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재수 경제학 교수가 <청소년 매일성경>(성서유니온) 2021년 3~4월호에 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라는 글 때문에 2020년 1~2월호부터 연재해 온 '큐티, 경제학과 만나다' 코너를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연재가 중단되기 전, 소셜미디어를 통해 김 교수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 그 글을 읽고 든 생각은, 그의 해석이 기본적으로 '메시지'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성경해석학 차원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성경의 비유는 세부적인 서술에 집착하기보다 비유 전체가 제시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 비유가 언급된 '삶의 정황'을 이해해야 한다. 해석학적 순환 차원에서 '독자와의 만남 사건'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복음서 저자가 비유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성경 전체, 복음서, 인접 본문의 맥락에서 일관성 있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비유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찾는 것이 중요하다. 비유에는 수수께끼 비유, 본보기 비유, 도전하는 비유, 공격하는 비유 등 매우 다양한 종류가 있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해석학적 기본 전제를 가지고 비유를 해석해야 한다.

김 교수는 <청소년 매일성경>에서 '달란트 비유'의 전통적 해석을 전복하는 해석을 제시했다. 주인을 불의한 체제의 대변자로 보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약자'로 재해석했다. 김 교수의 글은 과연 해석학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을까? 여러 면에서 조금 부족해 보인다.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호명되고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대상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항상 부정적으로 사용됐고, 인접 문맥상으로도 이를 긍정적으로 읽기 어렵다. 약자의 입장에서 비유를 읽은 시도는 좋았지만, 해석학적 타당성이 좀 부족했다.

사실 김 교수의 해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 여러 신학자들이 제시한 관점이다. 나도 어떤 책을 읽으면서 그런 해석을 접한 바 있다. 전통 기독교가 달란트 비유를 워낙 자주 '현대 자본주의 옹호' 메시지로 읽거나, 심지어 '불의한 현실 정당화' 메시지로 읽다 보니, 신학자들이 다른 해석을 시도한 것이고, 김 교수도 동일한 이유에서 이런 해석을 수용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 어느 목회자 모임에서 독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주로 건강하게 목회하는 대형 교회 목사님들이 참석했다. '한국의 평등주의'에 문제 제기하는 책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였는데, 한 목사님께서 그 책을 읽고 고무됐는지 한국의 평등주의를 비판하며 달란트 비유를 예로 들었다. "성경은 이렇게 자본과 재능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꼭 달란트 비유를 그렇게만 해석합니까? 더군다나 달란트 비유가 마태복음에만 나오나요? 누가복음에는 열 므나 비유로 나오고 열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한 므나씩 주어집니다. 열 사람이 동일한 출발선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 강단은 달란트 비유만 좋아하고 열 므나 비유는 잘 말하지 않나요? 왜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를 동일한 메시지인 열 므나 비유와 연결해서 해석하지 않나요? 한국 사회가 정말 평등주의가 문제입니까? 평등주의보다 능력주의가 더 문제가 아닐까요?"

위의 말처럼, 한국 사회는 평등주의보다 능력주의가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 또한 최근 <에큐메니안>에 '너희가 능력을 믿느냐 -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능력주의라는 허상'이라는 글을 썼다. 현대사회는 능력적 요인보다 비능력적 요인이 성공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도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능력적 요인이 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과대평가하고 비능력적 요인은 과소평가한다. 더군다나 삶의 현실은 우리의 경주가 혼자서 하는 달리기가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릴레이경주'임을 보여 준다. 현대사회는 릴레이경주를 치르는 새로운 '세습 사회'다. 나는 이런 현실을 바울이 비판한 '율법적 체제'라고 부른다. 자기가 얻은 것을 자신의 노력과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기독교가 은혜의 윤리와 선물의 체제를 말해야 하는데, 도리어 능력주의를 옹호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비기독교인이 개신교를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집단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달란트 비유에 대한 전복적 해석을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메시지'를 대부분 수용하고 있는 나조차도 그들의 '해석'을 수긍하기는 어려웠다. 메시지는 좋은데 해석학적으로는 조금 무리가 따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메시지는 다른 비유를 통해서 충분히 제시할 수 있는데, 굳이 달란트 비유에서 저런 해석을 했을 경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조차 비판을 받게 될 우려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런 해석을 통해 다양한 해석이 창출되고 건강한 논쟁들이 이뤄진다면, 성경 해석이 더욱 풍부해질 수도 있겠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의 성경 해석자인 김 교수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경제학자였다. 신학자조차 그런 해석을 하는 마당에 경제학자가 그런 해석을 해 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니, 경제학자의 눈으로 보는 해석이야말로 성경 해석을 더 풍성하게 하는 것 아닐까? 다양한 학문 전공자들이 다양한 해석을 내놓을 때 논의가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최근 무신론자인 현대 철학자들의 '바울 해석'조차 성경 해석을 더욱 풍성하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경제학자의 그런 해석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면 균형 잡힌 신학자들이 나서서 적절하게 논쟁하고 해석학적 합의를 이루면 되는 문제다. 메시지 자체에 문제가 없다면 적절한 성경 해석을 통해 수용하면 되고, 메시지 자체가 문제라면 적절하게 비판하여 바로잡으면 된다. 그것이 건강하고 합리적인 기독교 공론장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독자 혹은 기독교인들이 그의 글을 무차별적으로 비난했고 불매운동까지 불사하여 결국 '연재 중단'이라는 사태를 만들어 냈다. 나는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신학자도 아닌 경제학자의 글을 가지고 출판사와 선교 단체를 공격하고 끝내 연재를 중단시켜 버리는 '폭력성'이 과연 기독교 정신인가? 무슨 '기독교 홍위병'도 아니고 말이다. 전통적인 해석 이외에는 모두 이단시하며 마녀사냥식으로 정죄하는 이와 같은 행태가 여느 종교·정치 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전통적인 '해석'이 절대적인 '진리'인가?

우리가 전통적인 해석이라고 믿고 있는 해석들도 수많은 역사적 논쟁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천 년 전에 쓰인 성경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민할 때 이러한 과정은 숙명과도 같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제국주의, 노예제도, 인종주의, 여성 차별, 환경 파괴를 옹호하는 해석들을 수정할 수 있었고, 문자주의적 해석에 근거한 '삼층천 세계관'·'천동설' 같은 비과학적·전근대적 사고방식을 수정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교회는 현대 문화에 적응할 수 없고 그를 변화시킬 수도 없으며, 과학적 지식마저 거부하고 게토화하는 반문화주의적·반지성주의적·신비주의적 근본주의 집단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가 신천지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나는 앞서 김 교수의 해석이 성경해석학 차원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성경해석학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김 교수의 소셜미디어 글을 보니, 비난자들이 그를 "마귀 새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지옥불로 이끄는 거짓 교사", "사이비 이단",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걸 단순한 성경해석학 차원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이건 분명 '문화 전쟁'이자 '이데올로기 전쟁'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큰 문제다. 복음이 특정 이데올로기와 등치되거나 교회를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만드는 것 말이다. 물론 어떤 해석도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지식이 권력의 효과이고 권력은 지식의 효과라면, 그 어떤 지식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이 신학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성경 메시지 자체도 보수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에 이데올로기적이다. 하지만 복음은 보수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어떤 경우는 현실의 보수보다 더 보수적이거나 현실의 진보보다 더 진보적이다. 동시에 기존의 보수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을 해체하는 능력이 복음 안에 있다. 그 무엇으로도 포착 불가능한 차원이 내포해 있는 복음의 능력은 이데올로기로 환원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특정 이데올로기와 복음을 등치시키거나 교회를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방역 지침을 종교 탄압이라고 외치며 대면 예배를 강행하거나, "대통령 하야"를 외치며 광화문 광장에 모여 전염병 대유행의 빌미를 제공하고, 선거 국면에서 목사들이 "하나님은 좌파의 하나님일 수 없고 우파의 하나님"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거나, 교단장 이름으로 "이번 선거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냐 사회주의 체제냐 라는 선택의 기로에 있는 선거"라는 공문을 내는 일이 자행됐다.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그것도 극우 이데올로기와 다를 바 없다. 1970~1980년대에나 통했던 이러한 행위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토피아>(아르테)에서 문제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향수에 빠져 과거를 이상화하고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전통 기독교는 '젊은 지구론'(성경 연대기에 따라 지구 나이가 6000년이라는 주장 - 편집자 주)을 주장하며 반지성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번 사태처럼 자신의 주장과 다른 해석을 향해 열린 자세를 갖지 못하고 마녀사냥식으로 반응하는 것도 반지성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런 행태가 기독교를 '탈진실 시대'의 표상으로 만들고 있다. 많은 가짜 뉴스의 출처가 기독교인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대목이다. 리 매킨타이어는 <포스트 트루스>(두리반)에서, 진영의 양극화가 인지 편향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과 분노와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고 말한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만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 마치 중세로 돌아간 것 같다. 지금 기독교는 중세 시대의 교회와 뭐가 다른가?

또한 호모포비아·이슬람포비아를 드러내며 공론장의 시민 윤리조차 어기면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위기' 또는 '지위 위협'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에이미 추아가 <정치적 부족주의>(부키)에서 말한 것처럼, 위기감을 느끼는 집단은 집단본능 때문에 '부족주의'로 후퇴해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더 폐쇄적·방어적·징벌적·공격적이 되고, 모든 것을 "우리 대 그들" 관점에서 본다고 한다. 지금 기독교의 모습이 정치적 부족주의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보편적 진리를 선포하는 기독교가 부족주의에 물든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옳은가?

이런 모습이 한 경제학자의 성경 해석에 대한 공격으로 드러났고, 심지어 청어람ARMC을 향해서도 표출됐다. 어떻게 알았는지, <매일성경>을 만드는 성서유니온이 청어람ARMC에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동성애·페미니즘 이슈를 들고 나와 후원을 중단시키도록 만든 것이다. 이것이 과연 기독교적 정신인지 돌아봐야 한다. 이런 행동이 과연 기독교를 수호하는 것일까?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니까 자꾸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고 가나안 교인이 늘고 비기독교인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은 '수호'라기보다 '자멸'에 가깝지 않은가?

아무쪼록 기독교가 반지성주의, 부족주의, 레트로토피아, 탈진실, 혐오주의, 극우주의, 근본주의 등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성경에 복음서가 하나가 아니고 네 개이듯, 바울서신뿐만 아니라 공동서신도 있듯, 좀 더 넓은 사상과 품을 가지고 다양한 해석을 인정하는 기독교가 됐으면 좋겠다. 십자가의 복음이 유대인과 헬라인,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자를 하나 되게 했듯이 교회가 하나 되는 모습을 통해 크고 깊게 분열된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왔으면 좋겠다.

이도영 / 2010년 1월 화성시 봉담읍에 더불어숲동산교회를 개척하여 '공교회성과 공동체성과 공공성을 회복하는 선교적 교회'라는 비전을 실천해 왔다. 더불어숲동산교회의 비전과 신학 그리고 사역을 담은 <페어 처치>, 영성의 두 갈래 길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성자와 혁명가>를 저술했고, 최근 <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이상 새물결플러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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