살했다는 보도가 있었어요. 언론은 이를 '동반 자살'로 표현했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내와 아이들은 죽기로 동의한 게 아니거든요. 정확하게 말하면 '살해 후 자살'이죠. '동반 자살'이라는 말 속에는 아내와 아이들의 시선은 없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로마의 평화'가 과연 누구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 재밌고 유익한 강의가 될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런 시각을 배우고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인 후에 교회에 돌아가면 개인적으로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되네요.

맞아요. 더 힘들어지고 괴로울 거예요. 저도 처음 페미니즘을 접했을 때 '아니, 이런 언어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니!' 하면서 분노하고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어요. 하지만 분명 환영할 만한 경험이에요.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잖아요. 저는 자기 부인은 '시선의 균열'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내가 봐 왔던 것 밖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 당연히 두렵겠지만 결국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거죠.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면, 공동체 안에서 폭력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보일 거예요.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건 고유한 힘, 하나님의 형상이 박탈당하는 모습을 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어떤 거창한 일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유튜브에서 폭력적인 콘텐츠에 신고 버튼 하나 누르는 것도 십자가일 수 있죠. 각자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 그게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 아닐까요. 교회 문화는 쉽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 폭력을 직면하는 괴로움을 기꺼이 감내하는 게, 그래서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 가는 게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해요.

*믿는페미 성경학교 참가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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